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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5 : 조선의 역사 37 (세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495 : 조선의 역사 37 (세종실록 5)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1.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아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 박성수씨의 양녕대군에 대한 글을 참고로 옮긴다.
역사인물 재조명
풍운아인가 처세의 달인인가
양녕대군
양녕대군은 위인이나 기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3대의 군주를 거치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수모와 인내와 집념의 한평생이었다. 그래서 양녕처럼 모호한 역사 인물은 드물다.
양녕(讓寧)은 태종 방원의 장자로서 일찍이 세자자리에 앉아 있다가 마땅히 왕위를 물려받았어야 하는데 태종의 강압으로 임금 자리를 동생 충녕에게 양보하고 편안한 일개 사인으로 여생을 마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녕이란 글자 그대로 「양보해서 편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과연 양녕은 왕위계승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정치적 야욕에 못 이겨 눈물을 머금고 왕위 문턱에서 쫓겨난 것인지 역사가들은 아직도 정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세종이 유덕하여 태종의 마음이 차츰 세종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양녕이 일부러 미친 척 했다는 설을 믿고 있다.
지금까지 양녕대군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설이 있어왔다. 양녕은 처음부터 임금 되기는 틀려먹은 자유분방주의자였다는 게 그 하나다. 나쁘게 말해 방탕아였다는 것이다. 둘째 설은 처음에는 열심히 군왕의 도를 닦았으나 얼마 뒤 태종의 마음이 셋째인 충녕에게 기우는 것을 보고 갑자기 탁질양광(托疾佯狂), 즉 정신병을 핑계해 미친 척 연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양녕이 처음부터 망나니였던 것은 아니다. 커서 아버지 눈치를 보니 자기가 왕위에 오르기는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처세를 바꿨다는 증거가 곳곳에 발견되기 때문이다.
양녕은 열살에 세자가 되었는데 벌써 그때부터 공부는 안하고 사냥에만 정신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동생들 특히 충녕이 커가면서 형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게 되니 양녕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증거가 더 많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 가운데 단종이 가장 불쌍했다. 양녕은 그보다 덜 억울하기는 했으나 역시 왕위를 아우 세종에게 빼앗겼다는 점에서는 단종 못지않은 설움을 맛보아야만 했다. 가슴속 깊이 어쩔 수 없는 울분과 허탈감을 묻어 두고 일생을 살아야만 했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찌 됐건 양녕은 처음부터 임금자리에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망난이짓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 타당하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태종 7년 양녕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고 이듬해 할아버지 태조가 죽는 그 무렵부터다. 양녕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아주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다.
첫째,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
둘째, 양녕과 동생 세종의 관계에 대해서 - 양녕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 외방으로 쫓겨났다. 양녕이 서울에서 쫓겨나 경기도 이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세종이 몰래 양녕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차례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세종이 여러번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형제간의 지극한 정의가 이를 데 없었다』
양녕이 물러난 뒤 세종이 형을 미워하거나 의심했다면 아무리 세종이 현군이라 할지라도 영낙없이 약사발을 받아 목숨을 잃었을 것인데 세종의 치세 32년간을 용케도 살아 남았다. 세종의 덕인지 아니면 양녕의 피나는 노력, 즉 미친 척한 행실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슬아슬하게 세월을 넘겼다.
셋째, 양녕과 조카 세조의 관계에 대해서. 동생 세종은 54세까지 밖에 살지 못하고 죽고 양녕은 그보다 15년이나 더한 69세까지 살았다. 그러다 보니 말년에 또다시 수양대군(세조)의 골육상쟁극을 목격하게 된다. 이 연극에서 양녕은 단순히 객석에 앉아 구경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버지 태종 못지 않게 의심이 많고 권력욕에 불타는 조카 수양대군의 무자비한 왕위 찬탈극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는 「작은아버지가 단종편을 든다」는 의심을 사 죽게 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즉 양녕은 사생이 달린 연극 무대 한복판에 두 번이나 올라서게 된 것이다. 양녕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비열하리만치 조카 세조에게 아첨하면서 목숨을 보존한다. 그런 말년의 양녕을 보고 치사하다 혹은 불쌍하다는 말들이 있었다.
