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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4 : 조선의 역사 46 (세종실록 14)

두바퀴인생 2012. 2. 23. 02:15

 

 

 

 

한국의 역사 504 : 조선의 역사 46 (세종실록 14)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6.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희대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조선사를 통틀어 황희와 맹사성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재상이 또 있을까? 이들은 세종 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왕이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인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왕을 보필하고 이끌어줄 유능한 신하가 없다면 왕도정치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종시대는 세종이라는 마부와 황희와 맹사성이라는 두 마리의 말이 조선을 끌고 가는 쌍두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이들은 둘 다 철저한 선비이자 뛰어난 재상이었고 다소 흠은 있었으나 다른 관리의 모범이 되는 청백리였다.

 

1363년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불과 14세 때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충청 온양 출신의 맹사성 역시 27세가 되던 해인 1386년에 처음으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맹사성은 환희보다 3살이 많고 관직도 3년 먼저 올랐다.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은거하엿지만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고,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그는 태종 시절에 이미 이조판서에 올라 있었다.

 

맹사성 역시 조선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황희가 고려 망국 후 은거한 것과는 달리 맹사성은 태조로부터 예조정랑직을 제수받는 등 관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의 지위에 올랏다.

 

그런데 이들은 태종의 두터운 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서 한 번씩 파직을 당하게 된다.

 

1406년 맹사성은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 조대림을 고문했다.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족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은 명햇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야 했다.

 

한편 황희는 1418년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유배된다. 결국 태종이 물러날 때까지 등용되지 못하다가 세종 4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되돌아올 수 잇었다.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맹사성은 공조판서에 올라 있었고, 황희는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422년 황희가 유배에서 풀려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의 직위로 다시 등용되었을 때 맹사성은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찬성사로 재직 중이었다.

 

1432년에 이르러서 황희는 영의정부사로, 맹사성은 좌의정을 맡았다. 이때는 세종이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사서제로 권력 구조를 바꾼 지 10년이 넘은 때라 조선은 재상이 주도하는 내각정치의 틀이 다져져 있던 시기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이러한 정치 분위기를 주도하며 관리의 기강을 세우고,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조정하며 철저한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맹사성과 황희는 이렇듯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황희가 분명하고 정확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인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자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이들의 이러한 다른 일면은 세종의 왕도정치 구현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맡은 역활과 성격을 떠나 곧고 청렴하며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만큼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세종은 이들 두 재상의 성격을 십분 활용하여 때로는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온유한 정치를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왕의 중용적인 태도는 세종시대를 성종시대와 더불어 조선 역사상 가장 영화롭고 안락한 태평성대 시대를 만드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시대를 풍미하며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던 두 사람 중 맹사성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서성은 1438년, 79세를 일기로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방문해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까지 나가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 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야사에서는 그의 사람됨됨이와 청렴에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또 한 사람의 명재상 황희는 조선의 재상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1449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무려 87세라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었다. 1438년 맹사성이 죽고 나서도 황희는 14년을 더 살다가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학덕이 높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공사 처리의 귀재로 불린 사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성품이 너그럽고, 예법 및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인정 많고 사람 좋은 선비였다. 그러나 몇 가지 뇌물 사건과 사위 서달의 살인을 은폐하려다 탄핵을 받은 일은 그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