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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18 : 반기문, 그는 누구인가?

두바퀴인생 2011. 6. 24. 07:37

 

 

우면산의 여름 18 : 반기문, 그는 누구인가?

 

 

                                                                                 우면산 참나무의 위용

 

우리 민족은 개인적으로 매우 우수한 민족이다. 운동도 개인이 하는 골프, 수영, 양궁, 사격, 가수, 피아노, 바이올린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단체 종목이지만 개인이 뛰어난 경우도 있다. 특히 축구,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도 많다. 그러나 단체 종목이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개인은 뛰어난데, 뭉치면 오합지졸로 변한다. 리더쉽이 부족하고 단결력이 모자란다.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고 개개인이 너무 똑똑하다. 모두가 교육의 결과일까? 똑똑하던 학자나 교수가 국회의원이나 정치권에 영입되는 순간부터 그는 오합지졸로 변한다. 욕심이 많고 타협할 줄을 모른다. 막말과 폭행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한 시골소년이 자신의 꿈을 키워 어느 쪽에도 흔들리지 않고 외교관으로 성장한 결과 4년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계의 대통령인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다. 우리들의 자랑이며 롤모델인 그는 어린 시절 대통령이나 장군을 꿈꾼 게 아니었다. 그는 시골학교에 다니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우수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그래서 그는 외교관의 꿈을 키우며 혼자 영어 공부에 몰두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장기에서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꿈'이다. 크든 작든 가슴에 꿈을 품은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다르다. 그는 고교시절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것이 결정적인 그의 꿈을 만들게 된 경우이다. 김대중 시절 외무부 차관으로 러시아와 정상회담 발표문 중 문구 작성 실수로 인해 미국의 의심을 샀고 김대중 대통령이 미 대통령에게 사과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 책임을 지고 차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신념은 중용이다.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외교관으로 성장하였다. 청와대 외교 특보, 오스트리아 대사,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유엔에 파견되어 총회 의장 비서관으로 지내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고 인맥을 넓혔다. 우리 외교관 중에서 이러한 인재가 있었다는 게 꿈 같다. 그는 이러한 중용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친화력으로 유엔 본부에서 맹활약을 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세계의 대통령으로 성공하였던 입지적인 인물이 되었다. 

 

롤모델 반기문 총장은 우리 한국 청소년들에게 '꿈'이다. 꿈이 있으면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잠시 방황할 수도 있으나 다시 재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꿈이 없으면 그렇지 않다. 교사들의 이야기로 꿈이 없는 학생을 지도하기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그의 책 제목 중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라는 책이 있다. 롤모델은 위인전과 다르다. 위인전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려고 조작하고 감추고 과장한 전기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전기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롤모델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며 솔직한 모습을 나타낸다.

 

통상적으로 특별한 시유가 없는 한 유엔 사무총장은 연임하는 게 보통이다. 역대 사무총장들이 그랬다. 그는 재선이 되지 못햇더라면 내년 한국의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정치권에서 일부 말이 돌았다. 그래서 대선 주자들이 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한국의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만약 이번에 재선이 안되어 내년 한국의 대선에 출마한다면 그의 인생은 먹칠을 할 게 뻔하다. 한국의 정치판은 비리와 부패가 판을 치는 진흙탕 정치판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연찬화니 저축은행이니 의약분쟁이니 검.경 수사권 분쟁이니 반값등록금이니 비리와 부패의 종합박물관 같은 추악한 나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이런 나라 출신이 세계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의문이다. 외교도 저질 외교가 판을 치고 그 중심에는 정치적인 낙하산 인사가 주 원인이다. 한국의 정치가 국가 발전에 얼마나 해악을 초래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거 제도의 문제점, 정치권의 포플리즘, 선거 헛공약, 지자체 비리와 전시 행정, 권력층의 전관예우, 비리와 부패의 먹이사슬, 정경유착과 정치자금, 대기업의 탐욕, 살인적인  고물가와 저금리 그리고 환율, 대기업 담합과 전횡, 경제적인 양극화 심화, 뇌물과 접대, 불공정 경쟁과 거래, 도덕성과 윤리성 붕괴, 정의와 공정의 상실, 좌편향 집단, 허술한 국방과 비리, 집단별 밥그릇 챙기기, 언론의 횡포, 각종 노예 계약, 고실업, 빈곤층, 초고령 사회, 저출산, 무너진 공교육과 사교육 열풍, 부실 사학재단과 예치금, 장애인 차별 및 복지기금 빼먹기, 도박 열풍, 불륜과 매춘의 확산, 이혼과 가족 갈등의 심화 등등 한국의 각종 병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악성종양으로 변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치유할 수 없는 암덩어리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들의 영원한 자랑이며 꿈이며 희망이다. 앞으로 5년 동안 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아, 환경, 분쟁 지역을 쉼 없이 돌며 뛸 것이다. 그는 명예로운 임기를 무시히 마치고 한국인의 영원한 메세지를 유엔에 남기고 퇴진하기를 바랄 뿐이다. 부디 한국 정치판은 돌아 보지 말기를......        

