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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2 : 조선의 역사 44 (세종실록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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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2 : 조선의 역사 44 (세종실록 12)

두바퀴인생 2012. 2. 21. 10:59

 

 

한국의 역사 502 : 조선의 역사 44 (세종실록 12)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실제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조선 시대에 한글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유신들에게 배척과 멸시를 받으며 음성적으로 백성들과 부녀자들에게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특히 궁중의 여자들이 즐겨 사용하였다.

 

당시까지는 누구도 한글의 우수성을 알지 못하였고 여전히 조선 사회는 한자를 숭상하며 유교사상과 사대주의에 빠져 허례허식과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 중기에 들면서 정조 등 임금도 언문을 강조하려 했지만 유신들의 반발에 밀려 그 실행을 제대로 펴지 못했으며 정조가 일찍 죽으면서 그의 개혁 의지도 사라졌다. 단지 민간 백성들에게 필요한 한자책에 언문으로 주해를 달아 민간에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거의 500년 동안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한글은 비주류가 되어 주변부에 맴돌다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적인 자각심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한글로 신문과 책이 보급되었고 해방 이후 국가 정책에 의해 한자가 제한되고 한글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주류 글자로 자리메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조선 시대 한글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 대한 한 학자의 논문을 참고로 싣는다.

 

 

 

조선시대 한글의 보급과 확산 과정

 

세종의 훈민정음은 창제 이후 근 450년간 나랏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문자 생활의 주변부에 놓여 있었으나, 진솔한 감정의 문학적 표현, 한문 학습, 일상 생활의 실용 등과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이 문자는 꾸준히 가르쳐졌으며, 한글로 작성된 각종 문서와 典籍이 계속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글 보급이 점차 확대되어 문자 생활에서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개화기 이후 민족 자존의 독립 의식이 싹트면서 國語와 國文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졌고, 갑오경장과 더불어 한글은 민족의 문자 생활에서 그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민족이 오랫동안 민족의 정체성과 국가로서의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언어의 고유성과 그것을 표기한 문자체계가 확고한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어와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은 한국이라는 정치 · 문화적 단위를 가장 특징화하는 標識이며,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 왔던 것이다. 진시황제가 시행한 한자 字形의 통일이 그후 긴 세월 동안 중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듯이, 우리 민족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그 보급은 참으로 큰 정치적 · 문화사적 의미를 가진다.

 

 

 

Ⅱ. 한글의 보급 과정과 실용 양상

 

 

