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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2 : 고려의 역사 50 (제3대 정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282 : 고려의 역사 50 (제3대 정종실록 2)
제3대 정종실록
(923~949, 재위 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1.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계속)
왕건이 죽은 943년, 당시 왕요의 나이는 21세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였던 만큼 그 역시 왕위에 대한 욕망은 강했다.
왕요가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을 주장하고 나서자, 종실에서도 그를 밀기 시작했다. 종실측은 왕요가 집권하는 것이 조정을 가장 안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종실 세력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왕식렴이었다. 그는 왕건의 사촌동생으로 서경 세력의 핵심이었다. 서경 세력은 왕건이 고려 건국 직후부터 평양을 서경으로, 개성을 수도로 삼아 양경정책을 실시한 이후 형성되었다.
왕건은 평양을 서경으로 할 것을 정하면서 왕전히 황폐해진 평양성을 복원하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사촌동생 왕식렴과 광평시랑 열평(평산 박씨로 츠정됨)을 보내 평양을 수비케 하였다. 당시 평양에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왕건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내고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 같은 왕건의 평양 복원 계획은 고구려 고토회복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정책으로서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구심체 역활을 하였다. 충청 이북 지방민들은 통일신라 통치하에서 고구려를 동경하였고,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을 땐 이것이 고구려 고토회복 열기로 되살아났다. 궁예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국호를 후고구려(또는 후고려)라고 하였던 것도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자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태봉이란 이름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궁예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왕건이 다시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며 고려를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비록 개경에 왕성을 건설했지만 평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양이 변방인 점을 감안하여 많은 병력을 배치했으며, 자신이 몸소 평양을 시찰하여 919년 10월에 드디어 평양성 복원을 완료하였다.
왕건은 평양성이 복원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훈요십조에서도 후대 왕들이 반드시 해마다 일정 기간 동안 평양성에 머무를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왕건의 양경정책은 고구려 고토회복의 측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한편으론 고려 조정을 둘로 갈라놓은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혜종이 집권하자 박술희, 왕규 등의 개경파와 왕식렴, 평산 박씨 등의 서경파가 서로 대립하여 세력 다툼이 본격화하였고, 여기에 왕요를 앞세운 충주 유씨 세력이 왕위 계승권을 목표로 서경파에 가세하자 힘은 완전히 서경파 쪽으로 기울었다.
혜종은 개경파의 지지 속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개경파를 중용하고 서경파를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박술희를 대광에 앉혀 문무백관을 통솔케하고 왕규를 요직에 앉혀 서경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따라 왕요 일파 및 서경파는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양쪽은 상대방 세력을 모함하여 정권다툼을 일삼았고 고려 조정은 신하의 거의 절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은 날로 심해지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하고 있던 혜종은 살상가상으로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혜종이 병상에 눕자 자연스럽게 개경파의 힘은 약화되고, 이 때문에 개경파를 지원하던 청주 김씨 등의 중립 세력이 서경파로 발을 돌린다.
중립 세력을 흡수한 서경파는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 박술희를 역적으로 몰아 귀양보내고 죽이기에 이른다. 박술희가 살해당하자 왕규를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총력전에 돌입하지만 이미 힘이 너무 약화된 탓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혜종이 임종하자 서경파는 무력으로 개경파를 제압하고, 개경파의 거두 왕규를 귀양 보내 죽이는 데 성공한다.
혜종은 임종을 앞두고도 왕요를 후게자로 지목하지 않았다. 이는 혜종이 왕요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흥화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혜종은 누차에 걸쳐 흥화군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겠지만, 그때마다 서경파는 흥화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도 흥화군보다는 왕요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 조정의 안정을 위한 길이라고 역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혜종은 박술희, 왕규 등 개경파의 도움으로 서경파의 압력을 이겨낸다. 이 때문에 서경파는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하지 않고는 왕요의 왕위 옹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를 미리 눈치챈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지만 힘이 없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왕요는 별 수 없이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한 이후에 서경파에 의한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왕 정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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