 

 

 

 

반기문, 그는 누구인가?

반기문(潘基文, 1944년 6월 13일~)은 대한민국외교관이자 국제 연합(UN)의 사무 총장이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제 33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고, 2006년 말 국제 연합 사무총장에 당선되어 2007년부터 업무를 시작, 현재 재임중이다.

반기문
출생 1944년 6월 13일(1944-06-13) (66)
일제강점기 조선의 국기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거주지 미국의 국기 미국 뉴욕 주 뉴욕
국적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학력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석사
직업 외교관
배우자 유순택
서명
Ban Ki Moon Signature.svg
국제 연합 사무총장
반기문
제8대 국제 연합 사무총장
임기 2007년 1월 1일~
2011년 12월 31일
전임 코피 아난
후임 (현직)
출생지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와 함께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반기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생애

약력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1944년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충주중학교와 충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충주고등학교 재학시절 미국에 가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일로 인해 외교관의 꿈을 품게 되었다. 1970년 2월에는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외무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3월에 정부 부처인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자녀로 두고 있고, 모국어인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 능통하며,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구사한다.

충주고등학교 시절에는 VISTA프로그램에 충청도 대표로 자동 선발되어 1등으로 시험을 마치고 다른 학생 3명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

 

외교관 경력

1970년 외무부 여권과, 1972년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등을 지냈고, 주로 국제 조직을 거쳐 1980년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이 되었다.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하였으며, 1985년 4월에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5년 4월 총리 의전비서관,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 공사,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차관보를 역임했다. 1996년 11월에는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으로 지냈다.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지내다가 2001년엔 불미스러운 일로 외교통상부 차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 2002년 9월 동 본부 대사, 2003년 2월에 참여정부의 외교정책보좌관을 지냈으며, 2004년 1월에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에 2차례나 승진을 하는 등 외교부의 전설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반의 반만해라"는 말이 옛날에 돌았다고 한다.

 

국제 연합 사무총장

2006년 2월 14일에 국제 연합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여 2006년 10월 14일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코피 아난의 뒤를 잇는 차기 국제 연합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엔 그의 당선을 예상한 외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8대 유엔사무총장을 뽑는 1차 예비투표에서 그는 15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중 13개국의 찬성을 받아 1위에 오르게 되고 2차, 3차 투표에서 역시 각각 14표, 13표를 얻으며 안보리의 확고한 지지를 확인 받게 된다. 마지막 4차 투표에서 그는 7명의 후보를 제치고 안보리 15개국중 14개국의 지지를 받아 압도적인 차이로 8대 국제 연합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특히 선거가 진행되는동안 중동, 아프리카 국가의 그에 대한 지지는 대단하였으며 투표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몇 안되는 기권표와 반대표가 일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2007년 2월 6일 국제 연합 총회장에서 192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그는 비대해진 국제 연합 평화 유지 활동국(DPKO)을 업무별로 2개 부서로 분리하고 군축 부서를 사무총장 직속에 두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제 연합 평화 유지 활동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또 기구 개편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직인

반기문은 삼족오가 새겨진 사무총장 직인을 증정받아 사용하고 있다. 한국 전각의 대표적 명인 정병례가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의뢰로 작업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인 2006년 12월 11일 완성한 직육면체의 직인은 가로·세로 7cm에 높이 18.5cm 크기로 삼족오를 주제로 제작되었다.

