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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0 : 조선의 역사 32 (태종실록 12) 본문
한국의 역사 490 : 조선의 역사 32 (태종실록 12)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8. 태종 이방원에 대한 평가
태종은 과연 어떠한 군주였을까? 조선을 개국한 것은 태조 이성계였으나 실질적으로 조선을 탄탄한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은 바로 태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교를 공부하여 고려 시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큰 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역성혁명이론에 동조하였고 친명파와 친원파간에 벌어진 권력싸움에서 상대의 우두머리였던 정몽주를 주살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정몽주의 죽음은 세력의 반전을 가져와 정봉주 일파가 모두 제거되었고 공양왕이 폐위되자 정도전 등 조신들과 같이 이성계를 옹립하여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의 조선 개국에 대한 역활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동복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영민하였고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나라 태종의 '현무문의 난'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후계자로 자리를 확실히 하는 방법을 고밈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이성계의 후계자 자리인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형제라도 과감하게 제거하고 황제자리를 물려받았던 당태종의 일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은 친형인 세자와 동생을 살해하고 대통을 이어받았지만, 이방원은 이복형제인 세자 방석과 정도전 등 일파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성계는 병중이었고 정도전은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거의 실행만 남겨둔 상태였다. 이성계는 왕비 강씨의 집요한 청원과 정도전을 포함한 공신들의 건의만 듣고 후계자를 방석으로 선정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성계와 정도전이 사병을 거느리고 힘을 가지고 있던 방원의 속마음을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기타 왕족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면서 당장 살아있는 이성계의 뜻을 거스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설마하는 마음에 방심하였고 이성계가 살아 있는 한 왕족들의 사병만 혁파되면 왕족들의 힘이 모두 상실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서두른 것이었다.
그러나 방원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병중이라 왕자들이 모두 모여 문안을 하는 가운데 방원은 부인 민씨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빠져나와 바로 사병을 동원하여 먼저 정도전과 그 일파를 모두 참살하였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제거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그 일로 인해 태조의 방원에 대한 진노와 미움이 극에 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힘을 상실한 태조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방원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조는 왜 어린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였을까? 적자 아들들이 수두록하였지만 모두 물리치고 강씨 소생의 서자인 방석을 선택한 배경에는 강씨와 정도전의 의도가 일치하엿기 때문이다. 강씨는 자신이 낳은 방번, 방석을 세자로 책봉되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이미 장성하여 마음대로 조종이 불가한 적자들보나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워 후계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대로 신권위주의 조선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조선을 개국하기전 그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으로 새로국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고 당시 고려 사회의 영웅으로 떠오른 최영과 이성계 중에서 최영은 친원파로 이미 노쇄하였고 우왕의 장인이 된 상태라 그는 최영과 버금가는 영웅이며 친명파로 젊은 이성계를 선택하여 그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였고 그를 내세워 고려 조정을 무너뜨리는 데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배 이후 삼각산에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주변 유생들의 시기와 방해로 그곳을 떠나 당시 동북면에 변경을 지키던 이성계를 찿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무서운 역성혁명론을 이야기 듣고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달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명쾌하게 펼치는 그의 역성혁명론을 듣고서는 차츰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중국의 한나라 장량을 자신에게 비유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조 이성계를 선택한 것이라며 호언망언을 일삼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자만스런 정도전의 망말이 방원에게 전달되자 방원은 정도전의 깊은 속셈을 눈치채고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조선 왕조의 왕권이 유명무실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때를 놓치지 않고 정도전 일파를 불시에 기습하여 일격에 제거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종은 잔학한 살인마였던가 아니면 왕조를 다진 수성의 군주인가?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은 철저한 피의 숙청과 개혁을 통해 한 왕조를 다진 위대한 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개혁에는 기득권층의 반발이 격심하여 피의 숙청이 동반되지 않으면 쉽게 개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오늘날의 우리 생각과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왕권을 살리기 위해서 일어섰고 합리적이지 못한 잘못된 후계자 선정에 분연히 궐기하였다. 만약 실패하면 그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어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재상중심의 조정과 신하들이 전권을 행사하며 왕권을 농단하는 '신권론'을 주창하던 정도전 일파에 대한 적개심도 불같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처럼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권력에는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는 처절한 비정함이 베어 있는 것이며 권력을 추구하다 줄을 잘못 서거나 때를 놓치거나 힘을 잃는 자는 바로 죽음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태종의 리더쉽
