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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34 : 조선의 역사 76 (성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534 : 조선의 역사 76 (성종실록 4)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2. 성종의 도학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계속)
하지만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내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찿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 문제를 야기했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 말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들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대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 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 같은 도학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였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관 경비를 지금하기 위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저술에 전념케 했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국조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상필을 도원수로 삼가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끓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인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 한쪽에 퇴폐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비극적인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성종 후기의 이런 부분적인 병폐는 옥에 티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백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계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했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능은 선릉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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