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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5 : 조선의 역사 207 (선조실록 7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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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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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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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의 의의
명량 해전의 전략적 의의
명량 해전 후 조선 수군은 불안정한 기후와 조선 육군의 지원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명량해협에서 북상했다. 섬이 많고 수심이 얕은 서해안에서 풍랑을 피하고 이곳을 돌며 전열을 재정비,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수군이 북상한 틈을 타서 일본 함대도 서해안으로 북상했다. 단순한 시각으로 보면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는다는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투의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일본군이 서해로 올라오긴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본 수군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육상으로의 보급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일본 수군의 북상은 무안에서 끝났다. 조선 수군을 제어해야 할 일본군은 전투 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에 그 이상으로 북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 수군이 전라도 해역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충청-경기도 남부지역까지 진격한 육군에 대한 보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수군이 얻은 거라고는 조선인 포로를
좀 더 잡았고, 이 포로들 중 뒷날 일본 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강항(姜沆. 1567~1618)이 포함되어 있었다는것 정도. 그나마도 당장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직산 전투 후에 벌어진 명량 해전은 이후의 전쟁 양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명량 해전이 빼앗긴 재해권을 다시 찾을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 수군은 수로로 이루어지는 일본 수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고, 이것은 다시 육지의 일본군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당시 일본 육군은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중이었다. 그리고 직산 전투의 패배 직후에 퇴각할 양상을 조금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퇴각이라고 해서 전면적으로 뒤로 물러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 퇴각이 잠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것인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명량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대폭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남해안의 왜성에서 농성을 벌인다. 여기에 제일 큰 이유는 바로 보급이다. 일본군은 이미 임진년(1592년)에 재해권과 그에 따른 보급선을 고려하지 않고 북상했다가 비싼 대가를 치룬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량해전이 벌어진 때는 음력 9월 16일-겨울이 머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들에게 보급이 끊겼던 1592년 겨울의 기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악몽이었고, 보급 문제의 곤욕을 치르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일본과 가까운 남해안 지역에 쌓은 왜성을 기점으로 펴는 농성전이었다. 보급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군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반면에 그 뒤 조명연합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남해안의 일본군을 압박하며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명량 해전의 군사학적 의의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군사의 숫적 우세는 중요한 전력계산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더구나 이 전투처럼 10배가 넘어가는 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사례가 흔하지 않고, 해전에서는 더욱 드물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기적과도 같은 전투'라고 하며,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장학근. 플래닛미디어. 2008)는 책에서 장학근 박사는 '대단히 승산이 희박한 전투를 끝냈다'(p. 204)면서 명량해전에 대해 '병법의 논리를 뛰어넘다'(p. 202)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사항이 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은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어 승리의 조건을 갖추고서 전쟁을 시작한다'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과학의 확률싸움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는 것은 그럴만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명제가 탄생한다.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세운 전략은 여기에 그대로 부합한다. 조선 수군은 비록 수적으로 열세였고 백병전에서 일본군보다 한 수 아래였지만, 정규 군대로 편성된 수군이라는 점과 판옥선이라는 우수한 선박, 그리고 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군의 약점을 만회할 수 있는 곳을 전장으로 택하고 조선군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여 최대한 조선군의 승률을 높인 뒤 전장에 나섰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읽혀지는 병서의 원리는 승리를 얻기 위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건을 갖출 것과, 승리를 위해 장수가 지켜야 할 태도를 논한다. 그리고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보여준 모습은 이에 철저히 부합한다. 다시 말하자면, 명량 해전은 명장(名將)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승리를 위한 전략을 구상하며, 이를 위해 전투에 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며, 이 모든 것이 전장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투인 것이다.
승리와 아픔의 기억, 명량대첩비
뒷날 전라우수영 옆에 명량대첩비가 세워져서 이 승리를 기념하게 된다. 국가에 재난이 있을 때 검은 눈물을 흘린다는 이 비석은 1685년 이민서(李敏敍. 1633~1688)가 글을 짓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글씨를 쓰고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제액전서를 쓴 뒤 전라우수사 박신주(朴新胄)에 의해 1688년에 전라우수영 성 동쪽에 세워졌다.