1. 한글의 교육

한글의 보급 과정을 밝힘에 있어 우리는 먼저 한글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글 교육의 실상을 알려 주는 자료는 매우 드물어 세부적인 서술에는 한계가 있다. 이 절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한글 교육과 민간에서 이루어진 사례를 고찰하기로 한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 吏胥 10여명에게 이 문자를 익히도록 하였다(세종 26년의 최만리 상소문). 한글 반포 이후에는 이서를 선발할 때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였고(세종 28년 12월 26일), 함길도 및 각 관아의 관리를 선발할 때 먼저 훈민정음을 시험하여 합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세종 29년 4월 20일). 세종의 이러한 조치는 이서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관공서의 이두 문서를 한글 문서로 대치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한글을 가벼이 생각하는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한글을 배우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臺諫들이 임금을 속였다 하여 세종이 그 죄상을 한글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신하들이 다시 상소를 하자 언문 諭示를 내려 신하들이 읽어보도록 하였다(세종 28년 10월 10일). 같은 해 10월 13일에도 세종이 諺文書 몇 장을 대신들에게 보여 주며 “경 등이 내 뜻을 알지 못하고서 왔으니, 만약 이 글을 자세히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내린 글을 읽지 못해 그 뜻을 받들지 못하는 신하의 처지가 어찌 될 것인가를 상상해 보면, 세종이 자신의 뜻을 한글로 써서 신하들에게 보인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세종 29년 11월 14일 조에 李石亨이 동궁의 書筵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청하는 上書에 “지금 書筵官 열 사람에 언문과 醫書를 제하면 겨우 신 등의 여섯 사람이 윤차로 進講하옵는데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궁이 배우는 과목에 ‘언문’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교육제도라 할 수 있는 서연에서 ‘언문’을 設講한 것은 그 파급 효과를 고려할 때 한글 보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세조 6년(1460) 5월 28일에는 文科初場에서 훈민정음을 강설하도록 청하는 예조의 啓가 있었다. 같은 해 9월 17일 성균관 학생들이 대학, 논어, 주역 등을 단계적으로 익히도록 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상서에, 매 式年의 講經 때에 四書를 강설하고, 아울러 ?훈민정음?, ?동국정운?을 시험하도록 청하고 있다. 이 기록은 성균관 학생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교재로 삼아 그 원리를 이해하도록 했음을 의미한다. 성균관의 이런 교육과정은 지방의 향교 등 다른 교육 기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는 이서의 선발과 문과 초장에서 훈민정음의 강설을 시험했던 사실에서 한글 교육이 한 때는 국가 정책의 하나로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간에서 아이들에게 한글 교육을 시킨 구체적 기록이 「곽씨언간」에 나온다. 여기에는 ‘언문’이라는 낱말이 3건의 편지 속에서 다섯 번 등장하는데 모두 아이들의 한글 교육과 관련된 것이다. 아이들의 한글 교육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 및 부녀자들이 그 교육을 담당한 사실이 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17세기 초의 아이들이 한글을 배울 때 어떤 텍스트를 사용하여 어떤 방법으로 익혔을까. ?훈몽자회? 凡例의 諺文字母와 ?眞言集? 등의 諺本, 反切表 등과 유사한 형태의 학습 자료를 이용하여 자모의 순서와 명칭, 자모의 결합 방법 등에 대해 익혔을 것이다.

 

 

 

2. 한글의 보급 과정

 

 

2.1. 궁중을 중심으로 본 훈민정음 사용의 확대

한글 보급의 초기 단계는 세종 이후 연산군(재위 기간 1494-1506)까지의 왕조실록 기사를 통해 궁중의 생활에서 한글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는 아래와 같다.

 

세종대 이후 한글 사용의 최초 기록은 양녕대군과 관련된 기사에 보인다. 문종 1년(1451) 11월 17일 조에 양녕대군이 조카 文宗에게 언문 편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편지는, 귀양살이 중의 김경재가 서울로 돌아와 딸을 시집보낼 수 있도록, 양녕대군이 문종에게 청한 것으로 남성 왕족 간에 오고간 한글 편지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조선 시대에 한글 사용의 주체로서 여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성이 한글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단종 1년(1453)에 나타난다. 이 해 4월 2일에 수강궁의 어느 시녀가 別監과 사통한 사실이 있다고 시녀 ‘묘단’이 혜빈에게 언문글로 고자질하자, 그 글을 승정원에 내려 처결토록 하였다. 여성이 한글을 사용한 첫 기록이 궁중 시녀와 별감 간의 ‘私通’으로 시작된 것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혜빈을 비롯하여 ‘묘단’과 ‘중비’ 등 시녀들까지 언문으로 글을 쓸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궁내의 여성들 중 많은 수가 언문을 해득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1453년 4월이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6년 반 정도 되는 때이다. 결코 길다고 말할 수 없는 이 기간에 궁중의 시녀들이 이 문자로 글을 썼다는 사실은 훈민정음이 여성들에게 환영받았음을 의미한다. 문자로써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한 번도 표현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해 준 한글이 참으로 신기하고 기특한 존재였을 것이다.

