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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4 : 조선의 역사 206 (선조실록 71) 본문
한국의 역사 664 : 조선의 역사 206 (선조실록 71)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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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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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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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 전개 과정 및 결과
조선 수군이 벽파진으로 이동한 후에도 일본 함대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1597년 9월 7일에는 탐망군관 임중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그 뜻이 수군에 있는 것이라.”라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적선 13척이 있는 곳으로 출동하였는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응을 하지 않고 도망하였다. 먼 바다까지 추적하였지만, 역류를 거스를 수 없고, 복병도 우려되어 더는 좇지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이 야습을 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장수들을 모아 이에 대비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어길시 군법을 엄히 시행할 것이라 밝혔다.
과연 그 예상대로 일본 수군은 밤 중에 기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야습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에도 조선 수군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를 본 이순신은 다시 엄명을 내리면서 직접 배를 이끌고 지자포를 쏘면서 공격하니, 적선들은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하면서 공격을 하다가 새벽에 물러났다. 암나 적은 조선 수군을 유인해내려고 여러번 시도한 모양이었지만 이순신은 적의 의도를 알고 추격하지는 않았다.
이틀 후인 9월 9일. 이 날은 중양절이라 병사들에게 고기를 먹였는데, 그 날 저녁 적선 두 척이 조선 수군의 형세를 탐색하다가 영등포 만호 조계종의 추격을 받고 싣고 있던 물건까지 버려가며 달아났다. 이런 소규모 전투는 그야말로 대결전을 앞둔 전초전일 뿐이었다. 조선 수군은 전라우수사로 새로 임명된 김억추가 끌고온 판옥선 한 척을 합쳐도 고작 13척이 있을 뿐이었다.
9월 13일 이순신은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하지는 않지만, 임진년 승전할 때의 꿈과 대략 같은 꿈이었다고 <난중일기>에는 적고 있다.
9월 14일. 척후군관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적선 2백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으로 들어왔다.”라 하면서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데, 중걸이 이 달 초6일 달야의산[達夜依山]에서 왜적에게 붙잡혀서 묶여 가지고 왜선에 실렸던바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 된 김해 사람을 만나 왜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한밤중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그 김해 사람이 귀에다 대고 몰래 이야기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들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웠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더라.’ ”라는 보고를 덧붙였다. 이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아주 안 믿을 수도 없어서 전령선을 보내어 피난민들을 육지 위로 올라가도록 조치하였다.
9월 15일. 진을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 이유는 벽파정 뒤에는 명량이 있었는데, 소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진을 옮긴 이후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 라는 유명한 훈시를 남겼다. 그날 밤 꿈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이 역시 꿈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승전의 암시가 되는 꿈인 듯 하다.
1597년 9월 16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에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라고 하였다. 그 때의 조류는 북서류로 일본 수군이 전진하기에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보고를 접한 이순신은 즉시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이전의 해전들은 대부분 조선 수군이 공세적인 입장에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일본 수군의 대규모 공세에 의한 해전이었다. 조선 수군의 전력은 고작 13척의 판옥선뿐이었다. 뒤에 백여 척의 피난선과 어선 등이 있었지만, 전투에 크게 보탬이 될 수는 없었다..
일본 수군의 총대장은 옥포에서 이순신에게 패배한 도도 다카도라, 선봉장은 당항포에서 죽은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지마 미치후사, 그 뒤를 한산도에서 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안골포에서 패한 가토 요시이키가 따랐으니, 이순신에게 한 번 이상 패배한 무장들이 복수를 위해 모인 격이 되었다. 이런 수군 전투함대 뒤를 시마즈 요시히로 같이 충청도 서해안에 상륙할 예정이던 육군과 이미 충청도까지 북상한 일본 육군에게 보급할 식량과 탄약을 실은 수송함대가 따르고 있었다.
