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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시대의 흐름

우면산의 봄 10 : 수양의 계유정난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우면산의 봄 10 : 수양의 계유정난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날씨는 완연한 봄날씨가 되었다. 지난 주말에는 비가 내리는 바람에 이틀간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싸구려 자전거를 2년 전에 사서 거의 매일 2시간 정도 자전거를 탔으니 고장도 여러번 났고 뒷바퀴 기아, 체인도 갈고 바퀴도 갈았다. 펑크도 여러 번 났고 정비도 여러번 했다. 2년 동안 거의 자전거 가격 비슷하게 돈이 들어간 것 같다. 이제 중간 기아가 닭아 체인이 넘어가곤 하여 일단 정비는 하여 타고 있지만 새로 자전거를 사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인터넷도 둘러보고 자전거 수리점 아저씨 권유도 듣고 고민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고속터미널 근방에 있는 자전거 정비소 아저씨를 만나 상담을 한 결과 새로 자전거를 한 대 사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인터넷에서 눈여겨 본 '하운드' 한 대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길레 어저씨께 물었더니 취급하지 않는다 했다. 아저씨 말에 의하면 그 자전거는 인터넷에서 팔고 있는 중국산으로 대부분 중국산 재료로 재질이 약하여 타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아저씨는 알톰 27만원, 30만원짜리를 권했다. 고민하고 있다.

 

총선이 끝나고 여야는 대선을 향한 전초전이 서서히 전개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고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나름대로 갖가지 묘안을 생가하고 있을 것이다. 김문수가 출마를 선언했고 안철수를 영입하게나 지원자로 확보하기 위해 모두가 열을 올리고 있다.

 

광우병 소동으로 미국산 쇠고기가 또 도마위에 올랐다. 정부의 미온적이고 안이한 대책에 대해 촟불이 다시 타오를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나  규정과 협의 내용을 들먹이며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가 과연 국민을 위한 정부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파인시티' 등 인허가 비리가 현정부의 권력형 비리로 확산되고 잇다.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은 검찰의 압수수색 하루전 대구 사무소를 깨끗이 청소했다고 한다. 짜고치는 고스톱  판이 현 정국이다. 그에 대해 10억 수수설의 진술이 확보되었고 핵심고리로 추정하고 있다. 최시중, 이상덕씨에 대한 비리 의혹과 검찰 조사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아마 시간을 끌다가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 주변 측근들의 비리가 온톤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권력의 부도덕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정치권은 레임덕이 계속되는 가운데 기강이 무너지고 있고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갖가지 비리가 대담하게 저질러 지고 있을 것이고 낙하산 인사들은 마지막 남은 기간 더욱 챙기기 위해 안감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계유정난

 

세조실록, 성종실록, 연산군 일기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선거풍토를 보면서 수양의 계유정난이 후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느낀점을 피력해 보았다.

 

 

수양의 계유정난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최근 '인수대비'라는 드라마가 케이블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어 관심깊게 시청하고 있다. 마침 성종 대 역사실록을 블로그에 올리는 중이었기에 실록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내용을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나름대로 가치있는 드라마로 생각되고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권력을 잡은 다음 안평과 금성대군, 사육신 등 수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린 조카 단종도 교살하였다. 세조 대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공포정치가 지속되었으며 측근정치로 정난 공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소위 말하여 세조는 '대의'를 위해서 그리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 계유정난을 도모하여 성공하여 권력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그를 반대하던 수많은 충신 열사를 죽이고 또 정통성을  가진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귀양을 보내 죽여야 했던 당시 세조의 참담한 심정를 누가 알겠느냐마는 그의 왕권 회복 그늘에서는 한명회, 신숙주를 위시하여 소위 정난공신들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책길의 개나리와 벗꽃

 

