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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5 : 조선의 역사 47 (세종실록 15)

두바퀴인생 2012. 2. 24. 02:59

 

 

 

한국의 역사 505 : 조선의 역사 47 (세종실록 15)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6.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과학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세종시대의 과학혁명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었다. 세종의 과학적 열정이 아무리 대단햇다 하더라도 정영실 같은 인물이 없이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가 사대부 중심의 사회였던 만큼 천민 출신인 장영실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동래현에서 관노생활을 하던 중에 재주가 출중하여 천거되었다.

 

<세종실록>에 여진족에게 붙잠혀 있던 중국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탈출하여 조정의 대접을 받고 관기를 아내로 삼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유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장영실은 그런 아버지를 통해 중국의 선진 기술을 접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관기인 탓에 관노 신분으로 지내야 했던 것이다.

 

비록 관노 신분이었지만 그의 기술적인 능력은 탁월했던 모양이다. 그는 태종 대에 이미 재능을 인정받아 궁궐에서 일을 했고,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손기술이 뛰어난 기술자료를 찿고 있던 세종의 신임을 받아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술관료로 발탁하였다.

 

장영실은 발탁된 뒤 은밀히 중국에 파견되어 선진 기술을 익힌 듯하다. 비록 사신을 호종하는 직책이었지만 세종의 정책에 따른 기술 학도들의 견문 유학 성격이 짙었다. 중국에서 그는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넓혔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머물면서 본격적인 기술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았다.

 

그가 가장 먼저 만든 기계는 물시계였다. 이는 중국의 물시계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완벽한 자동시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물시계의 개발로 그는 정5품 벼슬에 올랐고 이후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장영실은 세종 14년에 시작된 천문 관측기인 간의대 조성 작업을 이끌었다. 그는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그리고 별자리표와 방위지정표로 구성된 정방안 등을 설치하였다.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우주관 중의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천설의 골자는 우주는 새알처럼 둥글게 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데, 땅은 마치 새알 껍데기 같은 우주 속에 있는 노른자위처럼 생겼다는 학설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주는 둥근 원으로 얽혀 있고 지구는 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둥근 원이라는 뜻으로, 곧 지구 구형설인 셈이다. 또 혼상이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것이다. 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 관측기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일군의 학자들이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의 과학적인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해시계를 일구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앙부일구란 말 그대로 '솥을 따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으로, 마치 그 모양이 가마솥에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앙부일구의 재료는 청동으로, 솥같이 생긴 반구 속에 그림자 침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반구의 바닥에는 그림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선이 세로로, 절기를 표시하는 선이 가로로 그어져 있고, 이들 선은 서로 수직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앙구일부의 위대성은 그것이 반구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는 곧 당시의 학자들이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태양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를 뒤집어서 이해하면 현재의 과학에서처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낮 동안에 반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지동설의 원리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해시계의 발달은 물시계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왜냐하면 해시계는 낮의 시간만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그것도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아주 흐리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물시계였다. 물론 당시까지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완전한 자동도 아니었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장영실은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른바 '스스로 종을 치는 물방울' 시계를 만들어냇으니, 그것이 바로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는 동시에 시간을 알리는 목각 인형이 솟아올라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자명종 시계였던 셈인데, 이는 4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호, 12개의 살대 그리고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에 의해 가능했다. 즉, 파수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올리면 동시에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고, 이 구슬이 떨어지면 시간을 알리는 정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라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로이 고안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는 만들어 궁중에 바쳤다. 이 옥루 역시 완전한 자동시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찿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이었다.

 

장영실은 해시계, 물시계의 제작 이외에도 금속활자 주조 사업에도 참여해 조선시대의 활판인쇄술의 대명사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 발전에 일생을 바친  조선시대 최고의 가술과학자였다.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 동력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시대의 찬란한 과학혁명을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아산의 명신 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며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의 귀재 박연

세종 대에 빛나는 업적 중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음악체계를 정리했다는 점이다.

 

세종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것은 미이 알려진 일이지만 박연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 대에 중국보다 우수한 음악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박연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박연은 조선시대 최고의 음악이론가였다. 그가 어떤 경로로 음악에 심취하였는지, 음악의 대가가 될 수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음악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 박연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박연은 태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박석천의 아들로, 137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 때 비로소 진사에 등과해 집현전 교리 등을 지냈으며, 주로 사헌부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봉상판관 시절에 그는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아 악학별좌를 겸하게 되었고, 아마 이때부터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게 된 듯하다.

