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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7 : 조선의 역사 29 (태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487 : 조선의 역사 29 (태종실록 9)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5. 폭압적인 억불정책과 불교의 쇠락
조선왕조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기에 전래된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주로 다루는 성리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성리학의 토대가 된 공자의 학문이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 역시 그 같은 현실주의를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와 심성문제를 학문 속으로 완전히 흡수하려 했기 때문에 이전의 유학에 비해 훨씬 더 교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성리학의 발달은 지극히 종교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경향이 강한 불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의 부패상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전반에 널리 유포된 불교적 요소를 걷어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역성혁명을 통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신진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한 강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사찰 소유의 땅을 빼앗고, 출가한 양반 자제들을 환속시켰으며, 사찰 승려의 수를 엄격회 규제하였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탄압적책은 개국 초에 정도전 등에 의해 강하게 제기되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불교 신봉자였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 태조는 비록 신진사대부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불교에서 비롯된 폐습을 시정할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교단을 악제하거나 승려들을 제거환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정종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태종은 1400년 11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환관들의 불심을 위해 마련되었던 궁중의 인왕상을 대궐 밖으로 옮겨놓게 하고, 그 다음달에는 도량법석 등의 불교행사를 폐지시켰다.
1401년 1월에는 대신들이 불교 교단이 오교양종을 혁파하고 절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국가 공용으로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태종은 대신들의 척불 의견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당시 태상왕으로 물러앉았던 태조가 불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두를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는 이성계가 죽은 후에 부룍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을 것임으로 예고한 말이었다.
그리고 1402년 4월 태종은 서운관에서 불교혁파론을 상소하자 이를 받아들여 사찰의 토지를 군대에 예속시켜버렸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태상왕 이성계는 노발대발하며 사찰의 토지를 돌려주고, 승려들을 억압하지 말 것이며,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 바람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지를 일시적으로 꺽이게 된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를 지켜보지 않았다. 1403년 6월, 사헌부 관리들이 사찰에 예속된 토지를 몰수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하자 태종은 못이긴 체하고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태종과 이성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게다가 1404년 12월에는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405년 8월에는 폐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국가의 공용에 귀속하도록 하고, 11월에는 급기야 전국의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혁파하였다.
이렇게 되자 불교는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였고, 1406년 2월 이 같은 불안에 휩싸인 승려 수백 명이 대권 문 앞에 마련된 신문고를 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계종 승려 성민을 위시한 승려들은 절의 수를 줄이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한 조정의 처사를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태종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태종은 탄압의 강도를 높여 불교 교단 내에 남겨둘 사찰과 승려, 노비, 전답 등의 수량을 확정하고, 종단마저도 축소시켜 버렸다. 1406년 3월에 의정부의 요구가 있자 태종은 한양과 개경에는 오교양종에서 각 종단마다 사찰 1개로 한정하고, 지방과 목과 부에는 선종 계통과 교종 계통에서 각 1사씩, 군.현에는 선.교종을 합하여 1사 씩만 남기게 하고 나머지 사찰릉 모두 철폐하였던 것이다.
이 때 남겨진 절 중에서 개경과 한양에는 선.교종의 절 한 곳만 전토 2백 결과 노비 1백 구를 예속시켜 승려 1백 명이 머물도록 하고, 나머지 9개 절에는 전토 1백 결과 노비 50구로 승려 50명이 생활하게 하였다. 또 각 도의 중심지에는 선.교종의 절 하나에만 전토 1백 결과 노비 50구로 50명의 승려를 머물도록 하고, 각 고을 안에 절에는 전토 60결과 노비 30구로 30명의 승려를 머물게 하였다.
그 결과 조계종과 총지종은 합쳐서 70사,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도합 43사, 화엄종과 도문종은 조합 43사, 지은종은 36사, 중도종과 신인종은 도합 30사, 남산종과 시흥종은 각 10사씩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전역에 총 242사만 남게 된 것이다. 또한 이때 관아에 의해 몰수된 절의 노비는 총 8만구였고, 몰수된 전토는 총 6만 결에 육박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얼마 뒤에는 11종이던 종단마저 7종으로 통폐합하여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도종, 총남종, 시흥종 등만 남겨 두게 되었다.
