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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6 : 조선의 역사 38 (세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2. 15. 12:19

 

 

 

한국의 역사 496 : 조선의 역사 38 (세종실록 6)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2. 세종의 왕도정치와 조선의 영화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폐위된 양녕 대신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조선 제4대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대는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고,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세종 집권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 있었기에 정치는 아직 태종의 영향력 있었다. 세종 대에는 개국공신 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왕도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세종시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 1437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한다. 세종은 이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재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나갔다. 또 언관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없어졌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유교정치의 진전에 의한 것이었다.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 유교적 제도의 정리가 가능하였고 편찬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인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 서사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세종의 건강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었기에 정부가 과다한 육조직계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세종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간강이 상당히 악화되었지만 의정부 서사제의 정착에 힙입어 오히려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 이는 황희를 비롯한 맹사성, 최윤덕, 신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신중하고 치밀한 보좌와 관료들의 탄탄한 정치기강, 언관들의 이상적인 유교정치 구현 노력 덕분이었다.

 

세종 대의 이러한 업적은 집현전의 효율적인 운영에 따른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조 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 3년 1421년 3월에 확대, 개편된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학문에 전념할 수 잇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집현전에 소속된 관헌은 경연관, 서연관, 시관, 사관 등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편찬 사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세종은 이들 관원 중에 학술에만 몸 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관직으로 이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 또는 20년씩 머물도록 해주었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두입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환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하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과학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같은 천체 관측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양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엿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하여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시전에 올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 대가 이와 같은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을 훌륭하게 보필한 신하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이들의 보필을 수용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대한 경도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과 신념, 백성과 신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인간애 등을 고루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업적을 일구어내는 구심체였다.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놓은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하여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18남 4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김종서

 

김종서(金宗瑞, 1383년 ~ 1453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명장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로 도총제(都摠制) 김추(金錘)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김종서는 흔히 무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그의 6진 개척을 통한 북방 경영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생겼다. 조선 초까지는 조선의 북방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부친과 선대의 고향이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이었으므로 전남 순천 출신으로도 본다.

 

생애

김종서는 1383년 (우왕 9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번지에서 아버지 김추(金錘)와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 성주 배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스물두 살인 1405년(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15년(태종 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고, 1418년(세종 원년) 11월 사헌부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조사토록 하였다. 1419년(세종 1년) 3월에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이어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꾸준히 관료로서 성장해 나갔다.

 

1420년(세종 2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었고,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으며, 1426년(세종 8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후 1427년(세종9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었으며, 1433년(세종 15년) 좌대언으로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명령받았다.

 

같은해인 1433년(세종 15년)에 최윤덕의 파저강 정벌에 이어 북방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함길도(함경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임명되어 국경 지역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명하여, 고려윤관이 쌓은 9성 중에 공험진이 어디인지를 실제로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하였고, 그것을 확인한 뒤 김종서로 하여금 공험진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 과정 중에 약 7~8년간 노력한 결과 개척된 것이 6진인데, 이는 두만강까지 경계를 이루는 현재의 국경선이 되었다. 다시 반환하자는 반대론이 상당했다고 당시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를 겸직하며, 양인의 정세를 탐지·보고하여 그 비변책(변방을 지키는 방법)을 건의했고, 1440년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낸 후, 1445년(세종27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었으며, 1446년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1449년 권제(權踶) 등이 수정하여 쓴 《고려사》가 공정하지 못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그 총책임을 맡아 1451년 간행했다. 평안도 도절제사를 거쳐 1450년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을 거쳐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다.

 

김종서는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하하면서 김종서를 고명대신으로 정하고 단종을 잘 보호해 달라는 유고를 남겼다. 이는 정치적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의식해서 그런 말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해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보필했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선왕인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좌의정으로서 황보인·정분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를 획책하려는 야망을 품던 수양대군계유정난 중에 보낸 자객들에게 철퇴를 맞고 심한 부상을 입고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했으나, 양정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거사 다음날 아침에 자신의 아들인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 민신, 이양 등과 함께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梟示)되었다.