 

세조 11년(1465) 9월 4일 조에는 宮人 德中이 龜城君 李浚을 연모하는 편지를 언문으로 써서, 환관 崔湖를 통해 이준에게 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남녀간 연모의 정을 한글로 써서 표현한 것은 한글이 섬세하고 미묘한 마음을 나타내는 데 적합함을 의미한다. 세조 14년 5월 12일 조에 “임금이 사정전에서 8명의 기녀에게 언문 가사를 주어 부르게 하였으니 곧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이라”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궁내에서는 천한 신분의 기녀들까지 언문을 읽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전의 왕비나 대비가 한글을 쓴 기록으로 가장 빠른 것은 세조 4년(1458) 8월 24일 조에 金汾․金潾 등의 옥사를 의논할 때, 중궁이 자신의 의견을 언문으로 지어 임금께 올린 일이다. 성종 1년(1470) 3월 9일 조에도 “내전에서 나온 언문에 그 당시 경신 옹주가 그 어머니에게 불순하던 모양과 세조가 처결한 사유가 실렸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성종실록에는 언문 관련 기사가 19건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윤씨 폐비 문제와 관련하여 중궁과 대비가 자기의 생각을 한글로 적어 올리거나 윤씨의 시녀 및 私家의 비복이 한글 편지로 모의한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는 뒷날 연산군 때 익명의 언문 투서(연산 10년, 1504년 7월)로 발생한 언문 禁壓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많은 사람을 곤경에 몰아 넣게 된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익명의 언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범인 색출을 위해 한글을 아는 이들의 필적을 대조하고, 언문 서적을 불태우는 등 연산군 때 한글은 큰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도 언문으로 曆書를 번역한 일(연산 10년 12월 10일), 궁인(宮人)의 제문을 번역한 일(연산 11년 9월 15일), 대비의 생일에 올린 글을 언문으로 번역한 일(연산 12년 6월 24일), 언문을 아는 여자를 궁인으로 뽑은 일(연산 12년 5월 29일) 등에서 보듯이 한글이 여전히 활용되었음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승려로서 한글 사용의 최초 기록을 남긴 이는 信眉이다. 예종 1년(1469) 6월 27일 조에,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금강경과 법화경을 시험하여 능하지 못한 자를 환속시키려 한다는 방침을 전해 들은 신미가 언문으로 글을 써서 임금께 비밀히 아뢰기를, “중으로서 經을 외는 자는 간혹 있으나, 만약에 講經을 하면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겨우 한둘 뿐일 것이니, 원컨대 다만 외는 것만으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실록기사들을 통하여, 궁중에서는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한글이 다양한 용도로 생활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중의 여성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된 것은 한글이 매우 익히기 쉬우며 진솔한 감정 표현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2.2. 한글 사용의 지역적 확대

