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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7 : 조선의 역사 39 (세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497 : 조선의 역사 39 (세종실록 7)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3. 세종의 가족들
세종은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정비 소헌왕후 심씨가 8남 2녀, 영빈 강씨 1남, 신빈 김씨 6남, 혜빈 양씨 3남, 숙의 이씨 1녀, 상침 송씨가 1녀를 낳았다.
소헌왕후 심씨(1395~1446년)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을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대국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다.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렸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 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이 군구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났다. 결국 태종의 왕실 외척 말살의도에 따라 심온은 이 사건의 괴수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한마디로 말 한 마디가 가문의 멸문지화를 초래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조정의 논의가 있었으나, 세종의 반대와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비 사태는 면하였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가 그들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씨의 소생이 화의 1명, 신빈 김시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소헌왕후 소생의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이들 중 수양은 <문종실록>과 <세조실록>에서 다르고 정비 소생의 나머지 여섯 아들의 삶을 아래에 약술한다.
안평대군(1418~1453년)
1418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사거간, 매죽헌 등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양대군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점차 점차 조저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하였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서풍은 원나라의 문인인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광주 구영릉터에 있다가 현재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옮겨 놓은 '세종대왕 영릉신도비'의 비문이 대표적이다.
임영대군(1419~1469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구이며, 자는 헌지이다. 1428년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1445년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 제작을 감독하였고, 1450년 문종 1년에는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광평대군(1425~1444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의 딸고 결혼하였으며, 그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사서삼경>,<좌전> 등에 능통하엿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첯 번째 소생인 방번의 봉사손(가문의 후계를 잇는 것)으로 입양되었다. 이듬해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교화를 위해 한양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최근 반송사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도 등장하여 세종의 한글창제에 기여하는 역활을 하다가 정도전 후손 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픽션으로 극화하여 나왔다.
금성대군(1426~1457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해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 번째 아들인 세자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 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여 장악하자 이에 반발하다 삭녕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위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이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 정조 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평원대군(1427~1445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째 아들로 이름은 임, 자는 진지이다. 1434년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되고 1437년 종학에 입학, 호군 홍이용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갑자기 죽었다. 광평대군이 죽은 다음해 닥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으며,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종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현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영응대군(1434~1467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통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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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불행한 가족사
이 글은 『世宗實錄』23·24권, 세종 6년 2월 25일부터 4월 15일 사이에 기록된 열여섯 개의 기사와 『世宗實錄』32권 세종 8년 4월 12일의 기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슬프다, 연약한 여식이여!
내 기도가 모자라서 인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네 목소리, 얼굴은 눈에 어른거리건만 넋은 어디로 갔는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가슴을 치며 슬퍼하노라"
문 앞에 봄이 와 있던 1424년 2월, 어린 딸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나이 스물여덟의 젊은 아비는 한없는 슬픔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연약하였으나 맑고 아름다웠던 딸이 아니었던가! 손을 이끌고 다니며 어루만져 사랑했던 딸이 아니었던가! 아비 이도(李?)는 조회와 시장을 삼일동안 폐하고 그 비통함을 달랬다. 하찮은 병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그녀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딸이며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文宗)의 누이, 정소공주(貞昭公主)였다.
世宗 6年 甲辰 2월 25일
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열 살을 갓 넘긴 세자는 “조물주가 누이에게 긴 나이를 주지 아니함”을 한탄하며 한 탯줄의 간절한 정을 술잔에 담아 “오직 나의 슬픔을 고(告)한다”라고 하였다. 열다섯 나이에 얻은 어여쁜 딸이 혼인하여 집을 이루기를 소망했던 젊은 아비는, 어렸으나 성인(成人)과 같은 품성을 지녔던 딸의 관(槨)에 칠(漆)을 하고 “현철한 아가씨”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는 글을 새겨 함께 묻는 것으로 차마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부녀간의 정을 달래야 했다. 그 해 이른 봄, 세종은 이토록 깊은 슬픔을 안고 있었다.
1418년 6월, 세종은 폐세자인 맏형 이제(李?)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불과 두 달 후에 부왕인 태종과 여러 신하들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여섯 달 전에는 동생 성녕대군이 사망하고 그 해 12월에는 장인 심온이 정치적인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 1년 후에는 큰아버지인 노상왕(老上王) 정종이, 그 다음 해에는 아버지와 불화했던 어머니 원경왕후가, 그리고 그 두 해 뒤에는 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부왕의 상(喪)이 끝나갈 무렵 딸 정소공주가 “넋”이 되고 말았다. 스물두 살의 청년 국왕 이도(李?)는 즉위 후 십여 년 동안 상중이었는데 이 상황은 공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집안의 일”이기도 하였다. 육선(肉膳)을 즐기고 풍채가 좋았던 세종이었지만 연이은 국상(國喪)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도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뿐이던가,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외가(外家)와 처가(妻家)로 인한 어머니와 아내의 불행한 삶이 세종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무거운 가족사(家族史)의 끝자락에 일어난 어린 딸의 죽음은 “차마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프고 아린 것이었다. 세종으로 하여금 지극한 효자이게 하였으며, 다정한 지아비이도록 그리고 두터운 정으로 어루만져 사랑하는 아버지이게 한 세 여인의 삶은 온전히 다사롭지 못했다.
공주는 1424년 2월 25일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나 국상(國喪)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시신은 다음 날 광연루(廣延樓)의 서문으로 나가 어려서 자란 이맹균(李孟畇)의 집에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그 해 4월 경기도 고양현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 지석(誌石)을 묻고 묘표를 세워 장사하였으니 일찍 생을 마감한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묘소 옆이었다. 이년 뒤 망자와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담제(?祭)를 지내며 세종은 딸을 보내는 마음을 제문에 담았다.
“부녀간의 정은 언제나 변할 수가 없으니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이 어찌 변할 리가 있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이었는데
세월이 바꾸었어도 생각은 더욱 간절하구나.
이제 담제일이 닥치니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구나”
재위(1418-1450년) 기간 동안 많은 상(喪)을 치른 세종이었으나 군왕으로서의 공적인 슬픔이 아니라 어린 딸의 죽음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청년 이도(李?)의 개인적인 슬픔이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된 적은 없었다. 세종은 세월이 여러 번 바뀌어도 딸의 모습을 잊지 못하였으나 뒷날의 사람들은 그의 슬픔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1938년, 성녕대군과 정소공주의 묘역 일대는 일제에 의해 농장으로 개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소공주의 묘를 비롯한 조선 초기 왕족의 묘들은 무참히 파괴되어 지금의 고양시 원당리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한꺼번에 이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온전히 지켜지지 못한 부장품들은 허망하게 산일되었으니, 『世宗實錄』23권 6년 3월 23일에 “아아, 슬픈 일이로다”라고 탄식하며,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고 예문관 제학 윤회(尹淮)가 찬(撰)한 그대로 새긴 묘지(墓誌)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공주의 태(胎)를 넣었던 것으로 알려진 네 귀가 달린 두 개의 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그림1, 그림2).
덧없어라! 허망하여라!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건만, 오늘 나에게는 오래전 스물여덟 청년 세종의 안타까운 슬픔을 기릴 곳이 없다. 박물관 유리장 너머에 마치 열 세 살의 어린 그녀처럼 서 있는 이 항아리를 오롯이 그녀인양 바라보며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가를 서성인다.
- ▲ <그림1>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상감초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그림2> 정소공주 묘 출토 분청사기인화문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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