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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1 : 조선의 역사 33 (세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91 : 조선의 역사 33 (세종실록 1)
제4대 세종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 (양력 5월 15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示+匋), 자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정안대군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왕이 태종으로 즉위하면서 충녕대군으로 진봉했다가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사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생애 초기
이도는 1397년 당시 정안대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대군이 왕세자가 되면서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卞季良)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 독서를 계속하였다.
왕자 책봉과 형들과의 경쟁
1412년 16살에 둘째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은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양녕대군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과 즉위
그 뒤 1418년에 태종이 맏형이자 동복형인 양녕대군을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해 6월 22살의 그를 새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광주로 내쳐지게 되었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황희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고 실록은 적는다.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 1423년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고 민심을 얻었다. 세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과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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