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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2 : 조선의 역사 74 (성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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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2 : 조선의 역사 74 (성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2. 3. 22. 03:14

 

 

 

 

한국의 역사 532 : 조선의 역사 74 (성종실록 2)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는 한명회, 신숙주 등 대신들과 협의 끝에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히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조선 역사상 왕이 죽는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정희왕후 윤비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다른 대신들은 미쳐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조선 제9대 왕은 13세의 자을산군으로 전격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물론 나름대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아직 어리고 의경세자의 아들인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은 병 중이었다는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도 있었다. 제안군은 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기에 제외될 수도 있었겠지만, 16세였던 월산군을 배제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월산군은 명실상부한 세조의 장손이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제안군이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월산군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춰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이에 대해 세조의 유명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는 근거가 없어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또 늘어놓은 변명이 월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특별한 근거는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바로 원로 대신들과의 정치적인 밀약내지 결탁이었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당시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외척인 한명회가 버티고 있는 한,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정희왕후는 종친 내지 반대 세력들의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가 반대하는 바람에 자을산군으로 결국 결정된 것이었다.

 

정희왕후는 권신들의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은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힌 것이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신진세력으로 남이와 같이 조정에 혜성처럼 등장한 왕실 세력의 중심이었던 왕족이었던 구성군을 휘협 세력으로 간주하여 모반의 빌미를 만들어 유배시켜 버린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되어 남이와 같이 난을 평정한 공신으로 평정 후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일약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는 남이와 비슷한 불과 28세였다. 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남이 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하고 불안해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로 대신들의 주도하에 기타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1470년 성종 1년에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유배령을 내리게 된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아까운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이후 조선은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 되었다. 

 

어쨌던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성공을 거두었고,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은 세조 대부터 누려오던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월산군이나 제안대군 등은 정치적 결탁에 의해 희생자로 남아야 했고 평생 불우한 생을 살다가 소리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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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수대비'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그 드라마를 보면 수양의 계유정난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는 듯하다.

 

그 드라마에서 단종은 김종서, 황보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고명대신은 물론 왕족인 삼촌들까지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절치부심하는 사람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수양의 왕위찬탈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고명대신으로, 의경세자는 어린 단종을 지키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에 우유부단함을,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신숙주 등이 어린 단종을 빙자하여 권력을 잡고 '황표정사' 등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요직에 심고 전권을 휘두르며 왕위를 위협하는 역신들로 인식하고 있으며, 안평은 홀로 다른 속셈을 계산하고 있는 인물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의경세자의 비인 소혜왕후(후일 인수대비)는 수양의 며느리로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예측하며 수양대군에게 왕위찬탈을 공공연하게 공언하며 독려하는 당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수양이 한명회를 자신의 수하로 끌여들이는 것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고, 한명회의 당찬 계략에 점점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계유정난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으킨 난이 아니다. 주요 핵심 세력을 몇 명의 무장을 동원하여 기습적으로 척살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았고 한명회의 치밀한 게략과 과감한 행동이 성공의 열쇄였다. 그리고 김종서의 척살에 이어 '생살부'를 통해 고명대신들을 한꺼번에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 문 안에서 모두 척살함으로써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난을 성공할 수가 있었다.

 

김종서 세력은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킨다면 군대를 대거 동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군사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고, 수양의 허허실실 작전에 방심하고 있다가 전격적으로 당하여 몰락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김종서를 충신으로 인식할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수양의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 될 수가 없다. 수양은 후대에 욕을 먹은 것은 사림파들에 의한 것이었는데, 대의명분이 부족한 왕위찬탈이라는 도덕적, 윤리적인 결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잘못하면 이씨 왕조가 김종서 손에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수양대군에게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기도 하다. 김종서를 포함한 고명대신들의 권력 독식이 불러온 왕족들의 불안감이 결국은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결국 계유정난을 불러오게 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권력이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것이 그 속성인바, 김종서는 누구보다도 변방 6진을 개척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해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리고 고명대신으로 어린 단종의 왕위를 보전하는 데 진력을 다했지만 과도한 권력집중과 권력독식이라는 무리수가 결국은 왕족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는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김종서 일파가 수양과 안평을 같이 끌어앉고 단종 보위에 동참시켰더라면 수양의 왕위찬탈까지는 불러오지 않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여야가 제주해군기지, 한미 FTA, 4대강 사업 등 같은 사안이라도 생각하는 각도에 따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며 상반된 주장을 펴면서 갈등의 골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은 재물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와 나눌 수도 없고 공유하기도 힘든 것이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아까운 인재 김종서는 이렇게 허무하게 역사에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