훈민정음의 보급을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각종 서적의 간행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이 세종 대에 나오고,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등 10종에 달하는 언해서가 세조 대에 간행되었다. 성종 대에도 ?두시언해?, ?구급간이방언해?, ?삼강행실도? 및 불경 언해류가 나왔다. 불경 언해류의 간행은 好佛 군주가 뒷받침하는 왕실 사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醫書와 敎化書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보급에 기여했음이 확실하다. 이러한 서적의 출판으로 훈민정음은 서울의 식자층을 중심으로 하여 빠르게 보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는 훈민정음이라는 새 문자가 비교적 빨리 알려졌겠지만 지방과 시골의 경우는 더 늦었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지방 거주민에게 전파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듯하다. 당시 출판의 형편상 앞에서 언급한 佛書 등 한글 번역서가 지방에까지 널리 보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국적인 규모로 훈민정음이 전파된 과정과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토대로 대강의 시기는 파악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라는 새 문자의 구체적 형태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성종 3년(1472)에 임금이 내린 한글 포고문일 것이다. 성종은 스스로 근검 절약하는 뜻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서울과 모든 道의 여러 고을에 한글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한글 반포 25년이 지난 1472년에 방방곡곡에 나붙은 한글 포고문은 지방민에게 새로운 문자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16세기의 10년대부터 지방에서 각종 한글 문헌이 간행된 사실은 한글의 전국적 확대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6세기에 지방에서 간행된 한글 문헌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이 문헌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 한글 보급과 관련하여 16세기에 간행된 한글 문헌은 그 성격상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초학자를 위해 한글 훈을 붙인 字書의 간행이다. ?훈몽자회?(1527), ?천자문?(1529), ?유합?(1529), ?光州 천자문?(1575) 등은 초학자가 한자를 익히는 단계에서 한글을 배웠음을 의미한다. 이런 字書들이 한글 보급에 기여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농사와 풍속교화 및 질병치료를 위한 한글 서적의 간행이다. 1518년에 金安國의 주도로 ?이륜행실도?, ?여씨향약언해?, ?정속언해?, ?잠서언해?, ?농서언해?, ?벽온방언해? 등이 경상도에서 간행되었다. ?번역소학?(1518), ?女訓?(1532), ?이륜행실도?(1539), ?삼강행실도?(1554, 1581) 등의 교화서류와 ?간이벽온방?(1525), ?촌가구급방?(1538), ?분문온역이해방? 등의 의학서가 한글로 번역되거나 한글 표기 어휘를 수록하여 민생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셋째는 한글 佛書의 간행이다. 지방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은 경상도 합천 鳳栖寺에서 1500년에 간행한 ?목우자수심결언해?이다. 이 책은 간경도감판(초간은 1467)을 덮새긴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한글 서적이 지방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승려 등)이 지방에도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간경도감이 폐지된 이후 불경의 간행은 각 지역의 사찰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어, 16세기부터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佛書 언해본이 나왔다. 앞에 언급한 봉서사판 ?목우자수심결언해?를 필두로 ?四法語諺解?의 중간본이 충청도 孤雲寺版(1517), 황해도 深源寺版(1525), 전라도 松廣寺版(1577) 등 각 지역에서 나오게 된다. ?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의 복각본으로 강원도 유점사판(1521), 경상도(풍기) 石輪庵版(1523), 황해도 심원사판(1525) 등이 있고, 이 책의 원간본 체제를 바꾸어 간행한 중간본으로는 충청도 고운사판(1517), 함경도(영변) 永鉢庵版(1535), 전라도 송광사판(1577)이 있다. 16세기 후반기에는 ?부모은중경언해?가 경기도(장단) 화장사판(1553), 전라도(승주) 송광사판(1563), 황해도(문화) 명엽사판(1564), 충청도(은진) 쌍계사판(1567), 경상도(풍기) 기방사판(1592) 등이 간행되어 한글 서적 출판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밖에 지방 간행의 佛書로 전라도(순창) 취암사판(1567)과 충청도(서산) 개심사판(1584)의 ?몽산화상육도보설언해?가 간행되었고, 경상도(풍기) 희방사판(1569)의 ?칠대만법?이 있다.

 

첫째 부류의 것은 초학자의 한자 학습에 한글이 유용하게 활용된 것인데 어린 아동들이 일찍이 한글을 익히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둘째 부류의 책은 民生의 유익함을 돌보고 풍속 교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셋째 부류의 책은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한 것이다. 이 세 부류의 한글 문헌들은 지방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방에서 간행된 한글 문헌은 16세기 초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중엽경에는 상당히 많이 간행되었다. 이 사실은 16세기 초에 지방 사회에 한글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이 점은 후술할 諺簡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므로 필자는 16세기 중엽 경에는 지방 사회에도 한글 보급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고 판단한다.

 

 

 

2.3. 한글 사용의 사회적 확대

한글 사용의 지역적 확대와 아울러 사회 계층적 확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이러한 목적의 달성에 유용한 방법은 한글로 작성된 편지와 고문서의 작성자와 수취자를 사회 계층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언간과 현전 한글 고문서를 통하여 한글 사용의 계층적 확대 과정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상층(양반)에서부터 중간층(중인층)과 하층(노복 등의 하층민)에 이르는 단계적 확산 과정을 고려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한글 창제 이후 이 문자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분야는 편지이다. 한글 편지를 흔히 ‘諺簡’이라 하고 언간은 주로 여성들이 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현전하는 한글 편지 자료를 검토해 보면 남녀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 한문 편지가 거의 대부분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사실과 달리, 한글 편지는 남녀가 함께 이용한 문자 생활 수단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한글 편지 관련 기사는 앞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생략하고, 현재 실물이 전하고 있는 민간의 한글 편지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을 시대순으로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순천김씨언간」

전체 분량 192편 중 189매가 한글 편지이다. 연대가 분명한 것으로 3번 편지(명종 10년, 1555)와 80번 편지(선조 2년, 1569년 또는 그 직후)가 있다. 신천 강씨가 그의 딸인 순천 김씨에게 보낸 편지들은 1594년 이전에 쓰인 것인데, 말년에 아픈 몸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삶의 한과 여인의 넋두리가 곳곳에 배여 있다. 「순천김씨언간」은 1560년대와 1570년대, 더 내려오면 158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보아 1550년대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쓰여진 편지이다(조항범 1998:23).