그래서 정난 성공 후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누리면서 세종, 태종대의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던 문화통치와 부국강병책을 중단내지 퇴보시킴으로써 조선의 역사 발전 원동력은 갑자기 멈춰지고 후퇴하는 변곡점이 되었으며, 유교의 통치이념을 추구하던 조선 사회에 부도덕과 비윤리가 힘에 의해서 정의로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을 띤 허울과 가식의 이념과 사상을 당연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시대는 이러한 세조 시대의 상처를 어느정도 치유하는 업적을 남기기는 하였으나 뿌리깊은 망국의 암초는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정희왕후의 7년 수렴청정에 이어 인수대비의 철저한 궁중 장악은 성종의 언행에 많은 제약을 가져다 주었고 후궁들과 인수대비의 성화에 결국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함으로써 다음 왕인 연산군 대에 피비린내나는 사화를 초래하게 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성종은 죽음을 앞두고 앞으로 백년간 폐비 윤씨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이미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이미 학문에 뜻이 없었고 언행이 방자하고 무절제하여 성종의 노여움을 받기도 했으나 성종은 인수대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융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다가 성종이 죽자 정비를 통해 낳은 아들은 어린 진성대군이 있었으나 이미 세자로 책봉된 연산군 융이 19세의 나이로 다음 왕위는 자연적으로 폐비 윤씨의 아들 융이 이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의 패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정도로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의 일념에 가득찬 상태에서 무오사회와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이 싫어하던 사림 세력과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신하는 물론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는 대부분 유배 내지는 죽임을 당하였다.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성종의 후궁 두 여인은 연산군이 직접 몽둥이로 매질을 하여 즉사시켰다 하나 사실은 알 수가 없다. 또 그녀들의 아들은 모두 유배보내 사사시켰다. 또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혼절한 인수대비가 며칠 후 사망하는 패륜도 저질렀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종종반정의 공신들 손에 의해 작성된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좀 왜곡되고 과장된 면이 많다.

 

 

                                                                                         청계천 전경, 서울 시민들의 평화로움이다.

 

 

이러한 패악을 보다못한 박원종 등 신하들이 결국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등극하였으나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권은 신권에 의해 허수아비 같은 역활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조 이후 왕권과 신권을 둘러싼 왕족들과 신하들의 줄기찬 왕위 찬탈 음모와 신하들의 반정과 사화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허약한 왕권을 우롱하며 신권우위 조정은 권신들 끼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 당을 위한 정치, 권력쟁취를 위한 정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탐욕에 빠져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 없이 토탄에 빠진 백성들이 반란과 역모를 포함한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백성들은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대부분 유랑민이 되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조선은 시간의 갈수록 무능과 부패가 더욱 심해져 마지막 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을 산책하는 시민들, 태양이 반사되는 물빛이 아름답다

 

다음 허약한 인종, 명종, 선조를 잇는 동안 조선은 피폐해졌고 당쟁은 심화되었으며 국가의 안위보다 당론이 앞서는 파당싸움에 세월을 보내다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조선군은 부산포와 동래에서 분전하였으나 패전하였고 계속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조선군은 물론 관료, 백성들이 도망치기에 바빴고 조정에서 파견한 이일이 일본군을 맞아 상주 개천가에서 패잔병을 모아 훈련하다가 일본군 기습에 도망쳤고, 조선군의 최정예라는 신립의 7천 기마대가 충주 탄금대 진흙탕 벌판에서 일본군을 맞아 수차례 무모한 정면 돌격전을 감행하였지만 왜군의 대기병 장애물 함정에 빠져 결국 패전하여 조선군 최정예 부대라는 7천 기마대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는 탄금대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조선군은 어디에서도 일본군을 감당할 수도 없었지만 이순신이라는 한 장수에 의해 해전에서 23전 23승의 전승 기록을 세우면서 왜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기울어져가던 조선을 구명하였다.

 

신립의 패전 소식에 공황상태에 빠진 조정과 무능한 왕 선조는 비내리는 밤 백성들의 돌팔매질 속에 북으로 피난을 떠났다. 백성들의 분노로 궁궐은 붉게 불타고 있었고 수많은 귀중한 장서와 실록, 문화재가 연기속으로 사라졌다. 임진강에 도착하여 정자를 태우면서 불을 밝히고 찬 주먹밥을 먹으면서 강을 건넜다. 한강을 방어하라고 보낸 장수들은 패잔병을 모아 방어선을 폈으나 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장수들이 먼저 대부분 도망쳤고 왜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한강을 건너 한성을 점령하였고 미친듯이 방화.겁탈 등 노략질을 했댔다.

 

                                                 우리들의 이런 평화로움과 행복은 한순간 잿더미로 변할 수 있다.

 

 

의주로 도망치던 선조는 왜군이 계속 북진하자 만주로 망명하려고 하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이순신의 승전보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고 목숨 부지하기에 연연하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은 조선의 진심을 의심하여 주저하였다.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아니라면 조선이 그렇게 빨리 왜군에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심끝에 결국 지원 결정을 내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출정하여 일본군을 맞아 평양을 탈환하고 남으로 진출하다가 백제에서 왜군의 기습으로 선봉이 패전하자 주춤하였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군량미 부족과 병참선이 길어진 왜군이 남으로 철수하여 경상.전라 일대에 잔류하면서 조명 연합군 및 의병 등과 지리한 공방전을 전개하였고 휴전회담이 진행되기를 7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남도 백성들은 집을 잃고 방화와 살륙을 당하며 왜눔들의 노예가 되었으며 부녀자들은 성노리개가 되었다. 군량미 트집을 잡거나 조선군 장수를 구타하거나 매질을 하는 등 명군들의 황포도 만만치 않았고 조정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였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승전하던 이순신과 의병대장들이 조정 중신들의 모함을 받아 줄줄이 투옥되거나 백의종군하였고 울산, 진주대첩 등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풍신수길이 죽자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철수하는 왜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벌인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장렬하고 명에롭게 전사하면서 그제서야 겨우 임진난이 종료되었다.

