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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2 : 조선의 역사 24 (태종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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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82 : 조선의 역사 24 (태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2. 2. 1. 11:26

 

 

 

한국의 역사 482 : 조선의 역사 24 (태종실록 4)

 

 

       

 

 

 

 

태종실록(1367~1422년, 재위 1400년 11월 ~ 1418년 8월, 17년 10개월)

 

 

1. 제2차 왕자의 난과 방원의 세자 책봉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자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과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화되어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방원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험 요소였다. 특히 넷째 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넷째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병권집중 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 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시기심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인으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1등공신에 피봉되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죽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평소 방원에 대해 품고 있던 원한을 이 기회에 풀어보고자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를 한 것이다. 방간은 박포의 말을 확인하지도 않고 분기탱전하여 사병을 동원해 방원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박포는 붙잡혀 사형당하는 것으로 방간의 난은 막을 내렸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 세력은 방원의 왕위 계승권 확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받아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원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을 당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치세 때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했다.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방원의 강한 형제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2. 태종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 작업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해 요동 정벌론이 대두되었다. 정도전은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한 요동 정벌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며, 병권이 나라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방원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사병이 혁파될 위기에 놓이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형제들 간의 권력 관계를 고려하여 세자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군으로 봉해지면서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 1등에 논정되었으며,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그리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집권화의 틀을 다져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자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에 등극하였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세자 시절에 이미 손댄 바 있던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었다. 개국 당시 유학자들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는 대명외교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하여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다.

 

과거제도에서도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종교정책에서는 숭유억불 정책이라는 개국 이념에 따라 불교와 도참사상을 억제했다. 그 일환으로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제,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켰다. 한편 유교를 장려하여 문묘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하였다. 이와 함께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키는 등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여들이려 했다.

 

대외정책 또한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키는데 노력했다. 왜인에 대해서는 왜인범죄논결법을 마련하여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하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했다.

 

이 밖에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으며, 선원록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키고,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자 시절부터 빠르게 추진하던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1418년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 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그는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을 가지고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 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정비 원경왕후를 비롯 10명의 아내에게서 12남 17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헌릉으로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쌍릉이다.

 

 

 

신문고

 

조선 시대 신문고는 본래 중국 송(宋)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신문고는 조선 태종 때 소원(訴寃) 제도와 함께 설치되어 백성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게 하였다. 억울한 백성이 북을 울리면 임금이 그 소리를 듣고 심사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지만 신문고는 아무나 아무 때나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먼저 수령에게 알리고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경우 관찰사ㆍ사헌부 순으로 상소하였다. 그런데 사헌부에서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이 순서를 어기면 처벌을 받았으므로 일반 백성이 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신문고는 임금이 백성의 뜻을 직접 듣는 민의 상달(民意 上達)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신속히 해결할 목적으로 사소한 사건에도 신문고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신문고 사용에는 많은 제약이 따라 '이서(吏胥)가 자신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하거나, 향리ㆍ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타인을 매수하여 고발하게 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었다.

더욱이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신문고 사용 규정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 내용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관한 일, 부자지간에 관한 일, 적첩(嫡妾)에 관한 일, 양천(良賤)에 관한 일과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등의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실제 신문고를 이용한 사람은 주로 서울의 관리들이었고, 신문고 제도의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常人)이나 노비,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官民)은 거의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신문고 제도는 결국 연산군 때 폐지되고 말았다. 이후 1771년(영조 47년) 11월에 부활되어 병조(兵曹)에서 관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