 

2) 松江 鄭澈 家의 언간

鄭澈의 慈堂 竹山 安氏(1495-1573)가 高陽 新院에서 廬幕을 지키고 있는 아들에게 쓴 것 3매(1571, 1572), 송강이 부인에게 쓴 것 3매(1571, 1573, 1593), 송강의 부인 유씨가 아들에게 쓴 것 1매(年紀 미상)가 있다. 김일근(1986)에 그 해설과 판독문이 소개돼 있다.

 

3) 安敏學이 부인 郭氏의 죽음을 애도한 편지

안민학(1542-1601)이 1576년 23세의 일기로 죽은 아내 곽씨 부인(1554년-1576)을 애도하고, 고달팠던 처의 인생을 슬퍼한 편지이다. 양반 지식층이 쓴 것이지만 문장이 어색하고 표기법과 어법에 혼란스러운 곳이 있어 한글 작문에 미숙한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구수영(1979)의 해제 및 판독문이 있고, 도수희(1985)가 음운에 대해 쓴 간략한 논문이 있다.

 

4) 李應台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을 애도한 편지

1매. ‘固城李氏 李應台墓 出土 편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자료는 1998년 4월 24일 안동시 정상동의 택지 조성 공사를 하던 중 50여점의 복식 자료와 함께 관 속에서 출토되어 안동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성 이씨의 17세손 이응태(1556-1586)가 서른의 나이에 갑자기 죽자 그의 아내가 그 슬픔을 적어 고인의 관 속에 넣은 이 편지는, 그 사연의 애절함과 지극한 간절함이 사무치는 문학 작품이다. 이 편지의 필자는 고성 이씨 족보에 그 姓도 올라가 있지 않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내’라고 칭하는 쓰임이 특이하다.

 

5) 鶴峯 金誠一이 임진왜란 전장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1매. 학봉 김성일이 선조 25년(1592) 12월 24일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慶尙右道 監司로서 진주로 가는 도중 산청에서 안동의 부인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전란 도중의 위급하고 궁핍한 상황이 나타나 있으며, 부인에게 부모님을 잘 모시고 편안히 과세하라는 사연이 담겨 있다. 안동시 서후면의 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1957년 8월 26-28일자 조선일보 지상을 통해 김사엽 박사가 소개하였고, 김일근(1986)에 해제와 본문이 실려 있다. 학식을 갖춘 학자의 글이어서 문장이 간결 · 적확하며 그 뜻이 절실하다.

 

6) 「현풍곽씨언간」

전체 분량 170매. 1989년 4월에 달성군 玄風面 大里의 현풍 郭氏 문중에서 같은 군의 求旨面 道洞里 石門山城에 있는 12대 祖母 河氏夫人(郭澍의 再室)의 墓를 移葬하던 중 관 속에서 다수의 의복류와 함께 발견되었다. 170매 중에는 漢文 편지 5매도 포함되어 있다. 種子分給記, 노비 名簿, 調理法을 한글로 적은 것도 있다. 전체 문건에서 郭澍(1569-1617)가 쓴 것이 105매로 가장 많다. 이 자료들에는 작성 연월일이 기록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1602년과 1652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앞의 김성일의 편지에서 언급한 문장의 간결·적확함은 곽주의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시집간 딸이 쓴 편지는 문장이 길고 산만하여 한글 문장 구사력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 준다.

 

7) 李東標 언간

분량은 40여건. 이동표(1644-1701)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로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에 재직하셨던 故 李源周 교수가 소장하셨던 자료이다. 김종택(1979)에서 그 일부가 판독되어 원문이 소개된 바 있다.