태종(1367~1422·재위 1401~1418)은 즉위 전부터 조선 왕조를 연 아버지 태조 못잖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새 왕조 개창에 저항한 정몽주(鄭夢周) 등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두 차례 왕자의 난 때는 친형제까지 죽였다. 여기에는 하륜(河崙)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 조영무(趙英茂)의 빠른 정보 제공, 이숙번(李叔蕃)의 용기 있는 군대 통솔, 그리고 특히 부인 민(閔)씨와 그 동기들의 거사 준비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달랐다. 부인 원경왕후의 남자 형제 넷 모두를 군주에 대한 ‘불충(不忠)’이라는 죄목으로 제거했고, 태종 편에 선 공신 이숙번도 멀리 떨어진 함양 별장으로 내친 후 다시 보지 않았다. “인간을 대접하는 도리가 야박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토사구팽은 어느 새로운 왕조나 당연히 따랐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권력 내부에서는 비정할 만큼 공(公)과 사(私)를 나눴지만, 백성들의 평가는 달랐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사람들이 태종을 친부모처럼 여겼다고 쓰고 있다. 이런 리더십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태종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개혁적 통치 때문이었다. 권력 주변에는 사람이 꼬이게 마련이다. 또 권력을 잡으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 중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들만을 골라내 개혁의 완성으로 이끌고 갔다는 데 태종 리더십의 위대함이 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학을 공부했고, 스무살 전에 과거에 급제 한 뛰어난 학자였다. “고려 말 정치가 혼란스러워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政散民離)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는 게 유학을 공부한 이유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몽주와 길재(吉再)를 고려 충신으로 현양했다. 섬에 유배된 고려 왕족들을 육지에 나와 살게 했다. 태종에 맞섰기 때문에 죄인으로 죽은 남은(南誾)과 이제(李濟)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하여 태조 묘정에 배향했다. 민심의 향배를 꿰뚫어 본 것이다.
태종은 “예전 사람들은 재앙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고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는 유교 경전의 신조를 지켰다.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서 언관들이 책임 소재를 문제삼았을 때도 큰 틀을 지킨 신하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통치권자인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서 대신과 언관 모두를 보호하는 ‘책임정치’를 실천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가뭄이 지금 심하니 죽은 뒤에도 앎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은 비가 오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겨, ‘태종의 비(太宗雨)’라는 말이 퍼졌다. 청렴한 유학자 민제(閔霽)가 사위로 삼을 만한 면모,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없기를 구하는’ 정자(程子)의 지향과 같은 인간이자,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처신한 통치자라는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몽주와 태종이 주고받았다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도 백성들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유학자의 선택이란 측면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군주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사대부의 기상을 드러낸 데 반해, 태종의 ‘하여가’는 사대부의 기상을 꺾으려 했다고 본다. 하지만 태종의 시조를 왕조나 군주에 대한 충절보다 백성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선택으로 볼 순 없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실현하려는 민초들의 공공영역이 확장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시대에는 고결한 ‘단심가’보다 함께 가는 ‘하여가’가 보다 의미 있지 않을까.
실록은 민씨 형제들이 임금 태종보다는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신 이숙번 역시 교만방자해서 주색을 좋아하고 사치에 탐닉하면서도 민씨 형제처럼 세자 개인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다가 탄핵받았다. 강력한 통치권에 정면 도전(不忠)했다기 보다는 ‘호랑이의 위세를 여우가 (오래도록) 사용’하려 한 교만함, 곧 태종의 유교적 통치 리더십을 망가뜨려 버릴 위험성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를 “임금의 덕을 어지럽혀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다고 태종이 군주가 되도록 도운 신하들을 모두 제거한 것은 아니다. 개혁 목표에 동의하고, 사심없이 실천한 공신들은 끌어안았다. 조선왕조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의정부 제도를 정립하고, 화폐(저화)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의 큰 줄기를 잡아간 하륜은 죽을 때까지 태종의 스승으로 대접받았다. 평민 출신 장군인 조영무는 추진력은 부족했지만, 사사로운 정에 기대기보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올곧은 언론 때문에 인정받았다.