 

세종은 다방면에 소질이 풍부한 인물이었고, 왕자 시절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연유로 박연을 특별히 가까이 하였는데, 그것이 조선 음악을 한층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예와 악이었다. 유교정치에서 유교적 의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고, 이 의례에 음악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왕도정치를 꿈꾸던 세종은 즉위 초부터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유교적 의례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음악체계의 정리를 서둘렀는데, 세종의 이러한 꿈은 박연에 의해 실현된다.

 

세종 대의 음악적 부흥은 크게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의 창작, 정간보의 창간 등으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원래 중국 고대 음악으로서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들어와 왕실의 대중사에 사용되었다. 우방으로는 민속악을 대변하는 향악과 당악이 있었다.

 

박연은 음악의 정리 작업에 앞서 중국 고정들을 통해 참고자료를 확보했으며, 이후 아악기와 아악보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박연은 당시까지 수입되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과 편종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율관을 제작하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험 제작을 했고, 흐트러진 악재를 바로잡기 위해 수십 번에 걸쳐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아악의 정리 과정에서 향악과 아악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하였고 여기엔 세종의 영향력이 컸다. 박연은 원래 철저한 중국음악만을 고집했지만 세종은 조선 음악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향악에 대한 연구를 명령했다. 덕분에 <세종실록>의 악보에는 아악과 향악을 겸용한 원구악이 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과 함께 <보태평>, <정대업> 등의 향악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세조 이후에 아악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곧 궁중 음악에서도 중국의 것을 원용하지 않고 우리의 음악을 사용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음악적 공헌은 그를 중국 순임금 시절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에 비견하기도 했다. 그는 축과 악현의 제도를 개정했는가 하면 악현의 제도를 옛것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조선은 악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독자적인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민간에만 남아 있던 향악을 궁중악으로 끌여들여 민족음악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노년에 더 이상 정사를 맡아볼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고향 영동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향악의 발전에 몰두하다가 1458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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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향악, 당악에 대하여...

 

 

아악

아악 (雅樂)은 넓은 의미로는 민속 음악의 대(對)가 되는 제례악·궁중 연례악·정악을 통틀어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문묘 제례악을 가리킨다. 한국 음악을 향악. 당악, 아악으로 나눌 때는 좁은 의미의 아악을 뜻한다. 아악은 중국의 상고시대 궁중음악으로 흔히 주(周)대의 음악이라고 한다.

 

1116년(예종 11년)에 송(宋)나라의 휘종(徽宗)이 고려의 예종에게 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편종(編鐘)·편경(編磬)·축(祝)·어 같은 희귀한 중국 고대악기에 의하여 4자 1구, 8구 1장으로 된 한문악장(漢文樂章)의 노래를 연주하는 아악이 종묘에서 처음으로 채용된 것은 획기적이었다. 의종 때에는 아악이 원구·사직(社稷)·선농(先農)·태묘(太廟)·문선왕묘(文宣王廟)·선잠(先蠶)에 사용되었으나, 명종(明宗) 18년(1188) 당시에는 그런 제례에 아악만 사용되지 않고, 향악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만 섞였기 때문에 고려조의 아악은 아직 미비하였다고 하겠다.

 

대성아악

중국 송대의 아악으로 송 태조 때부터 휘종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고쳐 만들었다. 1105년에 구악(舊樂)을 일절 쓰지 않기로 함과 동시에 대성부(大晟府)를 세워 아악을 관장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116년(예종 11년) 송 후종이 하례사 왕자지(王子之), 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대성아악을 보내왔다. 이 송의 대성아악은 고려 때 제향(祭享)에 쓰였는데, 근세조선 세종 때는 박연(朴堧) 등이 중국 한(漢)·당(唐)·송(宋)의 전적을 참고하여 중국 주나라 제도(周制)에 가깝게 새로 제정하였다.

