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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62 : 조선의 역사 204 (선조실록 69) 본문
한국의 역사 662 : 조선의 역사 204 (선조실록 69)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임진왜란 전투목록
아래 임진왜란 전투 목록은 임진왜란 중 있었던 전투 목록이다. 시간 순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두 음력으로 날짜순대로 표시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592년
- 다대포 전투 : 4월 13일 ~ 4월 15일
- 부산진 전투 : 4월 14일
- 동래성 전투 : 4월 15일
- 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 : 4월 17일~4월 28일
- 상주 전투 : 4월 25일
- 충주 탄금대 전투 : 4월 28일
- 한강 전투 : 5월 2일
- 옥포 해전 : 5월 7일
- 합포 해전 : 5월 7일
- 적진포 해전 : 5월 8일
- 해유령 전투 : 5월 16일
- 임진강 전투 : 5월 18일
- 기강 전투 : 5월 18일
- 사천 해전 : 5월 29일
- 당포 해전 : 6월 2일
- 당항포 해전 : 6월 5일
- 용인 전투 : 6월 5일
- 무계 전투 : 6월 6일
- 율포 해전 : 6월 6일
- 정암진 전투 : 6월 8일
- 여주 전투 : 6월 10일
- 제1차 평양 전투 : 6월 15일
- 웅치 전투 : 7월 7일
- 이치 전투 :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7월 8일
- 제1차 금산 전투 : 7월 9일
- 안골포 해전 : 7월 10일
- 우척현 전투 : 7월 10일
- 제2차 평양 전투 : 7월 17일
- 영천성 전투 : 7월 24일~7월 27일
- 지례 전투 : 7월 29일
- 제3차 평양 전투 : 8월 1일
- 청주 전투 : 8월 1일
- 제1차 경주 전투: 8월 2일
- 제2차 금산 전투 : 8월 18일
- 영원산성 전투 : 8월 25일
- 장림포 해전 : 8월 29일
- 화준구미 해전 :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9월 1일
- 서평도 해전 :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9월 1일
- 연안 전투 : 9월 2일
- 제2차 경주 전투 : 9월 8일
- 북관대첩 : 1592년 9월 16일~1593년 1월 28일
- 창원 전투 : 9월 27일
- 제1차 진주성 전투 : 10월 10일
- 독성산성 전투 : 12월 11일
1593년
- 제4차 평양 전투 : 1월 9일
- 성주 전투 : 1월 15일
- 벽제관 전투 : 1월 27일
- 웅포 해전 : 2월 10일~3월 6일
- 행주 대첩 : 2월 12일
- 제2차 진주성 전투 : 6월 29일
1594년
- 제2차 당항포 해전 : 3월 4일
- 영등포 해전 : 10월 1일
- 장문포 해전 : 10월 4일
1597년
- 칠천량 해전 : 7월 16일
- 고령 전투 : 8월 15일
- 남원 전투 : 8월 16일
- 황석산성 전투 : 8월 16일
- 어란포 해전 : 8월 27일
- 직산 전투 :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9월 7일
- 명량 해전 : 9월 16일
- 제1차 울산성 전투 : 12월 24일
1598년
- 절이도 해전 : 7월 19일
- 제2차 울산성 전투 : 9월 21일
- 사천성 전투 : 9월 28일
- 순천성 전투 : 9월 20일~10월 7일
- 노량 해전 :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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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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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6월 16일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2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 구루지마 미치유키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 카메이 코레노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
||
1592년 (음력 6월 6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
1592년 8월 14일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아키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 명량대첩도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 ||
1593년 3월 6일 (음력 2월 10일) |
웅포 해전 | 경남 진해시 웅천동 | 이순신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어영담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
1597년 8월 28일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 ||
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 ||
1597년 10월 25일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 이순신 | ||
1598년 10월 19일 - 11월 6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 진린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오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
이순신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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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포 해전
어란포 해전(1597년 음력 8월 27일)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 번째 전투였다. 어란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지명이다.
어란포 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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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이순신 | 구루시마 미치후사 | ||
병력 | |||
전선 13척 | 전선 8척 |
1597년 음력 7월 15일 칠천량 해전 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어란포 해전 후 본진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겼다.
벽파진 해전
벽파진 해전(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벽파진 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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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이순신 | 구루시마 미치후사 | ||
병력 | |||
전선 13척 | 전선 13척 |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항왜
항왜(降倭)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이르는 말이다. 전쟁 당시 조선군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았다. 개중에 일부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군은 전쟁 초반에는 포로들을 그냥 살해했으나 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항왜 유치에 나섰다. 이와 반대로 조선인이면서 일본에 투항하거나 협력한 자는 친일파의 개념으로 순왜(順倭)라 불렀다.
늘어나는 항왜
1593년 이후부터 투항하는 일본군이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항왜를 살해했다. 1594년부터는 조선 조정이 항왜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왜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탈영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영에 목책을 설치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을 해왔다고 한다.[1]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항왜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항왜의 성명
일본의 성씨들은 그들 나름의 기원과 이유로 창성되고, 또한 계급 투쟁 과정에서 조상의 관직이나 자신의 신분에 따라 변성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성씨가 한국의 성씨가 중첩된다고 하여도 근원은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 여여문(呂汝文), 김충선, 김성인, 요질기(要叱其), 염지(念之), 사고여무(沙古汝武), 첨지(僉知), 평구로(平仇老), 산여문(山如文), 노고여문, 기오질기, 오카모도 에치고(岡本越後), 마고토키로(孫時老), 노부토키로(延時老)등이 등장한다.
