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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0 : 조선의 역사 42 (세종실록 10)

두바퀴인생 2012. 2. 19. 06:29

 

 

 

한국의 역사 500 : 조선의 역사 42 (세종실록 10)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5. 언어학사의 혁명, 훈민정음 창제 

 

문자 창제 작업 시기는?

세종은 언제부터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시작했을까?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기사에서 세종은 최만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작은 일이라도 동궁이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이 말는 세종이 세자에게 훈민정음 반포 사업을 주관토록 한 점에 대해 불만을 품은 최만리에게 내세운 논리였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당시 세자 향에게 정무 처결의 서무를 모두 넘긴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구조도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변화시킨 상태였다. 말하자면 자신의 업무를 대폭 줄여 세자와 정승들에게 상당부분 할애한 것이다.

 

육조직계제는 말 그대로 육조의 업무를 왕이 직접 챙기는 구조다. 따라서 왕의 업무가 과중하고 피로도가 심할 수밖에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의정부사서제는 정승들이 육조를 챙겨 서로 협의한 뒤에 일괄 보고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육조직계제에 비해 왕의 업무가 훨씬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세종이 이 같은 구조적 변활르 꾀한 것은 재위 18년 1436년이었다.

 

거기다 이듬해인 1437년에는 서무 결재권을 세자에게 넘겼다. 세종의 이 두 가지 결정의 근거는 그의 지병이었다. 세종은 젊어서부터 소갈증(당뇨)을 앓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과중한 업무를 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의정부사서제는 신하들도 원하던 일인 까닭에 조정에서 쉽게 수용되었지만 서무 결재권을 넘기는 문제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세종은 굽히지 않았다.

 

세종이 의정부사서제를 추진한 때의 나이가 마흔이고,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긴 때가 마흔한 살이었다. 비록 조선시대라는 점을 감안해도 한창 일할 나이였다. 그런 까닭에 세종은 나이를 핑계거리로 삼을 순 없었고, 결국 지병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최만리에게 말할 때 병 때문이라는 말은 없었고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41세의 그가 나이 때문에 세자에게 임금의 가장 주요한 업무인 서무 결재권을 남겨줬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즉, 세종이 서무 결재권을 넘겨준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는 뜻이다.

 

묘하게도 세종이 운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점부터였다. <세종실록> 22년 6월 26일의 다음 기록은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경연에 보관되어 있는 <국어>와 <음의> 1책은 탈락된 곳이 몹시 많아 중국에서 딴 판본 한 책을 구해왔는데, 빠지고 없어진 곳이 많았으며, 주해도 역시 소략하였다. 일본에서 또 상세한 것과 소략한 것 두 본, 보음 세 권을 구해왔으나 또 완전하지 못했다. 이에 집현전에 명하여 경연에 간직하고 있는 구본을 중심으로 여러 판본들을 참고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탈락된 곳을 보충하게 하였다. 동시에 음의와 보음에서 번잡한 것은 정리하여 해당 절목 아래 나누어 넣고 그래도 완전치 못한 것은 운서로 보충하라고 하였다. 뒤이어 주자소에 지시하여 그대로 찍어서 널리 배포하라 하였다." 

 

경연이 보유하고 있는 책은 주로 왕이 읽거나 왕을 위한 강의용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세종이 1440년에 이미 많은 운서를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하여 섭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세종은 잘못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할 정도로 각 운서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파악한 상태였다. 또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 사람을 보내 책을 구해왔다. 그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하여 새로운 책을 만들고, 또 인쇄하여 배포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세종이 그토록 운서에 집착한 이유는 바로 새로운 문자를 고안하기 위해서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즉,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 1436년에 정부구조를 의정부사서제로 바꿔 업무량을 대폭 줄였고,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자 1437년에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까지 넘겼던 것이다. 이후 세종은 우선 운서를 섭렵하여 언어학적 지식을 쌓았고, 그 지식이 깊어지자 마침내 본격적으로 새로운 문자 창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운서에 몰두하던 143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은 왜 새로운 문자를 원했을까?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에 대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결정한 과정은 이 한 문장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했다.

 

세종이 스스로 말했듯이 훈민정음 창제 취지는 백성들이 자신의 의사를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더 직접작인 이유는 당시까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고 있던 이두의 문제점 때문이었다.

 

조선은 태조 때 <원육전>을 이두로 편찬하여 관아에서 아전과 관리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겐 이 일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자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위 14년 11월 7일에 율문을 이두로 번역하여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정사를 보다가 세종은 좌우 군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경중을 알게 되는 법인데,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어찌 자신이 범한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칠 수 있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율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겠으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고, 이리석은 남녀로 하여금 스스로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하겠는가?

 

이때가 1432년으로 세종의 나이 36세 때엿다. 정년의 열정으로 가득하던 세종이 그야말로 백성들의 입장에 서서 내놓은 속 깊은 발상이었는데, 이조판서 허조가 면전에서 반박하고 나섰다.

 

"신은 폐단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들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골라내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생길 것 입니다."

 

세종이 허조를 무섭게 쏘아보며 나무랐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알지도 못하고 죄를 범하는 것이 옳다는 것인가?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법이 한낱 조삼모사의 술책밖에 더 되겠는가? 더욱이 선대의 대왕께서 율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인데, 경들은 고전을 상고하여 의논하여 아뢰라."

 

허조가 물러가나 다음에 세종은 승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조는 백성들이 율문을 알게 되면 쟁송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웃사람을 능멸하는 폐단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름지기 백성으로 하여금 법률로 금지하는 법을 알게 하여 두려워 피하게 함이 옳지 않겠는가?"

 

세종은 곧 집현전에 명령하여 옛적에 백성들에게 법률을 익히게 했던 일을 상고하여 정리해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두로 법률을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왜 이 일이 추진되지 않았는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두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성 때문인 듯하다. 이두는 비록 한문에 비해 쉽긴 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한자라도 알아야만 읽어낼 수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에겐 그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설사 법률을 이두로 옮겨 백성들에게 전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었다.

 

그 뒤에 세종은 또 일반 백성들에게도 유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서에 이두 번역문을 함께 표기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초 등의 학자들이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여 포기하였다.

 

결국 세종은 이두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잇는 문자를 반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하였고, 그것이 훈민정음 창제로 이어진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보자면 만약 이두가 일반 백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 불편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두의 불편함과 한계성이 곧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