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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9 : 조선의 역사 31 (태종실록 11)

두바퀴인생 2012. 2. 8. 03:48

 

 

 

한국의 역사 489 : 조선의 역사 31 (태종실록 11)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6. 화폐개혁과 백성들의 저항

 

태종은 개국 초의 혼란이 수습되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화폐제도의 개혁을 단횅하게 되는데, 그에 따른 불협화음이 만만치 않았다.

 

개국 당시 조선은 주로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 위주의 유통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종은 이와같은 물품화폐에 의한 유통체제에서는 활발한 상행위가 어렵다고 판단화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고려 사회에서도 이 같은 명목화폐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고려 성종이 999년 철전을 주조하여 유통시킨 것을 비롯하여 해동통보 등 각종 동전과 은병, 저화 등을 보급시킨 바 있다. 하지만 고려는 끝내 이 같은 명목화폐제도를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 당시에는 가장 신뢰성이 높은 물품화폐가 상거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품화폐의 성행은 조정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 조달에 막대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화폐 대용으로 이용되는 쌀이나 베는 양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교환하고 보관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물품화폐가 계속 유통될 경우 경제권이 전적으로 백성들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통치에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화폐제도의 개선을 위한 논의는 태조 초부터 시작된다. 1394년 7월에 호조판서 이민도는 전폐제(주조한 화폐를 통용하는 제도) 실시를 건의하는데, 태조는 전폐제도를 시행할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조신들은 전폐제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으나 아직 사회체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마당에 화폐개혁을 단행할 경우 자칫하면 격심한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태종시대까지 유보된다.

 

태종 원년인 1401년 4월 좌의정 하륜은 저화(종이돈)제도를 실시할 것과 그 업무를 관장할 관청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태종이 하륜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명목화폐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때 철전이 아닌 저화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개국 1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 1391년에 저화 유통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의 개국으로 이때의 결정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마침내 태종 대에 시도하게 된 것이다.

 

저화의 도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대신들은 종이지폐 대신 포로 만든 법화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그것 역시 물품화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저화 쪽으로 마음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저화를 관장할 관청으로 '사섬서(司贍署)'가 설치되고 조선 개국 후 최초의 저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만들어진 저화는 '건문연간 소조저화(建文年間所造楮貨)'라는 명칭을 달았으며, 저주지로 된 것과 저상지로 된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저주지로 된 것은 길이가 1척 67촌(약 48센티미터)이며 폭이 1척 4촌(약 42센티미터)이었으며, 저상지로 된 것은 길이가 1척 1촌(33센티미터)이고 폭이 1척(30센티미터) 정도였다고 하니 크기가 매우 큰 편이었던 모양이다.

 

이 저화의 가치는 쌀 2말이나 포 1필 정도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저화 사용을 기피했다. 그 가치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물품화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하는 수 없이 저화와 함께 포화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화의 사용이 확대됨에 따라 저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조정은 1403년 9월에 저화를 발행하던 사섬서를 폐지하고 공식적으로 저화제도를 중단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저화제 실시 1년 5개월 만에 물품화폐의 유통체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태종의 화페제도에 대한 집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410년 의정부에서 다시 저화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자 태종은 1403년에 저화제를 중단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사섬서를 부활시켜 저화를 발행토록 하였다. 다시 부활된 저화는 '건문연간소조저화'라는 원래의 명칭에 '영락'이라는 연호만 찍었다.

 

부활된 저화의 가치는 1매당 쌀 1말, 30매에 목면 1필로 정하였다. 그리고 포화의 사용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저화의 통용을 꺼렸고, 그 때문에 상거래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 유통업계가 극도로 침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정은 또다시 저화 이외에 잡곡 등 미곡 매매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저화의 사용이 미진하자 1415년 4월 금지시켰던 포화의 사용을 다시 허용하였다.

 

하지만 포화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포백세를 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즉 포백이 화폐로 통용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검열을 거쳐야 하는데, 그 검열비를 징수하였던 것이다. 그 금액은 포백 30분의 1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포화를 사용하였고, 그로 인해 다시금 저화의 가치는 폭락하고 말았다.

 

그쯤 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포백세를 걷는 과정에서 저화 1매 미만의 적은 액수를 처리하는 일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동전을 제조하여 세금 징수의 편리를 꾀하자는 논리였다. 또한 일반 상품의 소액 거래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내용도 언급되었다.

 

동전유통 주장은 결국 호조에서 채택되었고, 호조의 건의가 있자 태종은 당나라의 개원통보의 체제와 품질을 본떠 조선통보를 주조토록 했다. 그러나 조선통보의 주조 사업이 착수되려던 무렵 서간원에서 동전의 유통이 저화의 유통을 방해하게 된다는 주장을 하여 이 계획은 실시되지 못했다. 사실 동전이 유통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중에는 아예 저화로 곡식을 살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전유통 계획이 취소되면서 다시금 저화정책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포화만을 사용하고 저화는 기피하고 있었다. 거기다 흉년이 연이어 겹치자 조정은 훙년을 이유로 당분간 저화의 사용을 잠시 중단한다는 공고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유통시장에는 포화를 비롯한 물품화폐가 전용되고, 저화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태종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던 저화정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험를 바탕으로 조선 조정은 세종 대에 이르러 동전인 조선통를 발행하여 법화로 정착하게 된다.    

 

 

 

7. <태종실록> 편찬 경위

 

<태종실록>은 총 36권 16책으로 이뤄져 있으며, 1401년부터 1418년 8월까지 17년 8개월 동안 이루어진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원명은 '태종공정대왕실록'이며 다른 실록과 마찬가지로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시 편찬했던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전주사고본이다.

 

<태종실록>은 1422년 태종이 죽자 그 이듬해 변계량과 윤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정왕실록>과 함께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편찬 작업은 1422년 3월에 시작하여 1431년 완성될 때까지 9년간 계속되었다.

 

실록 편찬은 변계량, 윤회, 신장 등의 책임 아래 이뤄졌는데 동부 연희방의 덕흥사가 작업장이었다. 작업이 궁 안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궁궐 밖 덕흥사에서 이뤄진 것은 감수관 변계량이 병약하여 매일같이 춘추관으로 출퇴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종실록>은 1426년 <공정왕실록>이 편찬된 뒤에도 5년이나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그리고 편찬 도중 1430년 4월 변계량이 죽자 편찬사무소를 의정부로 옮기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윤회, 신장 등과 함께 편찬 책임을 맡아 1년 뒤인 1431년 3월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의 능) 비문 가운데 양대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있자 세종은 비문과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던 태조실록, 공정왕 실록 등도 개수하도록 지시했다. 실제 개수 작업은 1442년, 신개의 감수 아래 권제, 안지 등의 춘추관 관료와 집현전 학사 남수문 등이 주관하였다.

 

<태종실록>은 1401년 1월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태종이 즉위한 1400년 11월부터 그해 말까지는 <공정왕실록>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