『세조가 등극하게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임을 당하였으나 양녕은 능히 지혜로 스스로를 보존하였고 세조 또한 양녕을 의심하지 않고 높이 대우하였으니 사람들은 양녕이 임금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칭찬하지 않고 도리어 끝까지 목숨을 보전한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자해필담』은 이상과 같이 칭찬인지 조소인지는 몰라도 아리송한 말을 하고 있는데 어찌 되었건 양녕대군은 위인이나 기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분명한 것은 3대의 군주를 거치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수모와 인내와 집념의 한평생이었다. 아버지 태종에게는 심지어 짐승 같은 놈이란 욕까지 먹었고 동생 세종 때는 그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모함을 이겨내야만 했다. 또 조카인 세조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하면서 늙은 목숨을 보존하여야 했다. 양녕이 69세까지 장수하였다고는 하나 결코 편안한 일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녕과 세종의 차이
먼저 아버지 태종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태종은 양녕을 10세때 세자로 책봉했는데 뒷날 그때 일을 다만 양녕이 큰아들이니까 그렇게 했을 뿐이라 해명하고, 충녕 즉 세종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은 양녕의 행실이 광패(狂悖)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그 책임을 양녕 자신에게 돌렸다.
『양녕은 하는 짓이 광패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이렇게(세자를 폐하게) 되었다. 세종은 내가 아주 어려울 때, 정도전에게 몰려 위험한 때에 낳았다. 그래서 내가 안아주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여 무릎에서 떼어 놓지 아니하고 사랑하기를 가장 두텁게 하였다. 그러나 양녕을 세자로 세우게 된 것은 다만 그가 맏아들이라 할 수 없이 그랬을 뿐이요 추호도 다른 뜻이 없었다』
태종의 이 말은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뒤 세종과 양녕을 앞에 두고 한 말이니 거짓없는 술회였으리라 믿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종을 사랑했으나 세자는 법에 따라 맏아들 양녕에게 돌렸으니 아비로서는 공정했다는 것이다. 다만 죄는 양녕의 행실에 있다고 태종은 강조했다.
태종이 양녕을 밉게 보기 시작한 것은 세자로 책봉한 뒤부터였다. 양녕은 세자로 있을 때 성색(聲色, 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세자가 글읽는 공부방을 서연(書筵)이라 했는데, 양녕은 서연 마당에 새덫을 놓고 새가 날아오기만 기다렸다. 선생과 마주 앉아 공부할 때도 새가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렸고 걸리면 책을 보다가도 급히 뛰어 내려 갔다.
또 어느날 선생이 궁안에 들어서는데 양녕이 매 부르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선생이 양녕을 나무라기를 『방금 매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저하께서 하신 짓이지요.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셔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흉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양녕은 시치미를 떼고 선생에게 『평생에 한번도 매를 보지 못했는데 어찌 내가 매소리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하였다. 선생은 기가 막혀 『사냥할 때 팔에 걸고 토끼를 쫓는 것이 매올시다. 저하께서 보지 못했을 리 있겠습니까』하였다.
선생은 계림군 이래(李來)였는데 양녕에게 엄격했다. 그래서 양녕이 선생 이래를 마치 원수같이 여겨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꿈속에서라도 이래가 보이면 그 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양녕이 또한 활을 잘 쏘았던 것도 사실이다. 태종은 대궐 안에 감나무를 심어 놓고 가을에 감이 달리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자주 까마귀가 날아와서 찍어 먹는지라 신하들에게 활 잘 쏘는 사람을 찾아 까마귀를 쫓으라고 시켰다. 좌우에서 임금을 모셨던 무사들이 많았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세자라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태종은 세자가 미워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세자가 활을 쏘아 까마귀를 맞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가 공부는 아니 하고 활쏘기나 잘한다고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또 양녕이 서예를 몹시 즐겼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김호생이라는 선비가 붓을 잘 만들었다. 그래서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어 드렸는데, 어느날 내시에게 붙잡혀 어전에서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하는지라 잡는대로 혹 귀양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의 경우를 듣고 보니 오히려 기특했다. 그래서 김호생에게 『네가 궁궐에 들어올 수 없는 외인으로서 세자궁에 드나들었으니 죄가 크나 세자의 붓을 만들어 바쳤다고 하니 기특하다. 그 재주로 과인의 붓도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고 명하면서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으로 근무하게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양녕은 서예에 능하였다. 남대문의 액자에 쓰인 「숭례문」 석자가 바로 양녕의 글씨라 한다. 그래서 세종은 양녕을 시기라도 하듯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글을 읽는 것은 임금에게 유익하나 글씨를 쓰고 글 짓는 것 따위의 일은 유의할 필요가 없다(讀書有益 如寫字製作 人君不必留意也)』
