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494 : 조선의 역사 36 (세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494 : 조선의 역사 36 (세종실록 4)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1.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태종은 재위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첯 번째 선위 파동은 1406년에 일어났는데 이때 양녕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어린 양녕을 대상으로 태종이 선위 표명을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심으로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려는 포석이었다.
제1차 선위파동 때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자,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하고 슬그머니 선위 문제를 접은 것은 태종의 내심을 잘 드러낸 일이라 하겠다.
그 이후에도 태종의 선위 표명은 세 번이나 계속된다. 태종의 선위 표명이 있을 때마다 조정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고, 그것은 민무구 형제의 죽음과 세자 폐출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태종이 마흔도 안 된 시절부터 계속해서 선위 표명을 한 것은 원경왕후 민씨와 민무구 형제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함이엇다. 표면적으로는 몸이 노쇠하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으니 민무구 형제의 권력 팽창을 견제하고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태종은 왕권 행사에 저해 요소가 되는 외척 세력을 약화시킨 뒤, 자신은 일찍 상왕으로 물러앉아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권을 보호하고 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권력의 마지막 보루인 군정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계확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의 이런 계획은 자신의 급작스런 죽음에 대비한 측면도 있었다. 자신이 갑지가 죽는다 하더라도 왕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지만 선위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사실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 태종은 내심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근본적으로 태종이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던 면도 있었지만, 양녕의 왕위 계승이 자칫 외척들의 발호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양녕은 어린 시절에 외가에서 자란 탓에 외삼촌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따라서 양녕이 세자가 된 뒤로 민무구 형제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이 세자의 안위를 위해 효령과 충녕 등의 대군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태종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다 많은 대신들까지 미래의 권력 핵심이 될 민씨 형제들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태종의 선위 파동은 그러한 민씨 형제들과 세자를 떼어놓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양녕은 그런 태종의 우려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제왕 수업에는 관심이 없고 탈선과 유흥에 빠져 대궐을 월담하여 드나들며 엉뚱한 짓만 계속하자 태종은 세자에 대해 회의감을 품기 시작하였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페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세 번째 선위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양녕이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년 만에 폐위된 것은 순전히 태종의 뜻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레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을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이후 태종은 네 번째 선위파동을 일으켜 기어코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기에 이른다.
양녕의 폐세자 사건과 관련하여 야사에서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짓을 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양녕을 미화시키기 위한 야사의 추론일 뿐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한편 양녕은 자라면서 절친하게 지내왔던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를 태종이 모반죄도 아닌 특별한 이유없이 유배보내 죽이는 등 무자비한 피의 숙청과 강압통치에 환멸을 느끼고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돌변하였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녕의 폐륜행태를 보면,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말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찿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염집 처녀를 납치해 강간하는가 하면, 기생을 몰래 동궁으로 들여 아이를 배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듯 양녕은 애초에 제왕이 될 자질이 없는 인물이었고, 태종은 일찍 그 점을 간파했지만 차마 폐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세자의 페륜 행각이 극을 향해 치닫자, 결국 그를 내쫓기에 이른 것이다.
양녕대군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으로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폐위되었다.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이었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과 경회루 등의 현판에 이름을 썼다.
출생과 왕자 시절
양녕대군은 1394년에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곧 양녕군에 책봉되고, 아버지 정안대군이 1400년 왕으로 즉위하면서 양녕대군으로 진봉하였다. 1402년(태종 2) 3월 8일 제(褆)란 이름을 받았고 동년 4월 18일에 원자로 책봉되었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세자 시절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년 9월 25일 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단산부원군 이무(李茂), 계성군 이래(李來), 제학 맹사성(孟思誠), 총재 이현(李玄), 서장관 집의 허주(許稠)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여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를 열심히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세자 폐위 이후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망
1462년(세조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4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사후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금천군 강적골 곤좌간향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의 42번지 곤좌간향이다.