 

 

 

 

 

3. 한글 실용의 실제

 

 

3.1.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한글 문서

한문을 번역 간행한 언해서를 제외한다면, 정부가 통치 목적으로 한글을 이용한 대표적 사례는 윤음(綸音)이다. 윤음은 왕이 백성에게 내린 訓諭의 문서인데 그 내용은 賑恤, 慰撫, 戒酒, 斥邪, 養老, 勸農 등 그 당시의 당면한 사태와 정책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윤음은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과 관련된 연구에 유용한 자료일 뿐 아니라 상당수의 한글본이 있어 국어사 연구에도 귀중하다. 필자가 확인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왕의 한글 교서(‘윤음’이라고 명기되지 않은 것도 포함함)는 선조대 1건, 영조대 2건, 정조대 24건, 헌종대 1건, 고종대 2건으로 모두 30건이다. 정조대에 윤음이 통치 수단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은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정조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 본문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한글 교서는 성종 3년(1472) 9월 7일의 기사에 나타난다. 의정부에서 아뢰어, 임금이 절검에 힘쓰고 몸소 행하여 백성을 인도하는 지극한 뜻을 글로 지어 漢城府와 모든 道의 여러 고을에 이를 반포하고 이를 關門 · 장터 · 마을 곳곳에 걸어두기를 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그 글을 한글로 번역하고 인출해서 중외에 반포하여 부인과 아이들까지도 두루 알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백성들에게 왕의 뜻을 전달하는 데 한글이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문서의 의의는 큰 것이다. 왕의 정책 의지를 담아 전국 방방곡곡에 한글 포고문을 내건 이 사건은 시골 변방에 이르기까지 한글이라는 존재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한글 본문이 현전하는 것으로 연대가 가장 빠른 윤음은 임란 중(1593)에 내린 선조의 국문 교서이다. 이 포고문은 난리를 피하기 위해 산골 깊숙히 숨어버린 백성들에게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와 생업을 돌보라는 임금의 간곡한 뜻을 담고 있다.

 

영조대의 윤음은 음주를 경계하고 백성의 풍속을 교화함이 목적이고, 정조대의 윤음은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들에게 기근과 재해 등으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펴 목민에 힘쓰기를 당부하는 것이 많다. 경상도 관찰사와 수령에게 내린 윤음에서 正祖는 “다만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한 뜻으로 나아가고, 고을의 원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저으기 두려워고 가다듬기를 더하게 함이라. 경은 모름지기 이로써 여러 고을에 밝게 명하여 각각 정성과 힘을 다하게 하라”(4a-4b)라 하였다. 또 “전교하여 가르치되 여기 내리는 윤음을 경이 공경히 받은 후에 여러 고을에 두루 베풀어 곤궁한 봄에 백성으로 하여금 힘을 입어 지탱함에 편안케 라”(5b)고 하며, 말미에는 암행어사를 보내어 민정을 감찰하겠다는 말도 덧붙어 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정조대왕의 어진 마음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정조대에는 임금의 뜻을 고을 방백과 백성에게 전하는 통치 수단으로 한글 윤음을 적극 활용하였으나, 정조 사후에는 급격히 줄어들어 순조, 철종 연간에는 그 예가 전혀 없고, 헌종대 1건, 고종대 2건만 나타난다. 조선 왕조는 정조대에 마지막 빛을 발하고 그 후 줄곧 쇠망의 길로 빠진다. 정조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한글 윤음은 그 역사적 의미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국가의 공용 문서 전반이 한글로 표기되기 시작한 시기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이다. 1894년(고종 31) 6월 25일에 설치된 군국기무처에서 6월 28일에 관제를 개혁하면서 종래의 ‘언문’을 ‘국문’(國文)이라 고쳤다. 같은 해 6월 28일 조에 學務衙門의 편집국에서 ‘國文綴字’를 관장한다는 규정이 나온다. 그리고 7월 12일의 銓考局 條例 普通試驗 규정에 “法令·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이라 명기하였다. 이 규정의 첫 시행은 ?官報? 開國五百三年(1894) 12월 12일에 실린 ‘宗廟誓告文’(이른바 ‘敎育立國詔書)이다. 이 서고문은 국문, 한문, 국한문의 3종으로 되어 있다(김민수 1982:202). 이에 이르러 비로소 한글은 명실상부한 ‘國文’의 자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윤음의 전통을 이어 舊韓末에 나온 한글 포고문의 한 사례로 隆熙 3년(1909) 탁지부 대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화폐 개혁 고시문이 있다. 이것은 ‘구백동화’(舊白銅貨) 통용을 금지하고, 보유한 백동화를 기한 내에 교환하도록 백성들에게 포고한 문서이다.

