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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5 : 조선의 역사 27 (태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485 : 조선의 역사 27 (태종실록 7)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4. 태종시대 주요 사건
조사의의 난
1402년 11월에 일어난 조사의 의 난은 신덕왕후 강씨 척족들이 왕위에서 밀려난 이성계의 복위를 도모한 사건으로 주모자는 조사의와 강현 등이었고, 배후 인물은 이성계였다.
실록에 난을 주도한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척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치적으로는 어떤 관게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신덕왕후의 부계는 곡산 강씨이고,모계는 진주 강씨라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부계나 모계의 직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신덕왕후의 여형제의 자제이거나 또는 사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여자 형제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분명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조사의와 함께 난을 이끌었던 강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그의 성씨로 보아 신덕왕후 강씨의 척족임에는 틀립없어 보인다.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을 때 그의 직책은 안변부사였다. 안변은 함흥과 함께 동북면의 요지였고, 이성계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이성계의 고향 인물들을 부추겨 복위를 도모했던 것이다.
조사의는 1393년에 형조에서 의랑(정5품 실무 책임자)을 지냈고, 1379년에는 첨절제사에 올랐다. 하지만 1398년에 방원의 난이 일어나면서 직위에서 내쫓겼고, 이내 서인으로 전락하여 전라도 수군에서 노역을 했다. 하지만 얼마 뒤에 풀려나 안변부사가 된 것이다.
그가 안변부사가 된 데엔 이성계의 영향이 컸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신덕왕후 강씨의 몇 안 되는 친척이라고 해서 매우 총애했는데, 태종이 그 점을 알고 함흥에 마물고 있던 태조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방면하여 안변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를 안변으로 보낸 것은 태종의 실책이었다. 막상 안변에 도착한 조사의는 동북면의 호족들과 은밀히 접촉하여 반란을 획책하였고. 태조는 내시 박민을 보내 그를 지지했다. 당시 이성계는 함흥과 도성을 오가며 조정의 돌아가는 형편을 조사의에게 알려주었고, 조사의는 이성계의 정보를 바탕으로 거사 시기를 결정했다.
1402년 11월 5일, 도성으로 갔던 이성계가 함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조사의는 군대를 일으켰다. 그가 내건 기치는 왕위를 찬탈한 이방원을 내쫓고 태조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태조를 동정하고 있던 많은 동북면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태종이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청했지만, 이성계는 되레 태종의 차사를 죽여버렸다. 또한 박순이 자청하여 태조를 회유하기 위해 찿아갔지만, 그 역시 조사의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듯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태종은 조영무, 이빈, 이천우 등을 앞세워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진압군의 선봉에 섰던 이천우가 조사의의 군대에 포위되어 기마 유격대를 모두 잃고 1백 명이 넘는 군사가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히 이천우는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지만, 이 사건 이후 반란군은 위세를 떨치며 평안도 쪽으로 진군하여 순식간에 1만이 넘는 병력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태종은 도성방어군 일부를 제외한 정예군 4만을 동원했다. 태종이 이처럼 전면전을 불사하자, 반란군 진영은 크게 흔들렸고 반란에 가담한 백성들이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조사의는 군대를 이끌고 평안도 안주로 진출했다. 그리고 11월 27일 청천강 근처에서 진압군과 한바탕 싸움이 붙었는데, 여기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조사의와 그의 아들 조홍, 신덕왕후의 친족 강현 등 주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체포된 이들은 그해 12월 7일에 도성으로 압송되어 순위부에 갇혔고, 12월 18일에 참형을 당하였다.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는 방간이 동조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태종은 방간에게 편지를 보내 안전을 약속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조사의의 난은 태종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난의 주모자는 조사의였지만, 실제 이 사건을 막후에서 지휘한 인물은 다름아닌 태조였기 때문이다. 태조는 조사의를 앞세워 왕위를 찬탈한 태종에게 무력 시위를 한 셈이고, 태종은 아버지를 상대로 또 한 번의 살륙전을 벌여야만 했다. 다행히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왕인 태조에게 원망도 할 수 없는 것이 태종의 당시 처지였다. 또한 많은 동북면 세력이 여전히 태조를 동정하고 태종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그러나 태종에게도 소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사의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태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되찿으려는 태조의 의욕은 크게 꺽였고, 그것은 태조가 태종을 인정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민무구 형제의 옥사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에게는 네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이들 중 첯째인 무구와 무질은 1,2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더구나 그들은 세자 제(양녕)와 각별한 사이였다. 양녕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고, 그 때문에 외삼촌이 그들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런 이유로 무구와 무질 형제는 조정의 막강한 실세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그런 그들은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태종은 즉위 이후 원경왕후 민씨와 자주 다퉜다. 이유는 태종이 지나치게 색을 탐했던 것에 대한 원경왕후의 반발이었다. 태종은 즉위와 동시에 계속해서 후궁을 들였고, 어느덧 후궁의 숫자는 열 명에 육박했다. 민비는 그런 태종을 몰아세웠고, 태종은 민비가 투기를 한다며 역공을 가했다.