유학자 군주인 태종의 솔선수범은 이후의 군주들이 적극적으로 친·인척 또는 공신들의 비합법적 권력 행사를 통제하는데 앞장서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우가 왕 노릇 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사태가 생겨나서, 그 재앙이 통치 리더십은 물론 일반 백성의 생존권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큰 줄기’(大體)를 알고 지켜내는 대신과 올곧은 눈과 귀의 책임을 수행하는 언관은 흔들지 않지만, 사사로이 나서는 영특한 친·인척과 공신은 흔든다.” 태종이래 문민시대를 연 조선 사람들의 역사 경험이 말하는 지혜이다.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이 바라마지 않던 유학에 입각한 문민정치를 이상적으로 실현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태종은 조선 초의 혼란을 잠재우고 강력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건국 공신이나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공신들, 외척들을 경계했는데 공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처형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처남 네 명을 모두 정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죽였다. 자신의 아내인 원경왕후를 교태전에 유폐시켜 왕비와 외척의 정치적 발언을 원천 봉쇄했다. 또한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처형시켜 외척을 또 한 번 숙청하였다.
태종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 놓음으로써 왕권 강화시켰는데, 왕실의 정통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왕실의 정통성의 범주를 태종 자신의 혈족으로만 정하고 여기에 적계, 서계의 구분을 엄중히 한 것이다. 적계 왕자는 대군으로, 서계 왕자는 군으로만 봉하였고 또한 종친이나 왕실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왕실과 외척, 공신들에 대한 정리를 끝내고 난 뒤 1414년 남아있는 공신들 모두를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모두 은퇴를 시켜 왕권에 도전할 만한 신권을 모두 없앴다.
또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후에 세종)을 왕세자로 삼아 1418년 왕위에서 물러났음에도 4년간 국정을 감독하고 인사권과 군권을 감독하는 등 정사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신권의 비대화를 감독했으며,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422년 승하한다.
태종의 왕권강화
태종은 조선을 건국하지는 않았지만, 건국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의 관제와 기본적인 제도를 완비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과 재위 기간 내내 공신들과 외척들에게 유배와 숙청을 끊임없이 행해 잔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나, 왕권과 국가 기반에 해가 되면 왕족과 공신을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조선의 기틀을 잡기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들인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정사를 직접 돌보았는데, 강력한 왕권을 물려주어 조선의 기반을 단단히 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1418년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즉위시키면서 자신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되풀이 될까봐 두려워한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아내 귀양을 보냈다. 이는 혹시라도 양녕이 자신처럼 반란을 일으켜 왕자들 사이에 피를 볼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양녕과 충녕은 사이가 좋아 양녕이 경기도 이천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이 몰래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은 아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나 스스로 출가를 했으며, 불교를 좋아해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처럼 안정적인 아들의 즉위를 위해 태종은 첫째 아들을 귀양 보내고 둘째 아들은 스스로 출가했는데, 여기에서 태종이 아들에게 강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아들이라도 가차없이 내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지원과 혼란스러운 정세를 아들에게 되물려 주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자리’에 걸맞는 인물은 나서지 않고 고사하는 반면 실력이 못되는 인물은 각종 연줄이나 공훈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앞으로 나서다가 나라를 망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태종의 단호하고 원칙있는 친·인척, 공신 척결이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태종의 치적
태종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공신들이 거느린 개인 사병(私兵)을 없애고, 국가의 정규군 체제를 확립했다. 중앙 관료제 개혁도 뒤따랐다. 특히 대신들의 합의 기구인 의정부(議政府) 체제를 정비하여 대신들의 정책결정권을 제도화했다.
비판적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을 독립기구로 만들어서 언관 제도를 강화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신들의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였지만, 군주인 자신에 대한 비판도 수용했다. 관료 제를 감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경제 면에서는 전국적 토지 조사 사업인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의 토지 파악 능력을 극대화했다. 동시에 과전법 체제를 강화하여, 관료들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본인 당대에만 갖도록 하는 등, 관료들의 토지 지배권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토대를 완성했다.
호패법 실시와 호적제도 정비는 국가의 국민 파악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보통 농민인 양인(良人) 확대책을 사용하는 동시에, 양인의 노비화는 강력하게 막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런 태종 연간의 중앙정부체제 확립, 국민에 대한 파악과 지배력 강화, 전국 토지 상황 파악을 통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 등의 개혁 정책은 후계자인 세종의 학문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조선 문화의 황금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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