세종은 글을 읽는 데만 열중했다. 한 책을 반드시 백번 읽었다 하니 이른바 백독주의(百讀主義)였다. 그러나 『좌전(左傳)』이나 『초사(楚詞)』 같은 책에 이르러서는 백번에 백번을 더해 이백독을 했다고 한다. 일찍이 세종이 어려서 몸이 불편한데도 글읽기를 멈추지 않아 병이 점점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에게 세종의 거처에 있는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라고 명했다. 그때 내시는 병풍 뒤에 『구소수간(歐蘇手簡)』이란 책 한권이 남아 있는 것을 모르고 물러났다. 그래서 세종은 남은 이 책 한 권을 몰래 천백번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로 볼 때 양녕은 글 읽는 것을 게을리 대신 글씨를 잘썼고 세종은 반대로 글 읽는데 힘쓰고 글씨 쓰는데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 태종은 당연히 세종을 임금감으로 낙점했을 것이다. 우리도 어릴 때 『글씨 잘 쓰면 면서기 밖에 못한다』는 어른들 말을 귀따갑게 들었잖은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이 된 뒤에도 세종처럼 경연(經筵)에 열심히 나온 임금이 없었고, 경연에 참석한 신하로 식은땀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한번 읽은 것은 잊은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라. 그러나 글씨는 쓰지 마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양녕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마음이 셋째 아들 충녕에게 기울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바로 아래 동생 효령은 너무 순진해서 아버지의 눈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매일 소리내 글을 읽었다. 이런 효령이 너무 안타까워 하루는 양녕이 효령의 공부방을 찾아 갔다. 양녕은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효령은 놀라서 모든 공부를 집어 치우고 가야산 밑 해인사로 들어갔다. 중이 된 효령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북이라 하고, 미친 듯이 치는 모양을 효령 북치듯 한다고 했다.
그러나 태종은 적어도 태종 7년 어린 양녕을 명나라 사신으로 보낼 때까지는 어떻게든지 양녕을 차기 임금으로 키우려 했다. 양녕을 머나먼 명나라로 보내는 것은 분명 군왕학(君王學)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도 태종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명황제까지 양녕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는다고 충고한 것처럼 기록돼 있다. 세자 양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것이 양녕의 나이 15살 때 일이었다. 요즘 같으면 중학생 정도였으니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서 온 어린 사신을 보았을 때 귀엽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황제가 양녕에게 시를 지어 내리기를
『조선의 왕자 제(示是)가 조공 닦으러 만리길을 찾아오니 나이는 불과 열다섯이나 인재가 될 만하다. 글 읽고 도를 닦아 스스로 버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집안 일을 훼손하지 말라. 예부터 화복(禍福)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높은 산도 갈리고 바다도 옮겨지나니 조심하고 조심하라』고 훈계하였다.
이 시의 내용이 마치 양녕의 장래 운명을 알기나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은 훗날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때 명나라 황제는 영락제(永樂帝)였는데 조선을 마치 종속국 보듯 얕잡았다.
『패수(浿水) 동쪽 땅은 옛날에 중국땅이다. 그동안 너희 나라는 정성껏 중국을 섬기고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하여 나라 안이 평안하다고 들었다. 피리불고 북치고 날로 즐겁기도 하니 들에는 응당 소도둑이 없으리라. 그러나 짐이 볼 때 압록강 물은 마치 잔에 부은 술과 같고 마한(馬韓)의 산들은 나지막한 언덕이로다. 마음가짐을 금석같이 하라. 교만하고 방자하면 영원히 끝날 것이다』
양녕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곧 이어 태조의 외척 사냥인 「민무구 형제 사건」이 일어난다. 양녕은 이 사건에 연루될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못본 체한다. 민무구 사건은 뒷날 큰 사화(士禍)를 불러 일으키는 외척문제의 시발이 되는데 태종은 이를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고 그 다음에는 세종의 외척인 심씨의 발호까지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그러나 민무구 사건은 양녕대군과 관련하여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많다.
의문투성이 민무구·민무질 사건
외척 민무구의 옥사(獄事)는 태종 7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2년이나 끌다가 마침내 민씨 두 형제와 그 일당이 처형되는데 그 죄명이 몹시 애매모호하여 사건 처리가 2년이나 지연됐고, 그동안 왕이 몇번이나 노하여 대사헌 박은과 그 밑의 장령(掌令) 신간 등 고위 관리들이 귀양가거나 강등됐다. 대사헌이라면 요즘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이다.