먼저 적선 133척이 해협을 지나 조선 수군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으로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러자 겁을 집어 먹은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좌선만을 남겨둔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차상급자인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무려 2마장이나 물러나서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사실상 이순신의 좌선 혼자서 수백 척의 배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순신의 좌선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의 화포를 쏘니 그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은 갑판 위에 총총히 서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대니, 적선들은 감히 좌선에 접근하지 못하고 후진과 전진을 거듭하기만 하였다. 수많은 적을 단 한척의 배로 막아내는 말도 안 될 듯한 일을 이순신의 좌선이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너무 많았다. 좌선에 탄 사람들도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좌선이 여러 겹으로 포위되어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자, 배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나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라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돌아보니 다른 배들은 여전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 군령을 집행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호각을 불어 중군에 군령을 내리는 기[中軍令下旗]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도록 했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좌선 근처로 다가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 보다 먼저 다가왔다. 이순신은 안위에게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라고 호통 치니, 이 말을 들은 안위는 자기 일신만의 안위가 아닌 백성들과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용감히 적진 속으로 돌진한다. 이런 장면을 일부만 보고 안위를 비겁하게 묘사하는 소설도 있지만, 엄연히 안위는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다음으로 적을 맞이하여 싸운 인물이고, 그래서 이후로도 이순신의 큰 신임을 받은 무장이 되었다.
안위에게 호통을 친 다음 이순신은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 너는 중군[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하라.”라고 말하니 김응함 역시 안위와 함께 용감히 전진한다.
적군의 입장에서는 상대할 적이 3배로 늘어난 셈이다. 한 척에서 세 척으로 늘어난 게 뭐 대단하냐 싶을 수 있지만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쩔쩔 매던 상황에서 두 척이 더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남은 배들도 더 가담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적장은 휘하 배 두 척을 보내 안위의 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니, 안위의 배는 곧 포위당하고 만다. 적군들이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배에서는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또 혹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였고, 격군 일여덟 명이 공포를 못 이기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를 본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쫓아 들어가서 마구 화포와 화살을 쏘았다. 적선 3척을 거의 제압하였을 무렵,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명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때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바다를 보다가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에 있던 적장 마다시라고 말하였는데, 이 마다시란 바로 적군의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였다. 이에 이순신이 김돌손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리니 준사는 마다시가 맞다고 좋아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 시체의 목을 베어다가 배 위에 효수하니, 형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형 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만 것이다. 같은 사람에 의해 형과 아우 모두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선봉장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판에 조류는 조선군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뀐다. 전투가 벌어진 진도 울돌목은 하루에도 몇 번씩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었으니, 이순신은 이 점을 염두에 두며 불리함 속에서도 유리한 전장을 선택한 것이리라. 이쯤 되면 일본 수군의 기세가 꺾이는 것이야 당연했다. 뒤에서 구경만 하던 조선 전선들도 하나 둘 씩 전투에 참가하여 적선을 격파한다. 승기를 탄 조선 수군은 적의 진격을 막는 정도를 넘어 아예 추격전까지 펼치니, 일본 수군은 감히 조선 수군에 대항하지를 못 하고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사상자는 좌선에서 순천 감목관 김탁과 영노 계생이 전사하고 박영남, 봉학 및 강진 현감 이극신 등 3명이 부상당하였고, 안위의 배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넉넉히 잡아 합쳐도 백명을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얼마나 참전하였으며,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일본 수군에서는 몇 척이나 참전하였는가? 이는 책에 따라서 엇갈리는데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133척(난중일기 초서본, 선조실록)
2. 333척(난중일기 전서본)
3. 5,6백척(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차이가 꽤 나는데 어느 게 옳을까? 보기에 따라서 "1번도 맞고 2번도 맞고 3번도 맞을 것이다.
