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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3 : 조선의 역사 35 (세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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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3 : 조선의 역사 35 (세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2. 12. 02:31

 

 

 

 

한국의 역사 493 : 조선의 역사 35 (세종실록 3)

 

 

 

 

 

 

제4대 세종

 

생애 후반

가정의 불행

재위 초반에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임질(현재의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최후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세종의 6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세종의 능 (영릉).

 

사후

1450년(문종 1)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諡號)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마는,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美德)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366) 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聰明)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367) 를 높이고 종(宗)368) 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人倫)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包容)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調和)되니, 문치(文治)는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수방(殊方)369) 에서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中國)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恩寵)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貞符]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일조(一朝)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370) 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371)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追崇)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의령(懿靈)372) 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玉冊)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홍명(鴻名)373) 을 누리고, 순희(純禧)374) 를 거듭 주셔서 무궁(無窮)한 보조(寶祚)375) 를 말없이 도와주소서.”【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237면 문종실록 1권, 즉위년 5월 21일(갑자)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세종 사후 정세

세종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세자이자 장남인 문종이 보위를 이어받은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장손인 단종이 12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문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궁궐에는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나 왕대비가 없는 상황에 문종이 유지를 남겼던 신하들에게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양대군등 왕족들의 세력이 팽창해 가며 정치적으로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단종의 재위 1년 만인 1453년에는 숙부이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세력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종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여 활약하였던 많은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국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단종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조정에서 제거되어 유배되고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 유배 후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뒤를 이어 금성대군 사건을 일으켜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과 그 세력들을 다시 한번 숙청한다.

 

결국 단종은 보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형식상의 선위를 하면서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이어 1456년에는 일명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 복위 사건에 연루된 6명과 이에 관련된 70여 명을 포함하여 조정에서 또 한 번 대숙청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주도하였던 세력의 공격으로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영월에 귀양을 가서 17세에 죽었다. 이어 금성대군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부터 선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불과 5년 만에 단종을 지지했던 왕족들과 세종의 치세에서 학자와 관료로써 세종이 남긴 많은 업적들에 큰 활약을 하고, 단종을 지지한 많은 관료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가족 관계

  • 부: 제 3대 태종
  • 모: 원경왕후 민씨
  •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정소공주(貞昭公主)
    • 왕세자 향(王世子 珦) - 문종(文宗)
      • 왕세손 홍위(王世孫 弘暐) - 단종(端宗)
    • 정의공주(貞懿公主) 하가(下嫁) 연창위 안맹담(延昌尉 安孟聃)
    •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 세조(世祖)
    •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 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강석덕의 딸)
  • 후궁 : 신빈 김씨(愼嬪 金氏)
    • 계양군 증(桂陽君 璔)
    • 의창군 공(義昌君 玒)
    • 밀성군 침(密城君 琛)
    • 익현군 연(翼峴君 璭)
    • 영해군 당(寧海君 瑭)
    • 담양군 거(潭陽君 璖)
  • 후궁 :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 한남군 어(漢南君 ?)
    • 수춘군 현(壽春君 玹)
    • 영풍군 전(永豊君 瑔)
    • 옹주(翁主) : 일찍죽음
    • 옹주(翁主) : 일찍죽음
  •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 후궁 : 귀인 최씨(貴人 崔氏)
  • 후궁 : 숙의 조씨(淑儀 曹氏)
  • 후궁 : 소용 홍씨(昭容 洪氏)
  •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 정안옹주(貞安翁主) 하가(下嫁) 청성위 심안의(靑城尉 沈安義)
  • 후궁 : 상침 송씨(尙寢 宋氏)
    • 정현옹주(貞顯翁主) 하가(下嫁) 영천부원군 윤사로(鈴川府院君 尹思路),
  • 후궁 : 사기 차씨(司記 車氏)
    • 옹주(翁主) : 일찍죽음

 

관련 대상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만원권.