 

전후 선조는 50줄 나이가 넘어서 10대의 새 왕비를 맞아 불행의 씨앗인 영창대군을 낳고 죽었다. 어린 인목대비는 고심끝에 세자인 광해군을 다음 왕위를 잇는데 동의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후 즉위한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를 맞아 펼친 중립외교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내부적으로 거센 신하들의 성화에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어린 영창대군의 살해로 이어지는 실정, 그로인한 인조반정을 거쳐 광해군이 폐위되고 왕으로 옹립된 무능한 인조는 청나라와 지리한 외교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맞아 조선군은 지리멸렬되어 청나라 침공을 막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40일간 항쟁하다가 결국은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망할때까지 청의 지배하에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서울 종로거리 전경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조정과 지방은 사림 세력과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이 극심하였고,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강력한 외척들의 등장하여 유약한 왕만 골라 옹립함으로써 왕권은 사라지고 신권만이 조정을 움직이는 상태가 되자 매관매직 등으로 인한  조정과 지방 탐관들의 비리와 수탈은 극에 달하였으며 백성들은 토탄에 빠지는 등 조선은 망국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 36년 식민지배를 통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나라가 운좋게 미국에 의해 독립하게 되었지만 강대국들에 의해 태어난 남북의 두 정권은 모두 정통성이 불분명한 정권들이다. 정통성 시비는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어 왔으나 힘의 지배에 따라 그 정통성은 시대에 따라 변질되었고 그래서 실제 정권의 정통성 문제는 논할 가치조차 없는 듯하다.

 

힘 있는 눔이 정권을 잡으면 정통성이 실록에 부풀려져 강조되었고 당연시 하는 풍조가 바로 태조 이성계의 쿠테타에 의한 고려 멸망에 이어 세조의 계유정난이 조선 사회를 변질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이 유교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받들면서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 하고 부도덕과 비윤리를 배척하는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부도덕한 정권인 조선은 겉으로는 유교를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비도덕과 비윤리가 판을 치는 표리부동한 이중적인 성격의 신뢰성을 상실한 정권이 되고 말았다.

 

 

                                                                       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종로 3가역에서 한 컷......

 

 

결국 조선초 정도전이 주창하던 신권우위의 통치이념은 결국 신하들이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그들끼리 권력을 독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단순한 논리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 태조의 쿠테타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 조선을 창업한 이래 정도전의 신권우위론에 왕권의 실추를 우려한 태종이 피비린내나는 형제간의 살륙전을 전개하여 태조에 이어 왕위를 이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한 덕분에 세종의 빛나는 문화창달이 가능하였으나 세종 사후 허약한 문종이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후원자가 없는 상태에서 어린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자 유명을 받은 김종서 등 신하들의 권력독식을 우려한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그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수양도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신하들에 의해 실추되는 것을 우려하여 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삼촌이 어린 조카를 보좌하여 나라의 융성을 기한 적이 여러번 있었고, 고구려에서는 신하들이 폭군을 몰아내고 머슴살이하던 왕족을 옹립하여 고구려를 강성한 나라로 만든이가 바로 모본왕이다. 

 

세조의 계유정난 성공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그의 치세동안 공포정치와 측근정치로 왕권이 강화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진 조선은 성종대에 사림을 등용하는 등 잠시 문치와 문화창달을 구가하면서 태평성대를 누렸으나 연산군의 폭정과 무오, 갑자 등 두 번의 사화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이후 중종반정에 성공한 훈척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왕권을 농단하며 왕을 무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권신들에 의해 비리와 부패의 골은 깊어지고 탐관들의 수탈로 백성들은 대부분 유랑민이 되어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조대에 임진왜란, 인조대에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외침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전국토가 유린되었고 백성들은 어죽이 되고 말았으니 그 당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뿐이다.

 

 

                                                                                         종로 거리 점포 전경, 호박씨와 고추 묘종을 샀다.