민비와 극도로 사이가 나빠진 태종은 내심 민무구 형제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민비가 자신에게 그토록 오만하게 구는 것은 바로 동생들의 권세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기 위해 태종이 택한 방법은 선위파동이었다. 1406년 8월 18일,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겟다고 선언햇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신하들은 매일 같이 궁중에 들어와 선위는 불가하다고 상소했다. 하지만 민무구 형제는 내심 태종의 선위를 바라고 있었고, 그것은 조정 대신들과는 반대로 선위 반대 움직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태종의 덫에 걸려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동안 조정을 요란스럽게 햇던 선위파동은 태종이 슬그머니 말을 번복하면서 조용해졌고 대신 민무구 형제가 도마위에 올랐다.
조정이 민무구 형제를 비판하는 양상을 띠자, 태종은 곧바로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는 일에 나섰다. 그들의 죄목은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 세자를 제외한 모든 대군들을 죽이려 했다는 죄목까지 추가되었다.
그들을 탄핵한 것은 의안대군 이화였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형제로 태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태종 7년 7월 4일에 의정부 영사가 되었는데, 평소 하륜과 이숙번, 성석린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가 의정부 영사가 된 뒤, 맨 먼저 한 일이 민무구 형제의 탄핵이었다.
이화의 상소가 있자, 곧 민무구 형제에 대한 심문이 벌어졌고, 이어 탄핵 상소가 줄을 이었다. 테종은 무구를 여흥에, 무질을 대구에 유배 조치했다. 이는 그들의 부친 민제가 제안한 것이었다. 그대로 뒀다간 유배형이 아니라 극형이 처해질 것을 염려한 고육책이었다.
민씨 형제의 일은 그쯤에서 끝나는 듯했다. 어쩌면 태종도 그 정도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무구를 탄핵한 사람들은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만약 민무구 형제가 살아남은 가운데 태종이 죽고 세자가 즉위한다면, 그 뒷 감당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시 민씨 형제는 복수를 할 것이고, 탄핵에 가담하였던 무리들을 대거 숙청할 것은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점을 모르지 않는 하륜, 이숙번 등은 대간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들 형제를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 그런 가운데 여흥부원군 민제가 죽었다. 한편 민씨 형제 편에 섰던 이무, 조희민, 강사덕 등은 자위책을 강구하기 위해 은밀히 민씨 형제와 연락을 취했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돼되어 갔다.
결국 1409년에 정사공신 이무가 죽임을 당하였고, 동시에 민씨 형제들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친들과 세자의 장인인 김한로, 심지어 세자까지 민씨 형제를 죽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10년 태종 10년에 마침내 민씨 형제에게 자진 명령을 내리게 된다. 또 6년 뒤인 1416년엔 그들의 두 아우인 무휼과 무회에게도 자진토록 조치하고, 그들의 처자들도 모두 변방으로 내쫓아버렸다. 외척을 경계하고자 태종이 벌인 이 사건은 결국 네 처남의 묵숨을 모두 빼앗은 뒤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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