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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7 : 조선의 역사 79 (성종실록 7)

두바퀴인생 2012. 3. 27. 07:40

 

 

 

한국의 역사 537 : 조선의 역사 79 (성종실록 7)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5.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앙 정계에 사림 세력이 진출한 일이다. 고려 말의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덕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사회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1431~1492년)이었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었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장원급제하여 1462년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내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성종은 도학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을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함께 힘을 합해 훈구,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1483년에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이어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조의 부도덕함을 질책하고 세조 대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훈구 세력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세조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상소에 그치지 않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조의제문>을 남기게 된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위한 것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을 비유하여 제자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김종직이 남이를 죽게 한 유자광을 멸시하였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거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 때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후일 이극돈과 손을 잡고 무오사회를 도모하게 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훈구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상소들은 그의 도학적인 식견과 절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도리와 덕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성종 역시 김종직의 견해에 동의하여 스스로 도학자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하려 했다.

 

그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글을 익힌 김종직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사학에도 두루 능통해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빋은 제자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 보여지듯이 그가 화려한 문장이나 시문을 추구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절의를 비탕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려는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찿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제자들은 절의와 의리를 내세우며 이를 저버린 척신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청구풍아>, <점필재집>, <당후일기>, <이존론>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밖의 많은 저술들은 무오사화 때 훈구 세력에 의해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