 

 

그것은 바로 통치이념은 유교였으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혈육도 명분도 도덕성도 윤리도 져버린 계유정난이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유정난은 조선의 통치이념을 뒤집은 행위였으며 시조 이후로 공신들인 훈구대신들이 자손 대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세도를 누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급급하였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시기에는 세종과 같이 유능한 군주인 경우에는 문화창달과 태평성대를 동시에 누리던 시기였으나 문종, 예종처럼 단명한 군주이거나 어리고 힘없는 군주일 경우와 연산군처럼 폭군의 경우 다른 유능한 왕족이나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게 된다. 문제는 세조는 또다른 반역의 불안감과 도덕적인 비난에 철저한 공포정치와 측근정치로 어느 정도 남길만한 치세를 마감하였으나 반정의 성공으로 즉위한 중종이나 인조같은 경우에는 무능하고 유약한 군왕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선조같이 신하들이 골라서 웅립한 군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조 이후 조선은 유약하고 무능한 군왕을 세우고 신하들끼리 서로 파당을 만들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당파싸움질에 서로 죽이고 죽는 사화가 빈발하였고 국가의 안위보다 당론이 우선시되는 나라가되고 말았다.  

 

이러한 권력지향적이고 파당중심적인 정당 정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만들게 된 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며 이에 시비를 건 사람들이 바로 유교를 중시하는 사림파들로 김종직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화로 전멸당하자 그 후계들이 권력층에 진입하였지만 누구도 더이상 계유정난과 세조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선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는 자가 정통성이고 정의라는 이념과 사고가 팽배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래서 권력에 대한 깊은 향수를 갖게 되었고 천거와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관직에 오른 것이 출세의 최첨단 지름길로 인식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출세는 바로 부를 가져다 주었고 겉으로는 도덕군자인척 하면서 뒤로는 갖가지 축첩과 비리와 부패를 저지르며 탐욕을 불태우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종로 거리 공원, 노인들의 휴식처

 

 

오늘날 우리 사회가 자유당 정권을 포함 제10대 공화국을 거쳐오면서 4.19 혁명, 5.16 군사 혁명, 6.29 민주화 혁명이 진행되어 자유당 부패, 유신정권 청산, 군사독재 청산, 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정치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권은 6공까지 우가 세력을 주도하였으나 문민정부 이후 권력권에 진입하여 성장한 좌파가 우파와 극렬히 대립하면서 갈등을 조장하고 있고 몇 번의 정권 교체로 권력의 단 맛을 본 양측이 국익보다 당론을 앞세워 정치 투쟁을 일삼으면서 진정한 정당정치가 아닌 파당을 이루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쟁탈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진보는 말뿐이요 종북.친북 세력이 진보의 가면을 쓰고 정치권 전면에 나와서 노골적인 친북 성향의 언행을 서슴치 않고 있는 실정이다.

 

                                         

                                                                                 5.16 군사혁명

 

 

최근의 천안함 침몰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탈북자 북송 문제 등에 그들의 행태를 보면 북을 두둔하고 남측 정부에 대한 비난을 강도를 극렬히 전개하고 있으며 북한 내부와 탈북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다. 이들이 진정한 진보가 될 수 없는 것이 이러한 종북, 친북 일변도의 언행과 정치 활동이 한국 정치사에 오랫동안 이어온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국익이나 나라의 안위보다 기존 정권을 무느뜨리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선의 계유정난에서 비롯된 비윤리, 비도덕적인 성향의 정치 이념이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3호선 청담대교를 지나며...... 타임머신을 타고 현실로 돌아오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로 서로 정권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선거에 이기려면 돈이 천문학적으로 소요되고 그러한 경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측은 선거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득표를 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 소요되는 경비는 후보등록비를 포함하여 인력지원, 사무실 운영, 각종 홍보 비용 등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 기업 등으로부터 각종 정치 후원금을 지원받고 그 돈으로 선거를 치루어 당선이 되면 그 정당과 정치인은 후원금을 지원한 그들의 입장을 도외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에 이기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가성 뒷거래와 뇌물 등으로 비리와 부패는 확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양은 힘으로 정난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선거라는 방법을 통해 권력을 잡는 것이 유일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울좋은 민주주의가 이 땅에 꽃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우리는 아직 정신적으로나 사회 인식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제도적으로 부적절한 부분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선거는 돈 안쓰는 선거로 만들고 국회의원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원도 주민 소환제를 실시하여 능력이 없거나 비리, 자질이 부족한 인물은 국회에서 퇴출시키는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또 전과자나 정상적인 군역을 필하지 못한 사람은 각종 정치권 후보자로 등록도 제한하고 고위직 진출에도 감정제도를 만들어 제한시켜야 한다. 또 국가 위기시에는 의무적으로 평소 대접받고 혜택받으며 살아 왔던 가진자, 정치인, 권력층 등 등록된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서 최전선으로 달려가는 제도와 풍토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 각 분야에 만연해져 있는 각종 부조리와 비리와 부패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이대로 간다면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비리와 부패가 더욱 확산될 것이며 이러한 비리와 부패의 나쁜 관습을 제거하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정은 사라지고 깨끗한 정치는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