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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3 : 고려의 역사 51 (제3대 정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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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3 : 고려의 역사 51 (제3대 정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6. 27. 05:14

 

 

 

한국의 역사 283 : 고려의 역사 51 (제3대 정종실록 3)

 

 

제3대 정종실록

(923~949, 재위 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2. 정종의 짧은 치세와 서경 천도계획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외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준다.

 

정종은 신명순왕후 유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 자는 천의이다. 923년에 태어난 그는 신명순왕후의 두 번째 소생이며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신명순왕후의 첯 번째 소생인 태가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그가 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태조의 차남이었지만 그는 장남 혜종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지지기반이 튼튼한 그는 왕규에 의해 역모자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혜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945년 9월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런 성품이면서 한편으로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서경 천도를 천명했다. 개국 초기부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개성의 지기가 나빠졌고, 고구려의 고토회복을 위해서도 평양이 유리하다는 것이 천도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왕성을 옮기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와 지나치게 대립한 데다가 즉위 이후에는 개경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해 버렸기 대문에 개경 백성들의 민심이 그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 천도 계획의 본질적인 이유였다.

 

서경 천도가 조정의 공론으로 확정되자 정종은 시종 권직을 앞세워 궁궐 공사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궁궐 공사는 947년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개경 백성들을 뽑아서 부역에 동원하고, 엄청난 자재와 식량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지만 정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경 천도 계획과 더불어 정종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군 30만을 조직하였다. 정종이 광군 30만을 조직하겠다고 마음먹게된 동기는 최광윤의 거란 내침에 관한 보고 때문이었다. 최광윤은 후진에 유학을 갔다가 거란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주를 인정받아 벼슬을 하고 있던 중,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에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광군은 호족군 연합체였다. 30만이라는 대군읋 형성했던 것을 보면 일종의 예비군이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30만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정규군으로 이렇게 많은 숫자를 유지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종은 광군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을 가졌다. 호족들을 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광군사를 두어 그들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그러나 정종의 이러한 계획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 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등을 돌리까 봐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즉위하자 곧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안하기도 했고, 곡식 7만 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진흥책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948년 9월 동여진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 필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 때 손수 이 물건들을 검열하다가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다.

 

그 일로 인해 그가 병석에 눕자 백성들은 머지않아 부역에서 헤어날 수 있다며 좋아하였고, 이 같은 민심을 전해들은 정종은 점차 기력을 잃었다.

 

949년 정월, 병상에서 그는 태조의 사촌동생이며 개국공신이요, 서경파의 거두이며 서경 총관이었고 정종 즉위에 서경군대를 몰아 개경파를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왕식렴의 부고를 접해야 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3월에 병이 더욱 위독해져 동복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이 때 그의 재위 연수는 4년이요, 향수는 27세였다.

 

그가 죽자 서경 천도 계획은 취소되었고, 왕성 건립도 중지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부역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환호했다.

 

성종 대의 최승로는 '사무 28조'와 함께 올린 '5조 치적평'을 통해 서경 천도 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정종은 도참을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 고집을 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처 서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정종은 문공왕후 박씨,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 등 3명의 부인을 두었고, 문성왕후 박씨에게서 경춘원군과 공주 1명을 얻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자매로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다. 이들은 태조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데,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 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률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의 친동생이다. 청주 호족 김긍률은 당시 충주 유씨와 더불어 유력한 호족 중의 하나였는데, 원래 태조 생존시 혜종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는 혜종의 세력을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고 서경파와 왕요에게 힘이 집중되자 왕요파에 붙어 정종에게도 둘째 딸을 후궁으로 보낸다. 말하자면 기회주의자로 청주 남원부인 김긍률의 호신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