이렇게 태종 대에 강력하게 실시된 억불정책은 세종 대 이후 더욱 심화된다. 세종은 태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억불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남아 있던 7종단을 선종과 교종 양종으로 정리한 후 사찰도 36본산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사찰에 딸린 1만 1천 결의 토지 중에서 약 3천 결을 더 물수하고 노비의 수도 대폭 줄였다. 그 뒤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은 불교의 중앙기관을 철폐하고 고려 이후 지속되어 오던 승과와 승계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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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억불정책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은 조선 왕조(1392-1897)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한 정책이다.
고려 말 및 조선 초에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데 공헌하는 등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숭불정책이 유지되지만 태종 정권을 잡으면서 얼불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선 건국 세력이 태종에게 주청하여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개하였다. 고려말 불교 세력이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와 역성 혁명에 방해가 되는 문벌 귀족 세력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고려 왕조에서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모두 철폐되었고, 사찰도 정리되었으며 남은 사찰은 모두 산으로 쫓겨들어갔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계속 믿었고,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계속 믿었다.
억불 정책은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정책과 더불어 숭유억불정책으로 진행되어 조선 사회에서 학문의 다원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다른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 독선의 그릇된 예를 남겼다. 새로운 시대로의 개혁에 둔감하게 만들었으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불교 자체의 부패와 유생들의 척불(斥佛)은 태종(재위 1400-1418)이 즉위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배불정책을 단행하게 하였다. 즉, ①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수를 줄이며 승려를 환속(還俗)시키고, ② 사찰 토지를 국유(國有)로 몰수하고 사원에 딸린 노비(奴婢)를 군정(軍丁)에 충당하며, ③ 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하고 왕사 · 국사를 폐지하며, ④ 능사(陵寺)의 제도(制度)를 금하였다.
태종 2년(1402)에 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에 좇아 경외(京外)의 70사(寺)를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전(土田) ·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노비를 제사(諸司)에 분속(分屬)시켰다.
태종 5년 11월에는 의정부(議政府) 상서에 좇아 개성(開城)과 신경(新京: 서울)에 각종(各宗)의 사원 1사(寺)씩, 목(牧)과 부(府)에는 선종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各)군현(郡縣)에는 선종 · 교종 가운데서 1사(寺)씩만 두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그러나 연경사(衍慶寺) ·화장사(華藏寺) · 신광사(神光寺) · 석왕사(釋王寺) · 낙산사(洛山寺) · 성등사(聖燈寺) · 진관사(津寬寺) · 상원사(上元寺) · 견암사(見岩寺) · 관음굴(觀音窟) · 회암사(檜巖寺) · 반야사(般若寺) · 만의사(萬義寺) · 감로사(甘露寺) 등만은 노비(奴婢)와 토지를 감(減)하지 않았다.
이듬해 태종 6년 3월에는 의정부(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정하였다. 즉,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해서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화엄종(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을 합해서 43사, 자은종(慈恩宗) 36사,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을 합해서 30사, 남산종(南山宗) 10사, 시흥종(始興宗) 10사를 정하였으며 이밖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신 · 구 양경(兩京)에는 선종 · 교종의 각 1사(寺)에 200결(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 선 · 교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려 10명을, 읍외(邑外)의 각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釋省敏)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역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세종 원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明帝) 성조(成祖: 재위 1402-1424)에 호소한 사실에 의해서 세종의 배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세종 6년에 종단을 폐합하여선(禪) · 교(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242개 사찰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개사로 줄였으며, 성외(城外) 승려에게 성내(城內) 출입을 금하였다.
다음 문종(文宗: 재위 1450-1452)도 역시 승려의 왕성(王城) 출입을 금하고 민간인의 출가(出家)를 막았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일반이 상(喪)을 당했을 때 불승(佛僧)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국왕의 탄신일에 신하가 사원에 가서 설재(設齋)하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도승법(道僧法)의 폐지와 승려의 환속으로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다.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선종의 본사(本寺)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興德寺) · 대원각사(大圓覺寺)를 폐하고 공해로 삼았다.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를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성내(城內)의 니사(尼寺)를 헐고 니승(尼僧)은 궁방(宮房)의 비(婢)로 삼았다. 또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취처(娶妻)하게 하였으며, 사사(寺社)의 토지를 모두 관부(官府)에 몰수하였다. 이때 승과(僧科)도 중지되고 양종(兩宗) 본사(本寺)도 없애버렸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은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 (圓覺寺)를 헐어 그 목재를 연산군 때 헐린 민가(民家)의 재축(再築) 자재로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불교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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