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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9 : 고려의 역사 47 (혜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279 : 고려의 역사 47 (혜종실록 2)
제2대 혜종실록(계속)
(912~945, 재위 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2. 주름살 왕 혜종의 즉위와 계속되는 왕권 위협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무, 자는 승천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첯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921년 정식으로 정윤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936년 후백제 정벌전쟁에 참가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가 943년 5월 태조가 죽자 고려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비록 태자 무가 왕위를 이엇지만 충주 유씨 일가를 비롯한 반발 세력들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혜종은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복 동생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태자 무의 출생과 관련하여 <고려사>는 우스꽝스런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 때 비록 왕건은 동침은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염려하여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를 즉시 흡수하여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달 후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혜종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무리들이 고의로 퍼뜨린 악의 섞인 이야기일 것이다. 혜종의 얼굴에 유난히 주름이 많은 것과 장화왕후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연결지어 그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노림수였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으로 공공연하게 실렸던 것을 보면 당시 혜종이 받은 수모가 얼마나 지대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쨌던 혜종은 이 우스꽝스런 출생담 때문에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은 단지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친모 오씨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빗대고. 한편으로 이복동생들의 왕권 위협에 시달려 고민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혜종은 2년 4개월의 재위기간 내내 주름살 펼 날이 없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충주 유씨 세력과 요(정종), 소(광종) 등의 신명순왕후 소생들이 본격적으로 권력 팽창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 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청주 유력가 김긍율을 끌여들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의 장인 박영규와 박수경, 수문 형제 등도 이에 가담하여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혜종은 침실를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하며 혜종에게 왕요 형제가 반역을 꾀하고 잇다고 고변하고 역모죄로 엄단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의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였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하였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 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송악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병명도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호위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점으로 미루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쓴 <고려사>는 혜종의 이 같은 행위와 당시 혼란에 대한 책임을 모두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해놓고 있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주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침입케 하여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간 박술희를 죽였다는 내용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장치들은 여러 가지 면세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왕의 침실에 자객들이 침입한 사실을 놓고 왕규의 소행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는데,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객을 보낸 쪽은 왕요일 가능성이 더 크다. 왕이 자객에 의해 급살되었을 경우 왕위를 이을 사람은 세력이 가장 컸던 왕요였을 것이고, 또 실제로 혜종이 죽었을 때 왕요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혜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왕규의 기반 상실을 의미하는 일이므로 왕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규가 자신의 외손주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왕규의 사정은 이 같은 일을 추진할 입장이 아니었다. 왕규는 원래 함씨였다가 왕건의 신임을 받아서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명을 받든 몸이었다. 때문에 태조의 유명을 어긴다면 박술희와 등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기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왕규는 무장 출신이 아닌 데다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무력 동원 능력이 있는 박술희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박술희
박술희(朴述熙 또는 朴述希, ? ~945년)는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고려 전기의 무신(武臣)이자, 개국공신으로 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생애
고려사 열전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그는 고기를 좋아하여 개구리·뱀·개미에 이르기까지 즐겨먹는 특이한 식성이 있었으나, 성격이 호탕하고 전장에서 용전분투하는 맹장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대에서의 경력
혜성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왕건(고려 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왕무를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권력투쟁
그러나, 이후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왕요와 왕소는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王規)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조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들었던 고려 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박술희에게는 불운이었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박술희는 왕요와 그를 지지하는 서경 세력에 의해 강화 갑곶이로 귀양을 가게 되어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은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가 지키려 했던 혜종도 2년을 못넘기고 죽었다.
추증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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