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84 : 고려의 역사 52 (제4대 광종실록 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284 : 고려의 역사 52 (제4대 광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6. 28. 04:00

 

 

 

한국의 역사 284 : 고려의 역사 52 (제4대 광종실록 1)

 

광종(光宗, 925년~975년)은 고려 제4대 국왕(재위: 949년~975년)이다. 는 소(昭), 는 일화(日華), 정식 시호광종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光宗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로서,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이자 요절한 왕태, 정종(定宗)의 동생이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로 태조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배다른 형 혜종의 딸이다.

 

생애

925년에 태조의 넷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규에 의해 왕위를 노린다는 고변을 듣게 된 혜종은 그를 시험하였고, 이어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를 후궁으로 주었다. 그러나 뚜렷한 혐의가 없었으므로 혜종은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

 

949년 음력 3월 형인 정종선위를 받아들여 2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치세

왕권 강화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국가의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위한 후, 광종은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광종은 기존의 중국의 연호를 받아다 쓰던 관례를 폐지하고 950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에 주(後周)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년~963년), 963년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년~968년).

 

광종은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 부르도록 하였다. 그의 치세 이후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를 도입하여,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노비안검법

956년에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원래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광종은 이 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크게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하여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안정되어갔다.

 
과거제도 실시

광종은 문벌귀족, 관직을 세습하거나 금전으로 관직을 매매하는 문벌귀족의 세습을 방지하고자 중국에서 실시되는 과거시험에 관심을 가졌다. 이어 광종은 사신을 후주에 파견하여 과거 제도의 시행을 알아보게 하기도 했다. 958년에 후주(後周)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호족 숙청

960년에는 권신(權信)이 준홍(俊弘),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 외

961년 4월 홍수가 나자 광종은 궁궐 수호와 복원의 목적으로 수영도감(修營都監)을 설치하고 당숙인 정광(正匡) 왕육(王育)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975년에 승하하였으며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헌릉(憲陵)이다.

 

비판

그는 개혁 과정에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 호족은 물론 혈육과 친인척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 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역모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물론 가족과 친척마저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그로 인해 귀족과 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등도 숙청을 당하였다.

 

한편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를 없애려 했다.

 

가계

  • 대목왕후 황보씨
    • 아들: 고려 제 5대 국왕 경종(景宗,955~981, 재위: 975~981)
      • 손자: 목종(穆宗,980~1009 재위: 997~1009) - 고려 제 7대 국왕.
    • 아들: 효화태자(孝和太子)
    • 딸: 천추공주(千秋公主)
    • 딸: 보화공주(寶華公主)
    • 딸: 문덕왕후(文德王后) : 성종의 정비
      • 손녀: 선정왕후(宣正王后): 목종의 비.
  •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 혜종의 딸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1. 광종의 과감한 개혁과 호족들의 수난

고려는 광종의 즉위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광종은 정종과 달리 집권 초기에 무리한 정책을 삼가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한동안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전환한다. 개혁의 초점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광종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광종 집권기는 왕과 호족들 간의 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며 이름은 소, 자는 일화이다. 925년 태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949년 3월 동복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25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큰 역활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이복형 혜종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 세력과 혜종 사이에 교량 역활을 하였다. 이는 혜종이 서경 세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광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보낸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광종은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최승로의 평에서도 나타나듯이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 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최승로는 그가 특히한 풍채와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태조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 이 같은 평가는 곧 광종의 기질과 풍모가 비범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독특한 기질은 치세에도 잘 드러난다. 광종의 치세는 정확하게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그 첯 번째 시기는 모색기로 즉위 이후 7년간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 시기는 왕권강화기로 7년에서 11년까지이고, 세 번째 시기는 호족 숙청기로 그 이후부터 집권 말기까지이다.

 

최승로는 이 세 시기 중에서 첯 번째 7년 동안의 정국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하.은.주 삼대와 견불만 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최승로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광종 즉위 7년 동안은 별다른 정치적 혼란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광종은 특별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도 않았고, 호족들과의 마찰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태조 왕건이 일궈놓은 호족연합체적 성격을 띤 지방자치제가 원활하게 운영되었던 것이다.

 

가장 유력한 호족인 충주 유씨와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의 후견 세력이었고, 청주 김씨 역시 정종시대 이후 중앙정부에 호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은 호족들에 비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은 오히려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렀을 뿐이고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주체는 이들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이런 정국을 무던히 지켜보면서 절치부심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국내 정국 주도권을 호족에게 내주고 조용히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갔다.

 

그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치적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나라 태종이 자신의 신하들과 정치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록한 <정관정요>를 숙독하였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왕들의 치세 교과서 구실을 했는데, 광종 역시 이 책을 통해 왕이 나아가야 할 행동 방향을 세우고 정책 입안 및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광종의 또하나의 관심거리는 고려의 대외 위상을 높이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그는 950년 '광덕'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때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중국 대륙에 확실한 맹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혼란기를 거듭하면서 '5대 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고려 건국 후부터 후량, 후당, 후진, 후한 등의 나라가 적게는 3년에서 길게는 20년 동안의 짧은 왕조를 세웠다가 사라졌다. 중국 대륙의 정세가 이처럼 급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고려는 시기마다 외교에 유리한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태조 대에는 후량, 후당, 후진 등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했다. 하지만 광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후한이 건국한 지 3년 만에 몰락하고 후주가 새로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형국에서 마땅히 사용할 연호가 없었던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고려는 그해 12월부터 다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고려가 후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외교적 경로를 이용해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거란은 호시탐탐 고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과 돈독한 외교적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원 국가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국가의 안정을 위한 실리적인 조치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