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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6 : 조선의 역사 48 (세종실록 16)

두바퀴인생 2012. 2. 25. 16:13

 

 

 

한국의 역사 506 : 조선의 역사 48 (세종실록 16)

 

 

 

 

 

 

 

제4대 세종실록(1397~1450년, 재위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6개월)

 

 

6.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세종시대의 영화를 가능케 했던 가장 큰 요인은 경제적인 안정이었다. 

 

당시의 사회가 노경사회였던 만큼 경제적인 안정은 곧 농업과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발전은 이에 관한 실용 이론서의 간행에서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칠정산내.외편>과 <농시직설>이었다. 이 책들은 주로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는데, 이 집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초였다. 특히 <농시직설>은 개인에 의해 집필된 최초이자 최고의 실용 농학서였다.

 

정초는 <농사직설> 이외에도 음악서인 <회례문무악장>, 윤리책인 <삼강행실도> 등을 지었다. 게다가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 관측대인 간이대 제작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초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세종조에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고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책들을 편찬하였는대도 이렇듯 그에 대해 기록이 전무한 것은 아마 세종의 업적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정초, 정인지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칠정산내편>과 <외편>이 없었다면 장영실의 천체 연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칠정산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에 대한 해설서였고, <외편>은 회회력 즉 지구와 우주의 움직임 및 그 역일, 각도 등에 대한 해설이다.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칠정'이란 일, 월과 화, 목, 토, 금, 수 등 오행을 기리킨다. 말하자면 <칠정산내.외편>은 태양과 행성들의 운행을 다루고 있는 천체력이었다. 물론 <내편>과 <외편>은 큰 차이가 있었지만, 장영실 등은 정초의 지도 아래 이 책에서 기술된 원리를 응용해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한편 변호문의 도움을 받아 정초가 쓴 <농시직설>은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종은 당시 농사법의 개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농믽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실용 농서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사시친요>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복구경험방>이 있긴 했지만 그 책으로 농민들을 계몽하기에는 무리였다.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농업 방식에서도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직설>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책이었다.

 

이 책은 무엇봊다도 곡식의 재베에 중점을 둔 책이었다.곡식 재배에 필요한 수리, 기상, 지세 등의 환경 조건도 상세히 기술하여 농민들이 어ㄸ너 환경에서 어ㄸ너 곡식을 재배하면 유리한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정초는 이 책을 짓기 위해 실제로 각 도 농민들의 재배법을 확인하는 한편, 농미;ㄴ들의 경험담을 기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되어 각 도의 감사와 주, 부, 군, 현 및 장안의 2품 이상 관리들이 모두 소장하게 하였다.

 

이후 <농사직설>은 판을 거듭하여 조선 농업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했으며, 성종 때 간행된 내사본은 일본으로 전달돼 일본 농업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뒤에도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 기타 여러 농서에  그 내용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정초는 이 책의 서문에서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 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점이 곧 <농사직설>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즉 각 지역에 따라 그곳에 알맞는 농사법을 수록했는데, 이는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사항이었다.

 

정초의 이러한 농업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중농주의 실학자의 선구자였던 셈이었다.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시대의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종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30년의 격차를 두고서 이종무는 세종의 전반기, 김종서는 후반의 국방을 도밭았다.

 

이종무는 136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어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골로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이후에도 왜구 격퇴에 앞장섰으며, '제2차 왕자의 난'때에는 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종무가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오른 것은 한 달 뒤인 1419년 6월 19일이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 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되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 후 찬성사로 승격되엇으며, 한때 대간들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복권되었고, 이후 부원군이 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을 위협하는 세력에는 왜구 이외에도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던 북변의 여진족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끓임없이 반반도 진입을 시도했으며 조선 초에도 그들의 내습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두만강 주변에 여섯 성을 개척하도록 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이 일을 김종서가 맡았다. 김종서가 약 10년간의 노력 끝에 육진 개척을 완수하고 나서야 조선은 비로소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다.

 

김종서는 이종무보다 30년 뒤인 1390년에 태어났다. 이종무가 고려 망국의 세대라면 김종서는 이른바 조선 개국 세대였던 셈이다. 흔히 무신으로 알려져 있는 김종서는 16세 되던 해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에 상서원 직장을 지냈으며 <태종ㄹ실록>편찬을 주관한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문신니었다. 이후 광주판관, 이조정랑을 거처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육진 개척에 투입된 그는 약 10년 가까이 육진 개척에 전념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짓는 성과를 올렸다.

 

김종서의 육진 개척은 서북 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으로 북계를 확정지을 수가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 끓임없이 계속되던 여진족의 내침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날 수가 있었다.

 

육진 개척 후 김종서는 경상 3도순찰사,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문종 대에는 죄의정에 올라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1452년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7. <세종실록> 편찬 경위 

 

세종실록은 총 163권 15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다. 이 책은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 세종 재위 31년 6개월 동안의 각 방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에 따른 편년체와 각 주요 항목에 대한 세부 기록인 지(志)로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편찬 작업은 1452년 2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이후 시작되엇다. 편찬 작업의 감수는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등이 맡았고, 허후, 김조, 정창손, 박중림, 이계전, 신석조 등 6명이 재위기간을 여섯으로 나눠 실질적인 편찬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물 중에 김종서, 황보인 등이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자 정인지 혼자서 감수를 책임지게 되엇다. 또한 6방의 책임수찬관 가운데 박중림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어 최항이 그 일을 대신 맡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은 단종 원년인 1452년 정월에 거의 마무리되엇지만, 감수 작업은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어 2년 1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처음에는 한 벌만 만들어 춘추관에 두었다가 1466년 세조 12년 11월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에 이미 편찬되어 있던 <문종실록>과 함께 주자로 인쇄를 시작해 6년 후인 1427년 3부를 더 찍어냈다.

 

이때 간행된 <세종실록>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봉인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 사고본을 바탕으로 1603년부터 1606년에 걸쳐 <태종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각각 3부를 다시 간행하였다. 이 당시 최종 교정본을 포함하여 전주사고본과 함께 총 5부를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에 보관하였다. 그 뒤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의 난을 겪으면서 춘추관실록이 소실되고 일부 실록이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하여 인조 대 이후 실록은 강화도 정족산, 태백산, 전북 무주 적장산,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영인본을 반들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영인본을 보급하였다.

 

<세종실록>은 1구너부터 127권까지 편년체로 구성되어 잇으나 128권에서 163권까지는 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을 하게 된 이유는 세종의 재위기간이 길고 사료의 양이 방대하여 편년체로는 도저히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지(志)는 일종의 주제별, 사건별 정리 방식으로 오례(128~135), 악보(136~147), 지리지(148~155), 칠정산(156~163) 등으로 되어 있다.

 

세종 대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 제도, 예, 악 및 기타 문화 방면에서 획기적인 사업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세종 대엔 조선 사회가 전체적으로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어 정착기에 진입한 시기였다. <세종실록>은 이렇게 발전되는 과정을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