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499 : 조선의 역사 41 (세종실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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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5. 언어학사의 혁명,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는가?
세종 대에 수많은 업적이 일궈졌지만, 당언컨데 그 모든 업적을 합한다 해도 훈민정음 창제에는 필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부터 연구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잇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흔히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이해되거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고 세종이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거의 홀로 만든 것이다. 아니 홀로 만들수밖에 없었다.
당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공식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까닭에 창제 작업에 집현전 학자들을 투입할 수 없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 중 일부가 세종에게 도움을 주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의 질문에 답하는 정도의 조력자 위치에 불과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무슨 의도로 운학(언어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몰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식적으로 공표할 때까지 그들은 왕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의 창제 작업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종이 홀로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진행하지 않었다면, 적어도 실록에 그것에 관한 언급이 한 마디라도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까지 문자 창제에 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임금이 공식적인 행동과 말이 모두 기록되던 그 당시에 공식적인 사안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록에 무기 제작과 같은 극비 사항마저 기록된 것을 감안한다면 훈민정음 창제는 극비리에 진행된 국가 사업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즉, 훈민정음은 그야말로 세종이 홀로 극비리에 진행한 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왜 이 일을 홀로 극비리에 진행하였을까? 그 답은 훈민정음 공표에 반대했던 최만리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요약하면 첯째는 새 문자를 만들어 단독으로 쓴다는 말이 중국에 흘러들어가면 비난과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화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하여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 셋째는 설총의 이두로써 가능한 일을 굳이 훈민정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 넷째는 창제 취지 중 하나로 훈민정음 보급이 억울한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옳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내용의 골자는 '사대'와 '권위'였다.
당시 대개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동시에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 두가지 원칙을 국가를 유지시키는 철칙으로 여겼으며, 이러한 철칙은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들의 내면엔 학자 또는 선비로서 갖는 권위주의가 도사리고 있었고, 적어도 문자는 자기들만이 아는 것이고 학문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계급차별적인 사고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학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유학과 한자였다. 그들에게 평민은 그저 이두 정도나 알고 있는 무식쟁이였고, 천민은 그것조차도 모르는 짐승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자부심의 밑천이 한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평민이나 천민들이 쉽게 익힐 수 잇는 훈민정음의 등장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많은 학문 서적들이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어 평민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그때까지 누리던 학문적 권위를 잃게 될 것이고, 그 연장선에서 권력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유신들의 폐쇄적인 사고는 조선 역사 500년 내내 조선 사회를 지배하였고 또 철저한 계급사회는 사회의 역동성이나 유동성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그것은 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왕을 형식적으로 떠받드는 신권주의 조정을 만들었으며 왕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급기야는 조신들끼리 권력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쟁탈전을 반복하는 사색당파 싸움이 계속되면서 정치적 지도력이 상실되고 말았고 비리와 부패는 심화되어 갔다. 그래서 사화가 반복되면서 수많은 인재들이 살륙을 당하면여 조선 사회의 인재풀 가동이 멈추면서 조정이 부패해지고 지방에는 유신들과 탐관들이 득세하면서 끓임없는 백성들의 수탈에 민심이 이반되고 국력과 군사력은 극도로 저하되어 갔다. 그로 인한 임진.병자 두 외침에 의한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전쟁을 통해 국토와 백성들은 초토화가 되었다. 전란 이후 자성의 기회마저 상실하고 개혁의 의지도 사라지고 공리공론과 허례허식에 빠져 아까운 세월만 보내다가 외척들이 등장하면서 허약하고 무능한 왕을 옹립하여 전권을 휘두르며 탐욕을 부채질하다가 결국에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최만리 등이 세종의 훈민정음을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세종은 그런 현실을 미리 간파하고 만약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 공식적인 회의를 거쳐 진행한다면, 그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힐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만약 세종이 그 일을 강력하게 추진한다면 대신들은 중국 사신들의 힘을 빌려 세종을 협박했을 것임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훈민정음 창제 동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종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했지만, 당시 양반사회는 결코 그의 결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법의 내용을 아는 것이나, 또 학정을 일삼는 관리를 고발화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말이다.
세종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직접, 그것도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이 바탕이 되어 있는 점이며 모든 것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세종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조정, 유신, 양반 사대부, 신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백성들을 위한 발명이었고 백성들을 위한 개혁이었으며 백성들을 위한 창제였다는 점은 오늘날 좌.우, 당리당략에 빠져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한국의 정치권이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나무나 많다.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한 근거는 또 있다. 세종 대에 쓰던 모든 책엔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열거되어 있고, 또 당대에 만들어진 모든 과학적 산물에 대해서도 제작자와 참여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만 유독 "임금이 친히 언문 28글자를 만들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의 창제 취지와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훈민정음>에서도 '세종어제'라고 표현하고 있어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만들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는 단순히 세종 대에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세종 대에 만들어졌다는 표현이라면 당대에 편찬된 모든 책과 과학 기기도 같은 표현을 쓰야 한다. 그러나 '친제'와 '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예는 훈민정음밖에 없다. 이는 훈민정음을 세종이 직접 홀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세종은 정말 문자를 창제할 만한 언어학적 소양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세종의 언어학에 대한 깊이는 대단했다. 당대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읽고 그를 불러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되느냐?" 며 최만리의 운학에 대해 무식함을 꼬집었다. 또 최만리의 언어 가치관에 대해 논리적인 결함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총이 만든 이두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세종이 설총의 이두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했음은 물론이고, 언어학 서적도 두루 섭렵했음을 의미한다. 또 최만리에게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 는 말에서도 언어학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홍무정운역해>와 <동국정운>, <훈민정음> 등의 서문에 세종의 언어학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정인지를 위시한 당대의 언어학자들이 모두 세종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런 사실은 세종이 당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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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외국언어학자들 한글 독창성,우수성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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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나무 외국 반응 (SBS) | '뿌리깊은 나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글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 재조명되고 있다.
현재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한석규 분)을 중심으로 한 한글창제 이야기와 함께 28자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에 채윤(장혁 분)뿐만 아니라 밀본의 정기준(윤제문 분)도 '해가 서쪽에서 뜨게 하는 글자'라며 한글의 실체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데, 알고보니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 역시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높이 평가한 했던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그동안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은 한글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미국의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 세계의 알파벳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영국의 문화학자 존맨, 그리고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사세 교수는 각각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 '세종대왕은 서양보다 500년이나 먼저 음운이론을 완성했다. 한글은 전통 철학과 과학 이론이 결합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시카고대학의 J.D 맥컬리 교수는 "한글날은 모든 언어학자들이 기념해야 할 경사스런 날"이라며 한글이 제정된 날에 언급했으며, '대지'를 쓴 미국의 여류작가 펄 벅은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이다. 세종은 천부적 재능의 깊이와 다양성에서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다"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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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나무 외국 반응 (사진=SBS) |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7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제43차 총회에서는 183개국 만장일치로 한국어를 국제특허협력조약 국제 공개어로 채택했다.
특히 유네스코(UNESCO)에서는 ‘세종대왕 상’을 제정해 해마다 세계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상을 수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대해 극찬하는 외국 반응을 접하면서 '뿌리깊은 나무'를 제작하는 뿌듯함과 자긍심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제 본격적인 한글의 탄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종,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밀본 정기준과 사대부들의 팽팽한 대결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한편 한글의 탄생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뿌리깊은 나무' 드라마는 지난번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