명량대첩비.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
그러나 명량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수난을 당하게 된다. 1942년 일본은 비각을 헐고 비석을 철거했다. 일본은 처음에 비석을 파괴하려 했으나 원인불명으로 인부가 사망하는 등 괴이한 일이 벌어지자 비석을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어버렸다. 그 뒤 광복 후 1947년 지방유지들의 노력으로 비석을 찾아내어 현재 서있는 장소에 다시 세웠고, 1950년 모금을 모아 현재의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10월 본래 있었던 우수영 자리에 옮겨 세워졌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과 영광을 함께한 승리의 기억인 것이다.
이 비문에 쓰인 헌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대신하겠다.
鳴梁口兮隘而束 명량(鳴梁)의 입구여 좁고도 단단하니
海潮蹙兮汨兩峽 조수가 밀려오면 양쪽의 땅이 잠길 듯하구나.
兵因地兮利出奇 지리를 잘 이용하여 기이한 계략을 내었으니
藐羣醜兮勢莫支 새까맣게 몰려들던 추한 무리들 버틸 수가 없었네.
士卒奮兮皷方震 사졸들이 분발하고 북소리 울리니
俄殱賊兮蕩餘燼 잠깐 사이에 적들을 섬멸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네.
惟將軍兮勇義俱 오직 장군만이 용기와 의협심 모두 갖추어
扼海道兮海無虞 바닷길 지켜내니 바다에 아무 근심 없었다네.
怒濤擊兮蛟鯨趍 성난 파도 부딪치어 마치 고래들이 달리는 듯
觀戰地兮想英謨 옛 싸움터 바라보며 가슴 속에 영웅을 그리네.
靈皇皇兮赫海隈 영혼은 아름답고도 성하게 바다 한 편에 빛나고 있으니
呵星辰兮走風雷 별들을 호령하고 바람과 천둥을 부리는 듯하도다.
海不竭兮石不泐 이 바닷물 마르지 않고 돌이 닳지 않듯이
昭壯烈兮耀無極 밝고도 씩씩한 기상 영원토록 빛나리.
명량대첩과 관련된 몇 가지 속설
명량대첩에는 몇 가지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조선군이 철쇄를 사용해 승리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강수월래의 기원이 이 때 멀리서 우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한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속설은 몇년 전의 모 사극에서도 명량대첩 부분에 나온바 있으며, 심지어 철쇄 사용설은 같은 방송국의 역사 다큐에서도 신빙성있는 거처럼 다뤄진 적도 있다.
흔히 명량대첩에 대하여 미리 설치한 철쇄에 일본 배들이 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선군이 맹공격을 하였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판옥선은 평저선이지만, 일본 배들을 침저선이라 조선 배는 철쇄에 안 걸리지만 일본 배는 걸린다 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오늘날의 해군은 기뢰부설함이 있고, 잠수함 같은 배로도 기뢰 부설이 가능하기에, 철쇄 같은 건 필요 없이 기뢰를 통하여 적 해군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변변한 기계 장치가 없는 조선시대라면 모든 걸 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좁은 수로라지만, 매우 강한 조류가 흐르는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길게 철쇄를 거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걸 걸더라도 배 몇 척 걸리고 나면 사람이 설치해놓은 것이 끊어지거나 풀리지는 않겠는가? 기계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해내려면 조선 수군에 화가 나면 녹색거인으로 변신하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나, 녹색 운석 앞에서는 힘이 약해지는 외계인이라도 있어야지 가능하다. 아니 그런 애들 있으면 철쇄 놓기 전에 그냥 적군을 다 쓸어버리면 되잖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실제로도 철쇄 가설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없다. <난중일기>나 <선조실록>, <징비록> 등 신빙성 높은 사료에는 철쇄 얘기도 나오지 않으며, 당시 급하게 진지를 이동한 조선 수군에게 철쇄를 만들고 설치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모든 게 부족한 조선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철쇄를 만들 철이 있으면 화포나 여타의 무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다.