외척 민무구와 민무질 두 형제의 사건은 당초 태종 7년 가을에 공신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그 때 당연히 참석해야 할 박은이란 공신이 병을 핑계하고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여 체포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박은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대간들은 즉시 그를 옥에 가두면서 『박은은 민무구 형제 일당』이라 규탄했고, 태종은 이듬해 박은을 일계급 강등하고 신간은 먼 섬으로 유배하는 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해에도 매듭을 짓지 못해 이듬해인 태종 9년에 가서야 비로소 종결되는데 죄명은 반역죄였다. 임금님의 처남에 해당하는 민무구 형제가 억울하게 처형당하게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목을 움츠렸다. 이때 민무구 일당이라 하여 걸려든 반역죄인은 동생 민무질 외 여섯명으로 민무구와 무질만 일시 먼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나머지 여섯명은 모두 즉각 처형했다.
이처럼 태종이 처가 식구요 중전 민씨에게는 친동생인 민무구 형제를 잡아 분명치 않은 죄명으로 귀양 보내게 되자 중전 민씨는 고민 끝에 병상에 눕게 되었다. 중전이 생각할 때 동생들로 말하면 그동안 태종을 도와 일해 왔고, 특히 방간의 난 때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니 단순한 외척이요 동기(형제)를 넘는 혁명동지였던 것이었다. 중전이 앓아 눕자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차 대궐에 들어 갔다. 이때 두 형제가 양녕대군에게 하소연을 했다. 양녕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사이였다.
『세자! 큰 외숙 무구와 무질이 억울하게도 반역죄에 몰려 귀양가게 되었는데 세자도 아다시피 이게 될 말입니까. 우리가 모반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세자는 어릴 때 우리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집 식구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요번에 딱 한번 세자가 힘을 써서 두 외숙이 귀양살이 가지 않게 해주시오』
그러나 양녕은 외숙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 아니라 외가를 비난했다.
『외숙댁 가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태종의 귀에 들어갔고 태종은 더욱 화를 내 민무구 형제에 대한 국문을 계속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민무구 형제의 죄는 진실로 크지만 장모 송씨의 마음을 생각해서 사형에 처하지 말고 유배지에 가는 길에 중도부처(中途付處)토록 하라』
중도부처의 어명은 형을 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약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민무구 형제의 사건은 매듭지어졌으나 지금까지도 의문투성이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죄가 반역죄였다면 삼족을 멸하는 엄벌을 내렸어야 할 터인데도 처자식을 유배하는 것으로 끝났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단지 민무구 형제가 교만하고 방자했다면 두 형제로 끝나고 다른 여섯명은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해괴한 것은 외숙에 대한 양녕대군의 너무나 박절한 언행이었다. 다른 말로도 외숙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어머니인 중전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민씨 가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외가를 모독했을까. 양녕이 이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입지가 궁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 이유와 관련해, 양녕대군과 두 외숙 사이에 오간 대화는 옆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주고 받은 것이었는데도 어떻게 새어나가 태종 귀에 들어갔을까? 이 점 역시 수상하다. 양녕이 스스로 이 말을 흘린 것이 아닐까. 만일 누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더욱 양녕이 그것을 의식해서 외숙에게 심한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녕이 이 사건의 전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건 자체가 태종의 외척 길들이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만큼 어릴 적에 외가에서 자란 자신에게 불똥이 튀리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역죄로 기소됐으니 취조는 가혹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여섯명 가운데 부원군 이무(李茂)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끝내 자복하지 않자 아들 공유를 데려다가 형장 90대를 쳤다. 그러나 아들도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이것은 취조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죄를 숨기는 것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아들이 아비의 죄를 위해 자복하겠느냐. 그만 두라』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결코 태종의 성품이 인자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조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민무구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둘째 증거로 무구와 처남 남매간이라 하여 벼슬을 빼앗기고 양주 땅에서 14년간이나 야인 생활을 한 노한을 들 수 있다. 노한은 처남 남매간이라 하여 별다른 증거도 없이 벼슬을 버리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특사를 내리는데 이 해가 바로 태종이 승하하는 해였다. 바꾸어 말해서 죽음을 앞두고 하나라도 억울한 사람을 살려주고 눈을 감으려 했던 것이다.
