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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4 : 조선의 역사 26 (태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484 : 조선의 역사 26 (태종실록 6)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3. 태종의 가족들
태종은 1명의 장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엇다. 정비는 원경왕후 민시이며, 후궁은 효빈 김씨, 신빈 신시, 선빈 안씨, 의빈 권씨, 소빈 노씨, 숙의 최씨, 덕숙옹주 이씨, 고씨, 김씨 등이다. 그는 정비에게서 4명의 적자와 4명의 적녀를 얻었으며, 후궁들에게서 8남 13녀의 서자와 서녀를 얻었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년)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 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이 해 11월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물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이후에는 태종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으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위시키지는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
태종의 아들은 총 12명으로 정비 소생 4명, 후궁 소생 8명이 있었다. 정비 소생은 장남 양녕을 비롯하여 효령, 충녕, 성녕 등이 있고, 후궁 소생으로는 효빈 김씨의 경녕, 신빈 신씨의 함녕, 온녕, 근녕 형제들과 선빈 안씨의 익녕, 숙의 최씨의 희령, 고씨의 혜령, 덩숙옹중의 후령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양녕, 효령, 충녕 등 정비 소생의 아들은 왕위 계승과 관련한 일화들을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으며, 넷째인 성녕은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세 때 홍역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의 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양녕과 효령의 삶을 약술한다. 충녕은 <세종실록>에서 자세히 다룬다.
양녕대군(1394~1462년)
1394년 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수백, 부인은 광산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망한 성격으로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구었다.
또한 그는 여색에 빠져 태종과 심각하게 대립하기도 했는데,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하는 가 하면 , 매형의 첩이었던 기생과 통정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좋아하던 애첩 어리 문제는 태종과의 관계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심지어 그는 근신하라는 태종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도 아버지처럼 여러 명의 후궁을 거느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태종에게 올리며 아버지는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려도 되는데 자신은 왜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펴 태종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치를 떠는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결국 태종이 그를 세자에서 내쫓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고, 마침내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일부 야사의 추론일 뿐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었고, 때론 유배지를 벗어나 함부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대신들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에 대한 지극한 우애를 드러내며 수십 차례에 거쳐 올라온 탄핵 상소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노년에 세조 편에 서서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내쫓는 데 앞장섰는데, 나름대로 신하들이 왕권을 좌우하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따른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1396~1486년)
효령은 1396년 태조 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서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서울 방배역 근방 효령대군 능 '청권사'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절로 찿아들어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는 1407년 태종 8년에 효령군에 봉해지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이후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조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그는 성격이 유순하고 권력에 관심이 없는 인물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왕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와 시호는 정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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