 

한글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국가의 시책을 알리는 전통은 일제의 조선총독부로 계승되었다. 한 예로 1924년 조선총독부가 고시한 ‘酒稅令’이 있다. 이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가 벽보용으로 만들어져 방방곡곡에 나붙었다. 문서의 좌우변에 붉은 글씨로 “악 일은 쳔리에 들인다”, “벽에 귀가 잇스며 장지에 눈이 잇다”라는 협박성 문구가 둘러쳐져 있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 인민으로부터 세금을 착취하기 위해 주세령을 고시하고 이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상에서 조선왕조의 선조부터 고종까지,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대에 걸쳐 국가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한글이 이용된 사례를 살펴 보았다. 조선 왕조의 윤음류와 구한말 이후의 고시문들은 구체적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글이 백성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은 서로 같다. 물론 조선조와 구한말 시기에도 漢文과 漢字가 여전히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문자의 민주화가 대세로 굳어져 한문은 한글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다.

 

 

3.2. 개인의 실생활에 쓰인 한글 문서

고문서는 官撰의 역사서나 첨삭이 가해진 개인 문집과 달리 당대의 생활상과 사회상, 인간 관계, 경제 상황 등이 생생하게 반영된 자료이다. 한국어의 역사를 살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주로 한글로 작성된 고문서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두문이나 한문으로 된 고문서는 그 수량이 아직 정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분량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지만 한글 고문서는 그렇지 못하다. 한글 고문서의 수가 적은 이유는 ?續大典?의 ‘戶典 徵債’ 조에 “언문으로 되었거나 증필이 없는 사채 문서는 소송을 수리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개인이 생활상의 필요로 만든 고문서는 그 문서를 발급한 자와 받는 자, 문서의 목적, 내용 등에 따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한글 고문서로는 배지, 소지(所志, 백성이 민원을 관청에 올린 문서), 명문(明文, 매매거래 증명서) 및 각종 기록류(秋收記, 物目記 등)가 있다. 漢字로 기록한 문서에 비하여 한글 문서는 사용 범위가 좁고 그 분량도 매우 적은 편이다. 한글이 이용된 문서의 종류와 성격은 ?고문서집성? 권3(正書本)에 수록된 해남 윤씨가의 문서를 통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과 ?고문서집성?을 비롯하여 각종 언간과 고문서 등의 자료를 대상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이 문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보급되어 어떤 양상으로 실용되었는지를 밝혀 보았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이서들의 선발 시험에 훈민정음을 치르도록 하거나 동궁의 書筵에서 훈민정음을 강하게 한 교육정책이 세종대에 행해졌고, 문과 初場에서의 훈민정음 강설(1460년 세조 6년)은 한글 교육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민간에서 행해진 한글 교육의 사례는 「곽씨언간」에 나타난다. 여기에는 양반집 자제가 어려서 한글을 배웠으며 외할머니가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한글 관련기사를 통해 세종 대부터 연산군 대를 중심으로 궁중의 한글 사용 실태를 검토해 보았는데, 1451년에 양녕대군이 조카 文宗에게 언문 편지를 썼다는 기록을 필두로, 궁인들의 한글 편지로 생긴 사건의 기록이 다수 나타난다. 연산군 대에는 한글 금압이 있었으나 궁중 생활의 현실적 필요에 따라 언문 역서를 번역하는 등 한글이 계속 쓰였음을 지적하였다.