먼저 133척이라고 나온 <난중일기>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9월 16일[갑오] 맑다. 이른 아침 망군이 와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鳴梁]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를 불러 약속을 밝힌 다음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후략)"
이 내용을 토대로 보자면, 전투 초반에 133척이 조선 수군을 포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이나 이후 부분이나 적선이 총 133척이라 단정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즉, 전투 초반 133척이 들어온 이후 추가로 전투선이 온 것을 생략하고 133척만 참전한 것 인양 보이게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일본 수군 무장들이 전사한 구루지마 외에도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상당한 동원능력을 가진 자들인 것을 볼 때, 전투선이 133척보다 더 많이 동원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 왜 실록에는 133척이라 기록되었는가? <선조실록>에서도 <난중일기>처럼 적선의 총 숫자를 확정한 게 아니라 ‘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라고 하여, 역시 전투 초반의 진입한 선박만 130여척인지, 전투에 참가한 총 선박이 130여척인지가 애매하다. 이는 이순신이 축소보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임금에게 밉보여 죽을 고비를 넘긴 이순신이기에 자신의 공이 크다고 강조하면 또 다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전공을 축소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결국 다른 상황도 함께 고려하여 볼 때, 133척은 전투 초반에 해협에 진입한 숫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순신은 선조의 경계심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 장계는 물론, 나중에 타인이 볼 수도 있는 일기에까지 전과를 축소 기록했을 가능성도 높고, 전서본 <난중일기>는 이를 바로잡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5,6백척이라는 기록은? 이렇게 적은 <재조번방지>나 <연려실기술>은 전투를 바라보던 백성의 입장에서 적고 있다. 인근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시야에는 안 들어온 배까지 볼 수 있어 더 많은 배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명량대첩에 참전한 일본 배들의 숫자는 초반에 진입한 함대 133척에 총 전투선박 330여척, 해협에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인근까지 온 비전투선박을 포함 시에는 5,6백 척에 달하는 숫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일본의 피해는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일본 수군의 피해는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 기록된 공식 전과 역시 적선 31척 격침에 수급을 8개를 취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격침을 확인한 적선의 수이고,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것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라고 적고 있으며, <연려실기술>에서도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10여 척만이 도망갔다는 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일본군의 피해가 컸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일본군의 피해상황은 일본군에 사로잡혔던 조선인 포로의 증언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선조실록>에는 정유년에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하였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에 전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해전과 남원성 전투에도 참가하였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대첩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며. 산도의 배가 120척이라고 해도 이것이 전투선과 비전투선 모두 합친 수치일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실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명량대첩에서 죽지 않았고, 일본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였으며 120척의 선단을 이끌었다고 전풍상이 증언하는 걸 보면 산도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나 그 휘하 장수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즉, 구루지마 이외의 영주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일본의 실제 피해는 31척을 넘어가는 것이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해전과 명량대첩을 모두 본 조선인 포로의 증언이 나온다. 여기서 그 포로는 “..(전략) 급기야 여러 왜장이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전라도우수영(全羅道右水營)에 당도하였는데, 이순신이 과선(戈船) 십여 척을 이끌고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장 내도수(來島守)가 패전하여 죽고, 민부대부(民部大夫)는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나머지 작은 장수도 죽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강항은 정유년어 쳐들어 온 적장들의 명단에서도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죽은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일본군의 피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 휘하 병력 이외에도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일본군 피해 31척이라는 건 의도적인 축소 보고이거나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만 31척이라는 의미이지, 전체 피해는 그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완침은 면했다 하더라도 일본 선박들은 승선 인원이 대거 몰살당하여 전투력은 상실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명량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단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명량 대첩에서 일본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명량 대첩은 이순신도 천운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이루었기에 더 값진 승리였다. 이런 엄청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싸우던 곳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풍랑이 심하고 탄약 소모량도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북쪽 당사도로 진을 이동한다. 다음날에는 어외도로 진을 옮기는데, 3백 척의 피난선들이 먼저 와서 수군을 환영하였으며, 나주 진사 임선 등이 찾아와서 승리를 치하하고 군사들에게 먹일 양식을 주었다. 명량 대첩의 모습이 백성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각인된 것이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북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서해로 진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본이 얻은 것이 있다면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강항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 정도. 그것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얘기지, 전쟁에 있어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 수군은 끝내 전라도 해안을 벗어날 수는 없었고, 따라서 금강을 통해 충청도의 육군에게 보급도 해줄 수 없었다. 더 이상 바다로부터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일본 육군에게 서서히 겨울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임진년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충청도까지 올라간 일본군은 다시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 머문다. 명량대첩은 단순히 소수로 다수의 적을 물리친 게 아니라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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