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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6 : 고려의 역사 54 (제4대 광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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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6 : 고려의 역사 54 (제4대 광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7. 1. 02:10

 

 

한국의 역사 286 : 고려의 역사 54 (제4대 광종실록 3)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1. 광종의 과감한 개혁과 호족들의 수난(계속)

과거제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 세력에게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고려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 실시는 그들 자제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또한 과거제 실시와 함께 960년에는 관료들의 공복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종의 이같은 왕권강화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호족 세력은 서로 힘을 합쳐 조직적으로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광종은 근위병의 수를 늘리면서 호족들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던 중 역모와 관련한 고변이 들어오자 광종은 호족들에 대하여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이것이 광종 치세 3기로 접어드는 계기이다.

 

호족 숙청의 출발점은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을 역모혐의로 고변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으로 대상 준홍, 좌승 왕동 등이 쫓겨나고 광종의 주변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된다. 광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군마저도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세자인 주(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민감해진다.

 

이 때의 상황을 최승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경신년(960년, 광종 11년)에서 을해년(975, 광종 26년)까지의 16년간은 간악한 자들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둘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 뜻대로 되었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옛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골육이나 인척도 모두 멸하였다. 하물며 혜종이 능히 형제를 보전한 일과 정종이 능히 나라와 가문을 보존한 일은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 수 있는데, 두 왕 모두 하나뿐인 아들마저도 그 생명마저 보전치 못하게 하였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아들까지도 의심하여 꺼렸다. 그런 까닭에 경종은 태자로 있을 때 항상 불안에 떨다가 다행스럽게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최승로의 글에서처럼 집권 후반기의 광종은 그야말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숙청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호족들은 역도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 몸을 사렸고, 한편으로는 광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광종 후반기에는 중국의 정세도 급면하고 있었다. 후주가 물락하고 송이 일어나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 광종은 이같은 중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960년 광종 11년부터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여 황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다가 송이 후주를 무너뜨린 후 안정을 찿고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자 963년 12월부터 송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고려가 이처럼 몇 번에 걸쳐 연호를 변경한 것은 대외관계에 밝고 외교적 대응이 기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주가 몰락해가는 상황에서 굳이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 송을 적으로 둘 이유가 없다는 판단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경을 황도로 칭하면서 고려가 중국의 주변국이 아니라 황제가 거하는 중심국가임을 변방에 알리려고 하였다.

 

광종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활을 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통해 신진 세력이 대거 동참함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이외에 국방 분야에서도 광종의 치적은 뚜렸하게 드러난다. 여진족이 머물고 있던 동북면과 서북면 방면으로 군사력을 집중시켜 영토를 넓혔으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병력을 증강시켰다.

 

하지만 그는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 역모에 대한 경계가 너무 심해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다.

 

왕권강화와 국가의 안정을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하며 때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고려의 위상을 높이고, 때로는 중원의 연호를 사용하여 외교적 이익을 노렸던 광종은 결국 975년 5월에 병으로 몸져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재위 26년 2개월 만인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헌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