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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6 : 조선의 역사 28 (태종실록 8)

두바퀴인생 2012. 2. 5. 05:55

 

 

 

한국의 역사 486 : 조선의 역사 28 (태종실록 8)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4. 태종시대 주요 사건

 

육조직계제 탄생

태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권 강화책 일환으로 육조직계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의정부를 설치하면서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이 조치는 1414년에야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무관의 인사권은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게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대부언을 증대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1414년 태종 14년 태종은 마침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따라서 그때까지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크게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초기 형태의 거북선 개발과 신문고 설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13년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종 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영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최초의 초기 형태의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태종 대의 중요한 치적으로 기록된 신문고 제도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떠 설치되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건국 초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쟁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 태종 5년 9월에 경북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하고, 환자 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또한 십학을 설치하고 사부학당을 건립하였으며,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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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에 대하여......

 

거북선에 대한 참고 자료를 옮긴다.

 

거북선의 구체적인 개발과정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 말에 왜구 소탕을 위해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이 발병되어 거북선과 같이 왜구 소탕전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고려 조정은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제조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그 후 조선이 개국되고 태종 대의 기록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거북선은 왜구 소탕을 위해 돌격선으로 특수제작된 것으로 왜구 소탕과 대마도 정벌을 위해 제작되어 임진강에서 실전배치를 위해 시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1401~1418)대에도 거북선이라는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두차례 남아있기 때문에, 조선 중기 선조 대에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거북선을 개조 혹은 재발명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태종대의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으며, 태종대 이후 임진왜란 발발시점까지 180여년동안 거북선에 관련된 단 한차례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구조상 판옥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 판옥선이 개발된 시점은 1555년이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태종대의 거북선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거북선을 태종 대에 실전용으로 개발하고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까지 180년 동안 조선은 거북선에 대해서 더 이상 발전적인 연구와 개선을 시도하지도 못하였고, 또 최무선이 개발했던 화약에 대한 효울적인 무기개발을 소홀히 하였고, 화약의 엄청난 위력을 전쟁에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한 채 당쟁과 허례허식으로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조선은 왜군의 침공을 받아 부산, 동래성에서 잠깐 저항하였을 뿐 이일의 상주 전투, 신립의 탄금대 전투 등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마다 조선의 관군은 왜군의 조총 앞에 가는 곳마다 추풍낙엽처럼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화포를 장착한 판옥선과 돌격선인 거북선을 개발하여 해전에 임해 23전 23승의 전승을 기록하였다. 물론 해전에서 함대의 무기체제와 전술을 비교할 때 거북선과 화포의 위력에 왜군이 무너졌지만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우국충정과 애민정신, 뛰어난 용병술,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력, 치밀한 대비책, 물길 이용, 매복 작전, 기습 등 신출귀몰한 전략전술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일부에서는 거북선을 개발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부하 장수였던 나대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 전 대부분의 군경력을 변경인 육군에서 보냈을뿐, 수군에서 복무한 것은 1580년 6월~1582년 1월 사이 (약 18개월)뿐이다.

 

따라서, 배에 대해 상당히 경험이 많았던 나대용이, 수군 복무 경험이 부족한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 제작과정에 일정한 기여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나아가 나대용이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제작 건의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로서는 거북선의 최초 제작과정에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 구체적 진실이 어떻든 간에 거북선 제작을 결정할 수는 있는 지휘관은 나대용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름대로 엄격한 법치주의에 기반한 조선왕조에서, 기존 규정에 없는 새로운 군함을 만든다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그 결단을 이순신 장군이 내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거북선의 구조

1934년, 언더우드(Underwood)가 최초로 거북선을 연구한 이래, 지금까지 최석남, 김재근, 이원식, 남천우, 정광수, 최두환 등 10여명의 연구가들이 거북선을 연구해 오고 있다. 거북선은 대체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배라는 점, 거북선도 다른 많은 한국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이들의 의견을 왜곡없이 제대로 소개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므로, 간단하게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덧붙이겠다.

  

 

 1층설-거북선.jpg 

 

 

이충무공전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이 개발한 거북선의 원형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도 통제영 거북선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통제영 거북선의 갑판 구조에 대해서 1층 구조였다는 주장, 반 2층 구조였다는 주장, 2층 구조였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갑판 아래의 선실을 감안할 경우 각 2층, 반3층, 3층구조가 된다) 1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에서 2층 갑판을 완전 제거하고 그 위에 지붕(개판)을 씌운 셈이되며, 2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셈이 된다.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 원형에 가깝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이상, 거북선 원형의 갑판은 2층 구조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1층 갑판의 천정 위치에서부터 곡면의 개판(지붕)이 씌워진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경우 그림상 2층 구조일 가능성이 있으나,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순수한 2층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문제는 거북선의 개판(지붕) 좌우에 있는 포구멍이다.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보면 지붕(개판) 좌우에 12개의 구멍이 그려져 있는데, 이충무공전서 본문을 보면 이 구멍에 대해 포혈(砲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거북선을 순수한 1층 구조로 볼 경우 이 포구멍을 설명할수가 없게 된다. 1층 구조라면 지붕 부근에 포혈을 만들 필요가 없고, 설사 만든다해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관상 2층이 아니면서도 지붕 부근에 포혈이 존재하는 구조라면,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반2층 구조일 수 밖에 없다. 반 2층 구조일 경우에도 판옥선의 상층갑판을 그대로 두고 여장만 제거한 체 지붕만 씌운 경우(①)와, 판옥선의 상층 갑판을 완전 제거한 경우(②)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판옥선의 상층갑판을 그대로 둔 경우(①)에는, 판옥선에서 개조하기에는 간편하나, 지붕의 높이가 낮아서 사람이 설 수있는 공간은 상층갑판을 제거한 경우(②)와 별로 차이가 없으므로 별 실익은 없다. 일부 연구가들은 판옥선에 상층갑판을 제거하는 식의 개조는 조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못으로 제작한 한선은 필요할 경우 해체, 재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채광이나 활동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필자는 상층갑판을 제거하고 반2층 갑판을 설치한 경우(②)가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 이렇게 좁은 반2층 공간에서 대형총통 특히 대장군전 등을 발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소형의 승자총통이나 활을 사격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반2층구조.jpg 