여여문(呂汝文)의 경우 본래 여가 아닌 요요문(要汝文)으로 여씨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시마즈 요시히로을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는데, 일본식 발음의 성명을 한국 음역으로 풀어서 한자로 적은 놓은 한국식 표기법이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실제 한자 성명은 도진의홍(島津義弘)으로 심씨가 아니지만, 한국식 표기법에 의하여 한국에서는 심(沈)씨가 될 수 있다. 마고토키로(孫時老)의 손시로 표기, 노부토키로(延時老)는 연시로 표기도 이와 비슷한 경우도 이해 된다. 또는 일본인들의 관직을 바뀔 때 조상들의 관직이나 이름에서 성을 따서 마고, 노부 같은 성을 취하기도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음역이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되는데, 한국 가씨와는 한자가 다른 성씨이다. 또한 가토(加藤)라는 성은 고구려 유민들이 산다는 코마 지역에서 나온 성으로, 코마 같은 성에서 변성한 성이라고 한다. 오카모도 에치고(岡本越後)는 강본활후로 음역되는데 한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강씨이다.
사고여무(沙古汝武)는 4글자 성명이므로 가등청정과 마찬가지로 복성이다. 일본인들은 단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타성으로 개성하게 하는데, 단성은 사용하지 않는다. 예을 들면 금성무는 단성으로 보이지만 복성이다. 따라서 사야가, 사여모 또한 사고여무와 마찬가지로 복성이다. 유사한 성씨가 백제 토착 세력이었던 사택(砂宅), 사택(沙宅), 사타(沙吒), 사문(沙門)씨가 있었다.
전(田)은 순왜의 성씨이다. 일본에는 전(田)자가 들어가는 복성이 많아 있는데, 그들이 다른 국가로 이주할 때 복성을 앞자을 사용하여 일본인이라는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에는 차별을 받기 때문에, 복성의 뒷자을 선택한다. 일본에는 일본 사무라이가 창성한 복성 전중(田中)씨가 있으며, 여러 복성 가운데 뒷자에 전자가 들어가는 성씨가 많이 있다. 따라서 일본 출신의 전(田)씨는 순왜보다는 항왜 성씨이다. 국(鞠)씨는 경우 일본 복성 기쿠치(鞠智)와 같다. 따라서 순왜 국(鞠)씨는 그들의 행테로 보았을 때 본래 일본인 출신일 가능성도 높은 순왜이다. 또한 국씨는 토착 백제계 성씨에 존재한다. 한자가 다르지만, 백제 유민들이 유사한 성으로 변성한 사례가 있다. 예을 들면 백제 토착 상(象)씨는 상(尙)씨로 고치면서 사라졌다. 일본의 복성이 한국에 들어오면 복성을 단성으로 줄여 전(田), 국(鞠)씨로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문욱, 손문욱은 이름이 두가지 이므로 본래 한국인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본 출신이라면 항왜에 속한다.
이몽학의 난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뒤 정유재란 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농민들은 임진왜란 등으로 몹시 가난해져 있었다. 이때 본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96년(선조 29) 한현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 부여) 무량사에서 이몽학과 만나 역모를 모의하고 도천사(道泉寺)의 승려들과 인근 가난한 농민 6~7백 명을 규합했다.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김경창, 임억명, 이구, 장준재, 사노, 김팽종, 승려 능운을 거느리고 자신이 선봉장이 되었다.
반란 초기
수년을 끈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때이므로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반도들의 선동이 크게 호응을 얻었다.
1596년 음력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을 홍산동헌에서 생포하였다. 임천군으로 쳐들어가서는 군수 박진국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을 함락시켰다. 정산현감 정천경은 도주했다. 8일에 청양을, 9일에 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민들까지 합세해 반란군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이몽학군은 10일에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홍가신은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마침 고을에 체재중인 무장 임득의(林得義)는 가솔과 의병 800명을 이끌고 포위된 성안으로 들어와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을 불러 들이도록하여 함께 수성 계책을 세우고, 인근의 순찰사 신경행,수사 최호, 박동선, 황응선 등이 와서 홍주성에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퇴치하고 위기에 처한 홍주성을 구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끄는 토벌군이 여러번 패퇴하자 권율장군을 진압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호남의 군사를 이끌고 여산을 거쳐 이산까지 진군하였으나 반란군의 형세가 워낙 흉흉하여 충용장군 김덕령에게 급히 지원군을 이끌고 진압군에 합류토록 연락하고 심지어 영남에 연락하여 포로로 잡은 왜군까지 원군으로 보내도록 연락하고 더이상 진격을 하지못한다(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열려실기술,국조보감)
반란 진압
그 사이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장군 이간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판관아병 윤계가 총포를 쏘면 이몽학군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또한 홍주에 살던 무장 임득의, 박명현, 전 병사 신경행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다. 남포현감 박동선도 충청수사 최호와 상의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의병장들의 누명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잡혀갔다.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므로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을 할 때에 이들의 죄를 물었다. 그 뒤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 과정에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
선조의 정권에 끼친 영향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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