양녕이 폐세자된 진짜 이유는
양녕이 대궐을 빠져 나간 것은 태종 9년의 일이었다. 열여섯살 때 일인데 민무구의 사건이 있은 다음 해였다. 이때 태종은 이렇게 양녕을 꾸짖었다.
『양녕의 행동은 짐승과 같으나 모반 하려는 죄는 절대 없으므로 가까운 곳에 두려 했는데 다시 이런 일을 저지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다음부터 일을 저지르면 이 애비가 상관하지 않겠다. 법대로 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이런 최후 통첩을 한 뒤에 태종은 양녕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달아난 뒤에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충녕 또한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만일 네가 충녕이었다면 충녕처럼 걱정했겠는가』
태종이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위할 때 그 교서(敎書)를 보면 양녕이 폐위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9년 뒤인 태종 14년의 장인 김한로 사건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진 사람으로 세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어 세자를 바꾸는 것도 국가의 당연한 법이다. 내가 일찍이 큰 아들 제(양녕)를 세자로 삼았더니 관을 쓸 나이(15세)가 되어도 글읽기(學文)를 좋아하지 않고 노래와 여자(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것이 나이가 어린 탓이라 좀더 나이가 들면 고쳐지리라 생각했었으나 나이가 20이 지나서는 도리어 뭇 소인들과 사통(私通)하여 방자하게도 옳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지난 해 봄에 일이 드러나서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데 양녕이 그 잘못을 글로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내게도 고하였으므로 진심으로 뉘우치는가 싶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또 다시 간신(양녕의 장인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서 죄를 범하니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자지간의 정에 못이겨 양녕은 그냥 두고 김한로만 내쫓았었다. 그런데도 양녕은 마음을 고치기는커녕 원망과 노여움을 품고 분연히 글을 올리니 그 말이 심히 거만하고 무례하였다』
김한로 사건은 외척 사건인데 사건 내용은 양녕의 장인 김한로가 세자궁에 여자를 들여 놓았다는 지저분한 사건으로 결국 아들과 함께 전남 나주로 귀양가게 된다.
그러나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하려 할 때 청백리의 대명사 황희(黃喜) 정승이 반대했다. 이 일 또한 양녕의 세자 폐위 사건의 의문점이다. 보통 반대한 것이 아니다.
『임금의 맏아들은 나라의 대들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쉽게 그것도 근 15년이나 왕위 계승자로 계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폐위하는 것은 부당하다』
태종은 진노하여 황희를 외방으로 내 쫓아 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시켰다. 그런데 이때 단 한 사람 유정현(柳廷顯)이 태종에게 찬성했다.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던 유정현이 온 조정 대신이 반대하는 가운데 홀로 찬성해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한 뒤 일약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황희 정승은 태종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6년 뒤 태종이 다시 그를 불렀다. 모처럼 서울에 나타난 황희 정승의 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황희 정승이 본시 그렇게 청렴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별로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고 하며, 태종은 즉시 그를 예조판서로 임명했다고 한다.
태종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양녕은 이미 장성하였으나 행실이 좋지 않아 왕위 계승자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부득이 그를 대궐 밖에서 살도록 하고 셋째 아들 충녕은 자못 그 성품이 총명하여 효도하고 우애하며 학문을 좋아해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촉망하니 왕위 계승자로 세우기로 하였습니다』고 보고하였다.
세종과의 관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뒤 세종 4년에 승하하였다. 그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주를 마셨다. 이천군수가 이날 소주를 마신 동네 사람들을 잡아다 벌을 주었는데 양녕은 화가 나서 세종에게 글을 올려 『이천군수를 처벌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형제간 정의가 끊길 것이오』라고 위협했다. 세종은 묵묵부답했다.
이처럼 양녕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되어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세종은 서울 동쪽 대궐 밖까지 나가 양녕을 맞아 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이때 대간들이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동생이 형에 대해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데 나쁠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만일 차례로 말하면 바로 내 자리가 양녕이 앉아야 할 자리 아닌가. 그런데 양녕 형님은 지금 시골에서 적적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네. 더구나 일반 백성의 경우라도 형제 사이에는 잘못한 것을 서로 덮어 주고 잘한 것을 드러내줄 뿐 아니라 뇌물을 써서라도 끌어내주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일국의 임금으로서 형제간에 백성만 못한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 경은 이 뜻을 알아서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라. 나는 형을 서울로 모셔서 만나 보도록 하겠다』
양녕대군이 한 번은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는데 서울을 떠날 때 세종과 작별인사를 했다.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십시오』라고 당부하고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가는 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다. 그런데 평양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이 여인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고 그날로 동침하고 나서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 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밤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냈다. 세종이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전혀 모르고 유유히 서울에 돌아와 세종을 알현했다.