 

조선 전기의 아악

고려 때부터 쓰여온 아악은 악기·제도·악률 등에서 여러 가지 불비한 점이 있었으므로 박연 등이 <주례(周禮)>, <석전악보(釋奠樂譜)> 등 중국 고대 악서(樂書)를 참고하여 아악을 엄격하게 바로 잡았다. 첫째는 고려 때 제례악에 아악만을 쓰지 않고 아헌(亞獻)·종헌(終獻)과 송신(送神)에 향악을 섞어 쓰던 것을 세종 10년부터 그 향악을 없애고 순전히 아악만을 썼다. 둘째, 전에는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의 음악이 모두 양률(陽律)의 궁(宮, 중심음)만을 썼었는데, 세종 12년경에 <주례>에 따라 등가에는 음려(陰呂)의 궁, 헌가에는 양률의 궁을 써서, 음양지합(陰陽之合) 또는 합성(合聲)의 격에 맞게 고쳤다. 셋째, 세종 9년에 박연이 처음으로 율관과 편경을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넷째, 제례에 사용되었던 아악곡, 즉 봉상시(奉常寺)에 전래된 <조선국악장(朝鮮國樂章)>은 그 출처가 미심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하여, 세종 12년에 그것을 버리고, 임우(林宇)의 <대성아악보(大成雅樂譜)>를 바탕으로 새로 아악보를 제정하고 그것을 제례악으로 사용하였다. 이 혁신된 아악곡이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다. 다섯째, 그전에는 조하(朝賀)와 회례(會禮)에 당악과 향악이 사용되었는데, 세종 12년에는 <의례시악경전통해(儀禮詩樂經傳通解)>의 소아편(小雅篇)의 악보에 기하여 조하에 쓸 아악보(雅樂譜)를 제정하고, 세종 13년 정월에 처음으로 조하에서 당악 대신에 아악 <융안지악(隆安之樂)>, <서안지악(舒安之樂)>이 연주되었고, 세종 15년 정월에 회례에서 당악과 향악에 아악 <문명지곡(文明之曲)>, <무열지곡(武烈之曲)>이 추가 연주되었다. 이같이 세종 때에는 아악이 제례에서 조하, 회례에까지 확장되었지만 세종 이후 다시 중국제도의 제례에만 국한되었고, 조회와 회례에서는 다시 후퇴하였다.

 

조선 후기의 아악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두 차례의 외침을 받고 수도를 비웠던 까닭에 궁중음악은 조선 전기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 병자호란 후 국력이 피폐하여 전후 10년간을 종묘제향을 비롯한 모든 제향과 조정 의식에 음악이 빠졌다가, 겨우 인조 25년(1647) 정월의 종묘제향에 그전과 같이 음악이 사용되었을 정도였다. 인조 때의 제례 아악의 규모는 겨우 헌가(軒架) 22인, 등가(登歌) 20인으로, 성종 때의 헌가 124인 등가 64인에 비하면 극히 작고, 그 이후에도 그 이상 더 커지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는 문묘 제례악(文廟祭禮樂)에서만 쓰인다. 편종·편경·금·슬·지·훈·부·어 같은 희귀한 중국의 고대 악기로 편성되었다. 12율 4청성으로 제한해 쓰고 7음계로 되었다. 주음(主音)으로 시작해서 주음으로 마친다. 4/2박자에 8소절로 한 곡을 이룬다.

 

 

향악 

향악(鄕樂)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음악을 말하며 대개 한국 고유의 음악이다. 넓은 의미의 향악은 아악, 당악을 제외한 제례악이나 연례악, 정악이나 민속 음악을 통틀어 말하는데, 고문헌에 보이는 향악 혹은 속악(俗樂)은 흔히 정악을 가리키는 수가 많다.

 

당악곡이 6음계로 되고 황종이 다(C)음인 데 반하여 향악곡은 5음계로 되었고, 황종이 내림마(E flat)로 되었다. 향악곡으로 오래된 음악은 정읍(수제천)·동동·종묘제향악에서 향악계 음악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당악

당악 (唐樂)은 당나라 음악이란 뜻으로 향악의 상대말로 쓰이지만 오늘날 한국 음악에서 당악이라는 것이 당나라 음악에서 유래된 것은 전하는 것이 없고, 송나라 사악(詞樂)에서 유래된 보허자(步虛子)·낙양춘(洛陽春)이 당악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악이 중국 고대 궁중 음악이고, 당악은 당대·송대의 민속 음악이다. 고악보(古樂譜)의 당악은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으로 되어 일자수음식(一字數音式)의 향악과 달랐으나 오늘날에는 당악이 향악화되어 일자수음식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당악은 6음계로 되었고, 황종의 음높이가 다(C)음인 점에서 5음계로 되고 황종의 음높이가 내림마(E flat)인 향악과 구분된다. 악기 편성은 당악기만이 편성되는 것이 아니고 향악기와 섞여 편성되지만 어느 것이나 향피리를 쓰지 않고 당피리를 쓰는 점만은 확실하다. 당악으로 실제 전해지는 것은 보허자, 낙양춘 뿐이고 당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는 여민락 만·본령·해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