철쇄 가설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이중환의 <택리지>나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기록한 <현무공실기> 등이 있다.
하지만 <택리지>는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닌 지리지로서 철쇄 얘기도 지방의 설화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 하다.
뛰어난 용력으로 김억추가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의 기록도 당연히 현실성 제로.
<현무공실기>는 여타의 행장류가 그러하듯이 조상을 터무니없이 칭송하는 기록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대도 아닌 후대의 기록이다. 게다가 <현무공실기>에는 김억추가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선 수백척을 격침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리고 그 정도 철쇄는 만들려면 많은 양의 철이 필요하다. 그러나 명량대첩 당시의 조선 수군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 그럴 철이 있으면 무기라도 더 만드는 게 낫다.
좌수영에서 발견된 수중장애물의 흔적을 근거로 철쇄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울돌목은 물살도 거세고 당시 조선 수군은 자원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 사이 그 지형에 철쇄를 설치할 여유는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는?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전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것이 유력한 학설인양 둔갑을 하고 있는데 그 실체를 알아보자.
이순신과 관련된 걸로 몇년전 방영한 모방송사의 드라마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명량대첩시 병력이 부족하자 이순신은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강강수월래를 추게 하여 아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것은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산봉우리에서 강강수월래를 했다는 것, 갯마을에서 했다는 것 등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설일 뿐이다. 우선 <난중일기>어디에도 강강수월래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게다가 명량 대첩 처럼 아군은 부족하고 적군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여자들을 병사로 위장시키는 작전은 매우 위험하다. 단병접전에 강한, 게다가 공성전이나 수성전에서는 패한 일도 많지만 야전에서는 대부분 이긴 일본군이 육지의 병사들을 본다면, 병력도 충분하니 후방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켜 도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변변한 훈련도 못 받은 여자들의 운명은 비참한 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눈이 다 시력 마이너스만 모여있었겠는가? 처음엔 단순히 빙빙 도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속는다고 치자.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순히 손 잡고 도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병력이 많으면 포구에 방치된 판옥선을 더 끌고 나오던가, 육지에서라도 화살과 포를 쏘며 공격하던가, 아니면 매복이라도 할 일이지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면 일본 장수들이 아무런 의심을 안 할 리가 있을까? 내 머리 속에서도 나오는 생각인데, 이순신이 이런 걸 생각 못할 리가 없으니 여자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 작전이었다면 <난중일기>나 <징비록>,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에 기록되던가, 당시 수군 장수들의 가문에서 쓴 <행장>에라도 ‘우리 조상이 강강수월래 제안 했습니다.’라는 조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석의 유래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구려나 부여, 백제 등 다른 고대국가들 역시 제천 행사들을 가졌는데, 이런 행사들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축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데 모두 손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춘다는 발상은 고대인들의 시각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마한에 대하여 ‘5 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祭)한다. 때를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 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며 손발을 맞추어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또 다시 춘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강강수월래의 원형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한이면 지금의 전라도 일대와 일치한다.
결국 강강수월래는 전라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다가 이 곳이 이순신의 주 활동무대와 겹치면서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퍼진 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백성들 사이에야 이런 속설이 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강강수월래에 관한 속설 소개라면 몰라도 진짜 유래인양 설명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공영방송국의 정통사극에 이런 속설이 그대로 반영되는 건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확고히 해줄 수 있으니 역시 문제이다.
결국 명량 대첩은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5,6백 척의 적을, 후방에 있는 수송선들을 제외하고라도 300척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하는 전투였다. 더불어 철쇄 같은 건 없고, 강강수월래를 출 일도 없다. 칠천량 해전의 여파로 사기는 바닥이다. 조정은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부하 장수들도 모두 겁을 먹은 지라 통제사 이순신이 믿을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역사가 아니라 어느 소설의 줄거리였다면, 그 소설을 리얼리티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소설이 아닌 역사였다. 누가 봐도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싸움, 그 앞에 이순신은 고독하게 맞서고 있었다. 하긴 그런 싸움에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이런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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