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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80 : 고려의 역사 48 (혜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6. 24. 07:08

 

 

 

한국의 역사 280 : 고려의 역사 48 (혜종실록 3)

 

제2대 혜종실록(계속)

(912~945, 재위 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2. 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계속)

즉위 2년 4개월 만에 혜종이 죽자 왕규가 왕요 일파에 의해 즉각 제거되었던 것으로 봐서도 왕규의 군사력은 미약하였거나 아예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규는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에 의해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혜종이 왕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왕규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면 혜종이 끝까지 왕규를 보호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고려사>는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혜종을 협박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역모를 꾸몄다고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이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광주원군을 앞세웠다면 왕규가 제거될 때 필히 광주원군도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데, <고려사>는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는 단지 실록에 광주원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만 쓰고 있다. 역모가 일어났을 경우 반드시 역모자들이 추대하고자 했던 인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역모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 과정이었던 점을 비추어 볼 때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비록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광주원군은 적통도 아닐 뿐 아니라, 엄연한 차자인 왕요가 있었고, 그 이외에도 적자가 여섯 명이나 더 있는데 제16비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방식이다.

 

이는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왕규가 그런 발상을 했을 경우 왕후를 배출한 황주 황보씨, 정주의 유씨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황해도, 경기도 세력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경기도 세력은 왕규를 추종하고 있었다. 이는 왕규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는 왕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를 죽이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혜종의 임종 직전에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에 대하여 <고려사>는 왕규가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다.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적어도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먼 곳에서 오던 서경 군대가 도성을 먼저 장악하였고, 당시 대광 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왕식렴에게 쉽게 붙잡혔다. 이는 왕규가 반란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되레 왕식렴이 반란군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왕식렴의 서경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대신들과 개경 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쌌던 것이다.

 

말하자면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으로 진주하였을 땐 이미 혜종은 병사했거나 살해당한 이후였고, 왕성 또한 왕요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요 일파는 왕요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던 왕규와 문무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박술희의 죽음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을 계획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고, 또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는 것은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혜종에게 엄연히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도 그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죽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운, 그야말로 성패론에 입각하여 작성된 날조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박술희는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왕요 일파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왕요가 박술희를 왕규보다 먼저 죽인 것은 바로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왕요는 정권을 장악한 후에 왕규의 무리 3백 명을 처형했다고 했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대신들일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왕요가 왕위를 계승하자 개경의 문무대신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왕요 일파는 급한 마음에 이들을 모두 역도로 몰아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혜종이 끝까지 왕요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지 않은 사실과 왕요가 측근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당시 사료를 통한 정황 분석은 혜종이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왕요 일파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규와 박술희를 비롯한 문무대신들을 역도로 몰아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에 왕규가 역적으로 올라 있는 것은 정종, 광종 등 왕위 찬탈 세력들의 철저한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에서 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였다.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도 함께 소실되었다. 실록 편찬은 바로 이 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 차원에서 이뤄진 일로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현종 이전 시대인 '칠대실록'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

 

왕명을 받고 실록 편찬을 주도한 인물은 황주량이었다. 그는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가 없게 되자 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찿아다니며 사료 수집 작업을 벌였고, 사료 수집이 완료되자 그것들을 토대로 '칠대실록'을 편찬하였다.

 

'고려실록' 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혜종, 정종 대의 왕위 계승 다툼에 대한 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 <고려사>의 평가 역시 신빙성이 없는 자료와 정종, 광종조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혜종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하여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 애이주 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와 혼인하였으며, 94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흥화군, 경화궁부인, 진헌공주 등이 있다. 생몰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사망 후에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는 대광 왕규의 딸이며, 청주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율의 딸로 두 사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궁인 애이주는 경주 사람이며 대간 연예의 딸이다. 소생으로는 태자 제와 명혜부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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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태조 왕건의 염원에 따라 장자인 혜종이 즉위하였으나 청주 세력인 왕요 세력은 집요하게 왕위찬탈을 도모하였다. 왕규의 처절한 왕권 보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박술희가 태조 유지를 받들기 위해 혜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였으나 왕요 세력의 주력인 왕식렴의 개경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하면서 왕요의 은밀한 반정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박술희를 먼저 처단하고 왕규를 포함한 문무대신 3백여 명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왕요는 추종하는 서경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제3대 정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권력 쟁취에는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호족들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태조 왕건 시대 건국공신 홍유, 신숭겸, 배현경,복지겸 등 4인방들이 태조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스스로 조정의 주요 보직을 거부하였던 점을 상기하면 허탈해진다. 그리고 왕권찬탈에 대한 역사는 왜곡되고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진 역사로 조작하였다. 고려의 역사는 처음부터 이처럼 왕권찬탈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왕권 찬탈에 참여했던 호족 세력들의 전횡으로 왕권은 추락하게 되고  정종과 광종은 그러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안감힘을 쏟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