 

 

일부 연구가들은 거북선 원형이 1층 구조나 반2층 구조일 경우, 사실상 2층 구조의 판옥선에서 퇴보한 것이며, 판옥선의 2층 갑판을 단순히 지붕으로 개조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만약 1층 구조나 반2층 구조일 경우 노를 젓는 격군과 대부분의 전투요원이 같은 층에 있게 되므로, 운용하기에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실물 복원 거북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다소 불편하기는해도, 같은 층에서 노를 젓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통제영 거북선이 2층 구조였다면,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최초의 거북선 원형이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거북선 원형에는 나름대로 결점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결점을 개량하기 위해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나 이충무공 종가 거북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용머리(혹은 거북머리)의 용도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직접 용머리에서 현자화포를 쏘았다고 기록한 이상 임진왜란 당시의 용머리는 화포발사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용머리 내부에 현자화포를 발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야하므로, 지금 복원된 거북선 보다는 용머리가 커야 할 것이고, 그 높이도 조금 낮아져야 할 것이다. 거북선 이물비우(船首材)에 그려진 귀면은 충각용 돌기(Ram)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식용 그림일까?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 밝혀진 사료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거북선-전쟁기념관.jpg 

 

 

이 거북선은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거북선 축소 복원 모형이다. 기본적으로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을 모델로 만든 것이나, 거북선 지붕(개판) 부분은 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거북선을 절충해서 임의로 만든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와 서울 이촌동에는 실제 운행 가능한 실물 크기 복원 거북선이 있다.

 

이 실물 크기 복원 거북선들은 모두 해군본부에서 복원설계한 거북선인데, 순수한 1층이라기보다는, 반2층에 가까운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지붕(개판)에는 포혈을 만들어 놓지 않아 반2층에서 전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래 사진은 해남에 위치한 명량해전 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절개 모형이다. 이 거북선 모형도 기본적으로 반2층 구조로 제작되어 있으나, 지붕(개판)의 각도와 반2층의 높이가 적당하지 않아, 반2층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 거북선은 철갑선일까? - 가능성은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일제시대에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해방 이후 학계의 통설도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나 이순신행록 같은 기본 사료에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직접적인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갑선이 아니라고 나오는 사료도 없다) 사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을 굳이 찾는다면, 한국측의 기록이 아닌 일본측의 임진왜란 기록에서나 발견될 뿐이다. 나아가 조선공학을 전공한 저명한 학자인 김재근 교수가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면 전체적인 구조상 복원력이나 부력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의견을 밝힌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러나, 거북선이 철갑선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일본의 유명한 전통 선박 전문가 교수에 따르면, 일본 전통 선박인 아다케(안택선)에 설치되는 방패는 대부분 두께 3치(寸)의 녹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일부 방패는 나무 위에 얇게 철판을 붙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두께 1치(寸)의 녹나무에 두께 2푼(分)의 쇠판을 붙인다고 한다. 이 경우 두께 2푼의 쇠판은 두께 2촌의 녹나무와 면적과 무게가 같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 전통 배의 실제 사례는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은 물 밖에 나오는 부분만 쇠판을 입혔다는 이야기이므로, 두께를 달리해서 쇠판과 나무판을 같은 무게와 크기로 만들 수만 있다면, 배의 복원력이나 부력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진주성성문-철갑포장방식.jpg  

 

 

판옥선이나 거북선의 삼판(외판) 두께는 보통 4치(12.26cm) 정도이다. 지붕(개판)의 두께도 이 수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판옥선의 여장이나 방패판은 소나무가 아닌 주로 참나무(상수리나무,졸참나무,녹나무) 계통의 나무를 쓴다. 만약 판옥선의 지붕(개판)이 참나무 계통으로 되어 있다면, 4치(대략 12cm) 두께의 참나무 지붕은 대략 4푼(대략 1.2cm)의 쇠판 지붕과 무게가 동일하다.

 

실제로는 일본의 배 방패와 유사하게 나무판자 2치(대략 6cm)에 쇠판 2푼(대략 0.6cm)을 덧붙인 형태나, 혹은 나무판자 3치 (대략 9cm)에 쇠판 1푼(대략 0.3cm)을 덧붙인 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0여년 동안 이순신을 연구하고 있는 최석남 장군이나 서울대 원자핵공학 박사 박혜일씨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런 형태는 우리나라의 성문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경우 순수하게 나무판자로만 만드는 경우와 비교해서, 두께만 얇아질뿐 무게는 동일하기 때문에 복원력이나 부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실상 김재근 교수는 지붕을 철갑으로 씌울 경우의 복원력이나 부력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수치나 계산도 제시한 적이 없이, 막연하게 추정만으로 철갑선설을 부정했을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쇠판을 씌웠을 경우 철갑 위에 쇠송곳을 부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다 위에서 운용하면 녹이 잘 쓸어 별로 실용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