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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8 : 고려의 역사 46 (혜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278 : 고려의 역사 46 (혜종실록 1)
제2대 혜종
혜종(惠宗, 912년~945년)은 고려 제2대 국왕(재위: 943년~945년)이다. 자는 승건(承乾), 휘는 무(武), 정식 시호는 혜종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고려의 제2대 국왕 | |
재위 | 943년 ~ 945년 |
---|---|
왕후 | 의화왕후 |
부왕 | 태조 |
모후 | 장화왕후 |
이전 왕 | 태조 |
다음 왕 | 정종 |
생애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그러나 나주의 오씨 집안 세력은 권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권력 기반이 약했던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왕요(王堯)와 왕소(王昭)가 왕위를 엿보았다. 그들은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이며,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의 외손이었으며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요와 왕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王規)는 945년(혜종 2)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으나 혜종은 둘을 벌하지 않았다. 혜종이 이 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고 한다.
왕규 모역설
왕규는 당시 혜종에게도 후궁으로 자신의 딸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王氏)를 시집보내 태조와 혜종, 양인의 국구의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원군 추대설은 후대에 왕요 때나 광종 때에 날조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제인 왕요와 왕소가 왕의 자리를 노리는 것 같으니 유의하라는 고변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혜종은 동생들을 시험하였다 하며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을 광종의 후궁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혜종은 왕요와 왕소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사후
이어 이복동생 왕요(王堯)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혜종의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順陵)이다.
가계
-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林氏)
- 흥화군(興化君)
-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광종의 후궁
- 정헌공주(貞憲公主)
-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 :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 고려 태조의 후궁 광주원부인의 여동생
- 청주원부인 김씨(淸州院夫人 金氏) : 청주(淸州) 사람, 원보(元甫)를 지낸 김긍률(金兢律)의 딸
- 궁인 연씨(宮人 連氏) 애이주(哀伊主) :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대간(大干)을 지낸 연예(連乂)의 딸
- 태자(太子) 왕제(王齊)
- 명혜 부인(明惠夫人)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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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혜종실록
(912~945, 재위 943년 5월~945년 9월, 2년 4개월)
1. 왕자 무의 태자 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태조 왕건은 호족 융합을 목적으로 실시한 혼인정책을 통해 29명의 후비에게서 25남 9자녀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불씨가 된다.
왕건의 장남은 제2비 장화왕후 오씨 소생인 왕자 무였다. 그는 태조 4년(921년)에 정윤(왕위를 이을 사람, 즉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왕건은 당연히 장남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고 싶었으나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왕자 무의 어머니 오씨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던 차에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가 태자 태를 출산하면서부터 왕건은 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차일피일 미루던 문제였지만, 더 이상 지체하였다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호족들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 문제로 고민하던 왕건은 장자를 태자로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사실에 실망한 장화왕후를 위로하기 위해 낡은 상자에 자황포(왕이 입는 옷)을 넣어서 전달했다. 비록 장자를 왕으로 세우지 못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자황포를 받은 오씨는 대관(재상) 박술희를 은밀히 불러 왕의 뜻을 전했다. 박술희는 궁예의 근위병 출신으로 강직하고 사심없는 성격이었다. 왕건이 장화왕후로 하여금 박술희에게 자황포를 보이게 한 것은 그의 힘을 빌리려는 하나의 계책으로 판단된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박술희는 마침내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고 왕자 무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박술희의 주청이 있자 왕건은 장자 무를 정윤에 봉하고, 박술희를 은밀히 불러 태자를 보필해 줄 것을 당부한다.
왕자 무의 태자 책봉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세력은 충주 유씨 가문이었다. 신명순왕후의 친정인 청주 유씨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던 중원 지방의 실력자였으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때도 핵심적인 역활을 했다. 이 때문에 왕건은 즉위와 동시에 충주 유씨 가문의 유권설을 순군낭중에 임명하고, 충주 유씨와 혼인관계를 맺어 신명순 왕후를 제3비로 맞아들였다.
유권설이 맡고 있던 정2품의 순군낭중은 각 호족들의 병권을 관할 할 수 있는 중앙 관료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런 지위를 즉위시 충주 유씨 가문에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건이 그들 집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충주 유씨는 박수경으로 대표되는 평산 박씨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불교 사원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에 비해 왕자 무의 외가인 나주 오씨의 세력은 미미했다.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군은 벼슬에 오른 적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고, 주변 세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왕건은 태자의 앞날을 위해 여러 가지 안배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왕건은 우선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선정하고, 진천 임씨 집안에서 태자빈을 맞아들였다. 또한 경기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던 왕규의 딸을 태자의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 청주 김긍율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충주 유씨 세력을 견제하였다.
왕건의 이 같은 노력 덕분으로 태자를 보위하는 세력과 충주 유씨 세력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건의 생존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왕건의 태자 세력 확보에 뒤질세라 충주 유씨 역시 꾸준히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왕건은 즉위 직후 북진정책을 감행하기 위해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이 때문에 서경은 개경과 더불어 고려의 가장 주요한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서경을 중심으로 일단의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이들 '서경 세력'의 중심에는 평산 박씨와 왕식렴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평산 박씨가 서경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충주 유씨의 힘은 더욱 커졌다.
비록 태자가 결정된 이후였지만, 충주 유씨 세력은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신명순왕후 소생 왕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확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명순왕후 소생으로 태, 요, 소를 비롯하여 5명의 아들이 있었고, 유씨 세력은 왕건이 죽자 이들과 함께 힘을 합쳐 혜종을 위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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