 

사후

그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는 매우 커서, 그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조정에서 자신이 김종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된 후, 박호문을 도절제사로 임명해 함길도로 보낸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박호문의 목을 자른 후, 대금황제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고, 이는 1467년이시애의 난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46년, 영조 때 신원되어 누명을 벗었다.

 

후대인 1678년(숙종 4)에 이르러서야 김종서의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에 있다.

            

 

 

6진 개척

남부 만주지방에는 만주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하여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흉년으로 인해 국내문제 해결에 급급하는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백성이 굶주리고 나라재정이 바닥났다고 하여 오랑캐가 쳐들어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여진족이 뭉쳐서 군사가 일만이 되면 망한다고 경고한 사람이 있는데도 요나라는 여진족에 대한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다가 패망 했습니다.
 
— 김종서, 세종 29년 (1447년) 7월 27일, 세종실록

 

결국,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 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김종서는 그후 세종 22년(1440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 조정으로 돌아온다. 세종의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농토가 없는 농민에게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고,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문학 작품

김종서가 무장으로 유명하나, 원래는 문과에 급제한 문인이다. 그는 안평대군의 시회에 참석하여 '몽유도원도시축'에 오언고시를 남겼다. 문신으로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등의 간행에 힘쓰기도 하였다.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셕은 져 션비야, 우리 아니 사나희냐.
엇더타, 능연각(凌練閣) 상(上) 뉘 얼골을 그릴고

삭풍(朔風)은 나모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듸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집고 셔셔
긴 바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거시 업세라

  • 의미: 나라에 공을 세워 기린각에 초상화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썩은 선비가 아니라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라는 무인의 기개를 나타내었다.

 

송시열, 송준길 가문과의 관계

송준길의 7대조이며 송시열의 8대조 계사(繼祀)는 판관을 지냈으며 김종서의 동생 김종흥(金宗興)의 딸과 혼인했다.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공주에 숨어 있던 집안이다. 순천김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요년(遙年)과 순년(順年)을 두었다. 계사의 자소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이 요년과 순년 형제에서 갈라진다. 순년의 6대손이 송시열이다. 그리고 요년의 5대손이 송준길이었다.

 

가계

  • 조부 : 김태영(金台泳)
  • 부 : 김추(金錘)
  • 모 : 성주 배씨
  • 형 : 김종한
  • 배위 : 파평윤씨
  • 제 : 김종흥
  • 자 : 김승규, 김승벽, 김승유, 김목대(서자), 김석대(서자)

 

 

 

 

 

김승유

 

김승유(金承琉, ? ~ ?)는 조선의 문신으로 김종서의 3남이다.

 

생애

본관은 순천이다. 승정원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간신히 살아남아 남한산 기슭에서 죽을 때 까지 신분을 감추고 연명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야담을 모아 한 데 묶은 '동자민설'(1896) 에는 흔히 세조의 맏딸로 알려진 의숙공주 위에 역사 기록에서 삭제되고 감추어진 언니가 있었으며, 일찍이 김종서의 삼남 김승유와 인연을 맺어 함께 아버지 세조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 짧은 기록에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가 기획되기도 하였다

 

가족관계

  • 아버지 : 김종서
  • 부인 : 여흥 민씨
    • 아들 : 김효달
    • 며느리 : 하남 정씨
      • 손자 : 김석균
      • 손자 : 김석린

 

드라마와의 차이점

KBS 특별기획 드라마 공주의 남자김승유

  • 드라마에서는 부마도위에 오를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기록이 빈약하며 중요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 드라마에서는 수양대군의 딸인 '이세령'과 연이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계유정난 이전에 이미 혼인을 한 상태로, 공주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 드라마의 모티브인 야사에서는 수양대군의 딸인 '이세희'와 연이 있는 사람은 김종서의 아들(김승유)가 아닌 김종서의 손자(김차동)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