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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1 : 고려의 역사 49 (제3대 정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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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1 : 고려의 역사 49 (제3대 정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6. 25. 04:11

 

 

 

한국의 역사 281 : 고려의 역사 49 (제3대 정종실록 1)

 

제3대 정종

정종(定宗, 923년~949년)은 고려 제3대 국왕(재위: 945년~949년)이다. 는 요(堯), 는 천의, 정식 시호정종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定宗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이다. 정종은 태조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사이의 아들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생애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다.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朴述熙 혹은 朴述希)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태조의 사촌이자 서경의 군벌이었던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그는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개경의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경으로의 천도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개경의 호족들과 옛 공신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는 점점 불안해 했고 친동생인 왕소마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947년 후진에서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준비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군(光軍)사를 조직하고 30만의 군사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가계

  •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 박영규(朴英規)의 딸, 견훤의 외손녀
  •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 박영규(朴英規)의 딸, 견훤의 외손녀
    • 경춘원군(慶春院君)
    • 공주(公主) 1인
  • 청주남원부인 김씨(淸州南院夫人 金氏) : 신라 원보(元甫) 김긍률(金兢律)의 딸.

 

 

 

 

 

제3대 정종실록

(923~949, 재위 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1.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 고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노린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권력 기반이 약한 혜종이 즉위하자 호시탐탐 정권 장악을 노리고 있던 충주 유씨 세력과 서경파는 왕요 형제를 앞세워 혜종을 몰아내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하였다.

 

이 같은 왕요 세력의 팽창은 즉위 이듬해 혜종이 병을 얻자 더욱 가속화된다. 왕요 세력은 종실을 대표하는 왕식렴과 평산 박씨를 대표하는 박수경이 중심이 된 서경파, 왕요의 장인 박영규, 충주 유씨 가문 출신의 관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첯 왕후를 배출한 호족이다. 당시 왕건은 이미 두 명의 왕후를 두고 있었지만 제1비 신혜왕후 유씨는 출사하여 오랫 동안 비구니로 살아 왔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상태였고,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출신 가문이 한미하여 왕건의 왕권 강화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이들 두 왕후는 왕건이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혼인한 사이인 만큼 권력 구도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충주 유씨 신명순왕후는 왕권 구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호족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3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비였다.

 

신명순왕후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은 왕건 자손들이 출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화왕후 오씨가 혜종 한 명만을 생산하데 비해 신명순왕후는 5남 2녀를 생산했다. 이는 왕건이 즉위 이후에는 장화왕후와 거의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후에 호족 출신 왕후를 세 명 받아들이고, 신라왕조에서 한 명의 왕후를 맏아들였다. 이 중에서 신라왕조와 혼인관계는 권력 구도와는 무관한 의례적인 것이었겠지만, 나머지 세 왕후와의 결혼은 호족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즉위 후 첯번째 왕후를 충주 유씨 가문에서 얻었다는 사실은 당시 충주 유씨가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충주 유씨 다음으로 황주의 황보씨, 정주의 유씨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경기 주변 세력으로 왕건의 세력권내에 있었다. 따라서 황주의 황보씨나 정주의 유씨는 왕건이 충주 유씨를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호족도 충주 유씨의 힘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왕건의 견제정책이 있자 충주 유씨 역시 평산 박씨 등과 제휴하고, 종실 세력까지 끌여들여 여전히 조정 제1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이러한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외손 중에서 다음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건이 이미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박술희와 왕규의 힘을 빌려 장화왕후 오씨 소생 무를 태자로 책봉해둔 상태였다. 적어도 왕건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러한 권력 구도는 팽팽한 대립 상태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막상 왕건이 죽자 힘은 충주 유씨 세력에게로 쏠렸다.

 

막강한 힘을 갖추게 된 충주 유씨는 혜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들의 힘에 밀려 시름에 잠겨 있던 혜종이 병을 얻게 되자 외손 왕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세력을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