 

지방에까지 한글 보급이 이루어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한글 반포 25년이 지난 1472년(성종 3)에 내린 한글 포고문은 지방민에게 새로운 문자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16세기 초기부터 간행된 세 가지 부류의 한글 문헌들을 통해 지방 사회에 한글이 보급된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16세기 초기에 간행된 ?훈몽자회?, ?천자문?과 ?유합? 등 한글 훈이 달린 초학 字書의 간행은 한글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풍속교화와 농사, 질병 치료를 위한 ?이륜행실도?, ?정속언해?, ?농서언해?, ?벽온방언해? 등이 16세기 초기부터 여러 지방에서 간행된 사실은 이 시기의 지방사회에 한글 보급이 점차 확대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刊經都監이 폐지된 후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佛書를 간행하게 된다. 경상도 합천에서 1500년에 번각한 ?목우자수심결언해?를 언해를 필두로 16세기 초기부터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한글 불서가 간행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이다. 이러한 한글 불서의 간행은 16세기 중엽경부터 더욱 빈번해진다. 이러한 세 부류의 한글 문헌 자료를 통해 우리는 16세기 초기부터 지방 사회에 한글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 경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현재 전해지는 언간 자료를 통해서도 재확인된 것이었다.

 

한글 사용의 계층적 확대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468년에 합천 본가에 살던 김종직의 처가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모두 이두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460년대까지는 지방의 양반층 부녀자들이 한글을 사용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 후 1555년과 1580년 사이에 씌어진 「순천김씨언간」은 이 시기 양반 가문의 남성과 여성들이 모두 한글 사용에 능숙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鄭澈 家의 언간들이 1570년에 씌어지고, 1576년에 씌어진 안민학의 애도문, 1586년 안동에서 살았던 이응태 부인의 언간 등도 16세기 중엽경 사대부가 부녀자들에게 한글이 널리 활용되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일반 평민 혹은 하층민에게 한글이 보급되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곽씨언간」에 주인 곽주가 노복에게 내린 배지가 있고, 윤선도家 문서 중 掌務 ‘니튱신’이 1665년에 쓴 한글 送記와 노복에게 내린 한글 배지 3매가 있다. 그리고 은진송씨가에 주인이 노복 ‘긔튝이’에게 준 한글 편지가 있다. 이런 자료들은 노비계층의 한글 해득 능력을 의미하는 것인데, 적어도 首奴의 경우에는 문자를 알았으리라고 판단된다. 1704년 예천에서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삼은 포교서 ?염불보권문?은 간행지 방언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인데 그 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이 책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18세기 초기에 이미 시골의 평민과 하층민들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 준다.

 

한글의 실용 양상에 관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째, 국가가 백성 통치를 위해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을 주목하고 성종, 선조, 영조, 정조 대에 나온 윤음 및 일제시대에 나온 한글 포고문에 이르기까지 그 줄거리를 기술하였다. 특히 윤음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다시 한글로 문서를 작성하여 널리 읽게 하였던 자료가 있음을 밝혔다. 둘째, 윤선도가의 현전 한글 고문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개인 생활에서 한글이 사용된 양상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는 상전이 노복에게 내린 배자, 물목기, 추수기, 공세기 등이 있어 한글이 실생활의 기록 문자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밖에도 궁중의 일상 생활을 기록한 進饌記, 賜饌記 등에도 한글이 활용되었음을 보았다.

 

본고에서 밝혀진 사실들은 언어 내부의 역사적 변화에 큰 관심을 쏟아온 국어사 연구자들에게 보다 풍부한 시각을 제공해 줄 것으로 믿는다. 16세기 중엽 경에는 지방민들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고, 계층적으로는 양반과 평민을 거쳐 일부 하층민까지 한글이 보급된 과정의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한글 사용 주체의 지역적 확대와 사회적 확산 과정 및 구체적 실용 양상에 대한 이해는 한국사의 속살을 채우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문학작품의 창작과 향유라는 관점에서 한글의 보급과 실용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한글로 씌어진 시조, 가사, 소설, 수필 등 각종 문학 작품은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다. 이러한 문학작품이 언제부터 창작되기 시작하여 점차 확대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창작을 하였고,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향유하였는가 하는 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