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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3 : 조선의 역사 75 (성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3. 23. 04:21

 

 

 

한국의 역사 533 : 조선의 역사 75 (성종실록 3)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2. 성종의 도학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성종이 성인이 되자 7년 동안 섭정을 끝냈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성종은 과도하게 비대해진 권신들의 권력과 부귀영화, 탐욕 등 무소불위의 세력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던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여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그 결과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나갔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학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으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활쏘기)와 서화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의경세자가 왜 요절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인수대비' 드라마를 보면 아마 세조의 단종 폐위와 사사, 그리고 수많은 신하들을 도륙하는 과정에서 무척 반감을 가지고 고심하였던 인물로 판단된다. 정희왕후(세조비)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강한 권력욕에 비해 의경세자는 오로자 단종을 보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세조의 왕위찬탈과 강권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끓었거나 사고사로 위장해 한명회 등에 의해 암암리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어린 시절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다섯 살 되던 해인 1461년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한 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정희왕후와 원상 대신들과의 결탁에 의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인 스무살 될 때까지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예종의 아들인 제안군과 성종의 친형인 월산군을 대군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귀양 보냈던 구성군에 대해서도 왕족임을 감안하여 가산은 몰수하지 않고 나라에서 양미식물을 지급하였다. 특히 월산대군은 성장하여 이미 19세의 나이였으므로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녀의 이 같은 조치는 종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한명회 등의 권신들과의 결탁을 통해 성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으나, 그녀는 대의명분이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발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1469년 12월에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인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완료하였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 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의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편 외촌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문화 강화 장책을 실시했다.

 

민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평안.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재배케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정희왕후 윤대비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유교문화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을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들의 등용이 금지되었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섭정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정사는 신권 중심으로 이끌려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