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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6 : 조선의 역사 78 (성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536 : 조선의 역사 78 (성종실록 6)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4. 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 균형
성종시대의 정치 세력은 훈구 세력과 근왕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훈구 세력은 세조시대의 공신을 주축으로 형성되었으며, 근왕 세력은 이른바 도학정치를 내세운 사림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다. 성종은 이들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중심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의 등용이 법적으로 금지되자 성종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훈신 세력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종이 정희왕후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았던 1476년 당시, 세조의 오른팔격인 신숙주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한명회 역시 연로한 탓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 대신에 유자광 등 '남이의 옥사'와 관련된 공신들과 인수대비의 친동생 한치인을 주축으로 한 척신 세력이 조정의 중역으로 부상해 있었지만, 그들은 세력권이 달라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성종은 이러한 역학 구조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비축한 다음 그들 훈구 세력들을 견제할 사림 세력들을 빠른 속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사림의 거두는 김종직이었다. 그는 밀양 출신으로 고려 말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영남 성리학파 거두였다. 성종이 성년이 되어 비로소 편전을 넘겨받았을 때 김종직은 자신의 고향 선산의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성종은 그의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고, 그의 문하생들이 학풍을 드날리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던터였다. 그래서 성종은 그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자 그를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의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하여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소인배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했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홀로 잘난 체하는 야심배들이라고 지탄하면서 그들을 배격했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달랐기 때문에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이맹전, 남효온, 조위, 이종순 등 당대 내노라 하는 문장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종직을 중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중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사림파 중용책으로 인해 조정은 14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해졌다.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파의 일차적인 비판 대상은 유자광,이극돈 등의 훈구, 척신 세력이엇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이러한 부패상이 신진 사림 세력들에겐 정치적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사림의 공격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종의 후원 때문에 훈구 세력이 사림에 점점 밀리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림 세력의 지나친 팽창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한 이후 자위책의 일환으로 '무오사화'를 획책하게 된다.
성종의 후원에 힘입어 사림파는 세력이 확장되자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를 다시 부활시켰다. 유향소의 부활은 당시 부패로 치닫고 있던 관료제 중심의 농촌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개국 이후 농촌 사회에서는 부의 축척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곧 관료들의 부패로 이어졌다. 유향소는 이런 부패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조직된 지방의 지치기구였다.
유향소는 고려 말에 형성되었다가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태종 대에 혁파된 바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유향소의 권한을 향풍을 바로잡는 일에만 한정시킨 후 부활시켰다 그런데 세조가 등극한 뒤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유향소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시 혁파되었고, 1488년 성종이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
성종이 부활시킨 유향소 제도는 중앙집권 체제의 보조 기구에 불과했지만 사림에게는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다. 이는 조정내에서 사림의 힘을 키워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성종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성종 대에서는 사림 세력이 중앙의 비판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이는 결국 성종이 노린 힘의 균형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즉 성종이 왕도 정치를 표방한 것은 학문을 좋아했던 그의 천성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림파에 대한 개념적인 규정과 형성 과정 등은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연산군 대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만 사림파의 거두로 불리는 김종직의 삶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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