 

 

 

 

 

세종의 동상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 인천국제공항이 지어지기 전의 가칭은 세종공항이었다.
  • 세종과학기지남극 킹조지 섬에 있는 과학 기지다.
  • 세종대왕상유네스코가 제정한, 문해율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 세종로(世宗路)는 도로명이다. 서울특별시 세종로 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교보 타워, 세종문화회관, 정부중앙청사를 지나 광화문 앞까지 이르는 종로구에 있는 도로이자 법정동의 명칭이다. 세종문화회관은 세종로에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 21세기 세종계획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국립국어원이 마무리한 중장기 국어 정보화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국어 전자 사전 개발 사업, 한국어 말뭉치 개발 사업, 한민족 언어 정보화 사업, 전문 용어/문자코드 표준화 사업, 글꼴 개발 사업, 정보화 인력 양성 사업 등 여러 하위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최종 결과는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되었다.
  •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는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과 남면 일대에 건설 중인 행정중심복합도시이다.
  • 세종 솔로이스츠는 문화 단체로 줄리어드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강효 교수의 책임 아래 운영되고 있는 앙상블 단체이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문화 단체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며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DDG-991 세종대왕은 대한민국 해군의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급 구축함의 1번함이다.
  • 세종과학고등학교는 대한민국의 과학고등학교이다.
  • 세종고등학교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소재의 고등학교이다.
  • 세종대학교는 대한민국의 4년제 사립대학이다.
  • 세종초등학교는 대한민국의 사립 초등학교이다.
  • 세종관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이다.
  • 7365 세종(세종별) 일본 아마추어 천문가 와타나베 가즈오(渡辺和郎)가 1996년에 발견하여 도쿄 천문대학 교수 후루가와 기이치로 박사의 자문을 받아 세종대왕의 천문학의 업적을 기려 세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기타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1년 ~ 1963년 사용하던 1000, 500환 지폐의 도안.
  • 1965년 ~ 1985년 사용하던 대한민국의 1백원권 지폐의 도안
  • 1972년 이후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의 도안.
  • 대한민국의 기념일 한글날: 한글을 반포하였으리라 여겨지는 날을 한글 창제를 기리는 날로 삼음.
  •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로 삼음.

 

건강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후대의 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당뇨를 앓았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일화

조선 태종이 세종이 어렸을 때 독서를 멈추지 않자, 건강을 염려하여 세종의 책을 모두 숨겨 버렸다. 이 때 세종이 책이 없음을 보고 황급히 자신의 방을 뒤지다가 병풍 뒤에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을 읽었다고 한다.

 

하루 일과

오전

  • 5시 ~ 5시 30분 : 기상
  • 5시 30분 ~ 6시 : 조회
  • 6시 ~ 7시 : 공부 및 독서
  • 7시 ~ 8시 : 아침 식사
  • 8시 ~ 9시 : 문안 인사
  • 9시 ~ 11시 : 국가 회의
  • 11시 ~ 12시 : 점심 식사

오후

  • 12시 ~ 1시 : 국가 회의
  • 1시 ~ 3시 : 공부 및 독서
  • 3시 ~ 5시 : 상소 검토
  • 5시 ~ 6시 : 숙직 관리 확인
  • 6시 ~ 7시 : 공부 및 독서
  • 7시 ~ 8시 : 저녁 식사
  • 8시 ~ 9시 : 문안 인사
  • 9시 ~ 10시 : 공부 및 독서
  • 10시 ~ 11시 : 구언
  • 11시 ~ 12시 : 취침 준비

 

기타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 정실인 소헌왕후는 세종의 고모부인 심종의 조카딸이다. 심종은 심온의 동생이다.
  • 그의 첫번째 후궁은 처조카인 영빈 강씨심온의 외손녀이며 소헌왕후의 이종 조카딸이자 동서 강석덕의 딸이다. 소헌왕후 소생 자녀들과는 이종사촌이면서 서모, 적자 관계가 된다.
  • 세종대왕의 세번째 동서인 노물재는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심온의 세 번째 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는 교하 노씨로 우의정 공숙공 노한의 아들이다. 또한 세조 때의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은 그의 이종질이자, 처조카가 된다.심온의 사돈이며 노물재의 아버지인 노한은 세종의 이모부로서, 태종의 장인인 여흥백 문도공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 처남인 심준은 외사촌 매제가 된다. 심온의 장남 영중추원사 심준은 민제의 셋째 아들인 지돈녕부사 여원군 민무휼(閔無恤)의 사위가 된다.
  • 형인 양녕대군의 17대손 이승만조선왕조를 경멸하고 증오하였으나,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丁若鏞),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유독 높이 샀다. 박정희 역시도 조선의 인물 중 세종대왕과 정약용, 충무공 이순신은 유독 높이 평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