가족 관계
본부인 수성군부인 광산김씨에게서 3남 5녀를, 첩실에게서 7남 12녀를 두어 자녀수는 총 10남 17녀이다.- 정부인 : 수성부부인 광산김씨(隨城府夫人 光山金氏) - 광산군(光山君) 김한로(金漢老)의 딸
- 적1남 : 순성군(順成君) 희안공(僖安公) 이개(李豈)
- 적2남 : 함양군(咸陽君) 이안공(夷安公) 이포(李布)
- 적3남 : 서산군((瑞山君) 이혜(李?)
- 적1녀 : 영천군주(永川郡主) - 지돈녕 이자에게 출가(出嫁)
- 적2녀 : 현주(縣主) - 중추부사 이번(李蕃)에게 출가(出嫁)
- 적3녀 : 영평현주(永平縣主) - 주부 김철균(金哲勻)에게 출가(出嫁)
- 적4녀 : 현주(縣主) - 군수 박수종에게 출가(出嫁)
- 적5녀 : 재령군주(載寧郡主), 이자(李孜)에게 출가(出嫁)
- 이름 미상
- 서1남 : 고정정 이겸
- 서2남 : 장평부정 이흔, 사후 도정으로 추증됨. 이승만의 15대조
- 서3남 : 계천도정 이성
- 서4남 : 봉산부정 이순
- 서5남 : 안창정 이심
- 서6남 : 밀산부정 이광석 (선원계보에는 밀산(密山)부정으로 쓰여 있으나, 실록에는 돌산(突山)부정으로 기록됨)
- 서7남 : 금지부정 이광근
- 어리
- 서1녀 : 상장 이종경의 처
- 이름 미상
- 서2녀 : ?현주, 부령 김암의 처
- 서4녀 : ?현주, 현감 김승간의 처
- 서5녀 : ?현주, 사직 김오의 처
- 서6녀 : ?현주, 현령 김원의 처
- 서7녀 : ?현주, 좌리공신 영의정 청성부원군 한치형의 초취(첫번째부인)
- 노비 출신
- 서3녀 : ?현주, 부사 권치중의 처
- 서8녀 : 현주 이구지, 별좌 권덕영의 처
- 이름 미상
- 서9녀 : ?현주, 창승 ?석번의 처
- 서10녀 : ?현주, 봉사 김의의 처
- 서11녀 : ?현주, 정남 임중의 처
- 서12녀 : ?현주 이건이
야화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이 있는 절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은적이 있었다. 효령과 중들이 그걸 말리려했지만 양녕의 말 한마디로 모두 잠잠해졌다. "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형님이고 내가 죽어서는 불자의 형님인데 내가 무엇이 두렵겠느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종보다 오래 살며 사냥도 하고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시
“ | '영매'(詠梅) 讀書三月不窺園 / 글 읽노라 정원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
” |
“ | 제향산승축(題香山僧軸) 山霞朝作飯 / 산의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
” |
아들 서산군의 울화병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의 세종 32년의 기사에 의하면 3남 서산군의 비행과 사고 원인에 대해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혜(譿)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라는 것이다.
노비 왕손
양녕대군에게는 노비 출신 첩에게서 얻은 딸과 노비 외손녀가 있다. 양반이 여종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중인이 되고, 왕족이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는 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왕족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왕족이나 양반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조선의 법률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할 수 없다.[4] 그의 8번째 서녀 이구지는 남편 권덕영의 사후 권덕영의 종 천례(天禮)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는데 이름은 준비(准非)이다. 준비는 1488년 무렵 평민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의 인적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종과 간통하여 얻은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간통 사실이 드러나 김종직 등의 탄핵을 받고 관아로 끌려가 추국당하면서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구지는 사사되었으나, 종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준비는 이미 시집갔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평가
김시양은 평가하기를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차례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세종이 여러 번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형제간의 지극한 정의가 이를 데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496 : 조선의 역사 38 (세종실록 6) (0) | 2012.02.15 |
---|---|
한국의 역사 495 : 조선의 역사 37 (세종실록 5) (0) | 2012.02.14 |
한국의 역사 493 : 조선의 역사 35 (세종실록 3) (0) | 2012.02.12 |
한국의 역사 492 : 조선의 역사 34 (세종실록 2) (0) | 2012.02.11 |
한국의 역사 491 : 조선의 역사 33 (세종실록 1) (0) | 2012.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