세종:잘 다녀 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은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이 없습니다.
세종: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 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만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세조와의 관계
양녕대군이 만년에 조카인 수양대군의 찬탈 음모에 동조하여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는데 이 점에 대한 해석 또한 구구하다.
수양도 양녕처럼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나 울적했던 처지라 큰아버지의 불운을 동정했을 것이고, 양녕 또한 자기 모양으로 한때 신세가 가엾게 된 수양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을 것이다.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라 왕위는 맏형인 문종에게 돌아갔고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나이 39세에 죽게 되니 왕위는 어린 조카 즉 문종의 맏아들 단종(나이 18세)에게 넘어갔다. 이에 수양은 할아버지인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의 능자리인 광릉내까지 빼앗았으니 태종보다 더한 찬탈자였다. 단종은 세조에게서 약사발을 받고 영월 땅에서 죽었다.
그런데 양녕은 왜 수양이 하는 짓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동의했을까. 좋게 해석하면 종묘 사직을 위해 수양의 집권을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 그는 무서웠다. 그리고 한편 통쾌했다. 동생인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원한이 가슴에 맺혀 있었던 그로서는 세종의 아들이 세종의 손자를 죽이는 골육상쟁을 내심 통쾌하게 생각하고 일종의 복수극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양녕은 수양을 보고 놀랐다. 아버지 태종을 꼭 닮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공포에 떨었다. 수양이 왕위에 오른 뒤 양녕은 자주 대궐에 불려 나가 임금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 자리에서 양녕은 비굴하다 할 정도로 임금에게 아첨하고 있다.
세조:삼촌, 임금으로서 저의 위상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십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제 자신은 저 옛날 당나라 태종과 맞먹는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양녕:전하, 당태종보다 훨씬 위입니다. 당태종은 학자를 얕잡아 보고 선비의 갓에다 오줌을 누지 않았습니까. 전하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문무를 고루 존중하셨습니다.
세조:그러면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거절하는데 있어 저와 당태종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고 보십니까.
양녕:그 점에 있어서도 한 수 위이십니다. 당태종은 유능하고 충실한 장온고라는 신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그런 짓을 아니 하셨습니다.
세조는 당태종을 마냥 숭배했다. 당태종은 중국의 역대 임금 가운데 으뜸가는 임금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과장된 사필(史筆)의 농간이었다. 고구려를 치다가 크게 패한 임금이기도 하였다.
산안개 물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
언젠가 양녕이 효령에게 웃으면서 한 말이 있다. 『나는 평생에 하늘이 복을 내려 주셔서 고생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효령 자네 덕으로 부처의 형이 아닌가』
그러나 양녕의 일생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고 온갖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말년에 시 한 수를 지어 자기 일생을 개탄하였다.
『산 안개물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
칡넝쿨에 비친 달빛을 등불로 삼는도다.
외로운 바위 아래 홀로 누워 보니
오직 탑 한층이 있을 뿐이로다』
왕좌를 포기하고 일생을 살아온 자기 독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로운 탑 일층, 바로 이것이 양녕대군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은 양녕대군에 대한 태종의 처사를 일종의 왕위찬탈로 보고 있다. 매우 엄중한 비판인데 만일 그렇다면 태종은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선배인 셈이다.
태종은 매우 복잡한 성품의 인물로서 평소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왕위를 차지하는데 몰두했다. 왕위에 오른 뒤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 못한 애비의 한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했는데 양녕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또 자신의 집권과정에서 생긴 본의아닌 살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그가 왕위에 오른뒤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비가 오질 않았다. 정승들이 그때마다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태종은 『모두 내 책임』이라면서 스스로 양위하겠다고 몇번이나 허풍을 떨었다. 그러나 신하의 만류를 핑계로 거듭 눌러앉았다. 그러면서 양녕과 외척 민씨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세종에게 양위한 뒤 세종의 처가 심씨 일가를 박살낸 것도 태종의 짓이었다.
양녕대군이란 이름은 처음부터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처음 이름은 복이 많다는 뜻의 제였다. 제가 10세 때 세자가 되고 24살 때 세자자리를 빼앗기면서 양보한다, 사양한다는 양(讓)자를 붙여 양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사양한 일도 없고 안녕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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