 

밑바닥에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날개짓을 하는 삼족오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배경으로 ‘Ban Ki-moon Secretary-General The United Nations→국제연합 사무총장 반기문’라는 문구가 있다. 옆면 4곳에는 삼족오와 태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삼족오 직인은 2007년 1월 12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3회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 수상식에서 그 제작자를 수상자로 선정시키기도 했다.

 

수상 경력

  • 1975년 - 녹조근정훈장
  • 1986년 - 홍조근정훈장
  • 2001년 - 오스트리아 대훈장
  • 2002년 - 브라질 리오 블랑코 대십자 훈장
  • 2004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 2006년 - 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
  • 2006년 - 제6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
  • 2006년 - 잡지인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상
  • 2007년 - 제1회 포니정 혁신상
  • 2008년 - 국제로타리 영예의 대상
  • 2008년 - 필리핀 최고 훈장
  • 2009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제연합 사무총장

국제 연합의 사무총장(國際聯合-事務總長,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은 국제연합(UN)의 주요 기관 가운데 하나인 국제 연합 사무국의 수장이다.

 

개요

사무총장이 지닌 권한은 다음과 같다. 일단 총회가 정한 규칙에 따라 1만 6천여 명의 사무국 직원을 임명할 수 있다. 산하 기관까지 포함되면 총 4만 명에 대한 인사권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또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국제연합 내 모든 기관과 협의하며 권고할 수 있는 권한과 국제 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과 중재 업무도 맡고 있다.

 

또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세계 최고의 외교관으로 국제 사회에서 국가 원수 내지는 행정수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예우는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국제 연합을 하나의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별도 보안 검색 없이 각국의 공항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외국을 방문할 수 있는 외교관 이상의 면책 특권이 부여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국제 연합 사무총장의 공식 연봉은 22만 7천 54달러(약 2억 원)이다. 1997년 이래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으나, 정해진 금액 이외에 개인 활동을 위한 판공비와 경호 비용 등 추가로 지급되는 돈이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더 높은 3억 원 가량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국제 연합의 출범 이후 지금까지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은 반기문 현 사무총장을 포함해 모두 8명이다. 그 가운데 단임에 그친 사람은 이집트 출신의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유일하고, 그밖에 역대 6명의 총장이 총장직을 한 차례씩 연임한 바 있다. 국제 연합 헌장에는 사무총장의 임기가 명기되어 있지 않으며, 초대 사무총장의 임기를 5년으로 정하기로 한 1946년 1월 24일 총회 결의 이후 5년 임기제가 유지되어 오고 있다.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뉴욕 맨해튼 중심지에 위치한 국제 연합 본부 내 사무총장 집무실에서 1년에 단 1달러의 임대료를 내고 근무한다.

 

총장 선출

국제연합 사무총장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러시아·미국·영국·중국·프랑스)과 10개 비(非)상임이사국(2006년 현재 가나·그리스·덴마크·슬로바키아·아르헨티나·일본·카타르·콩고·탄자니아·페루)을 포함한 15개국 가운데 9개국 이상의 지지를 받은 후보를 총회가 추인하는 절차를 거쳐 확정된다. 사무총장은 지역 순환 원칙이 암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역대 총장

역대 사진 사무총장 재임 기간 출생 국가 비고 참고
Sr. Gladwyn Jebb.jpg 글래드윈 젭 1945년 10월 24일
1946년 2월 2일
영국의 국기 영국
(유럽)
사무총장 직무대리
1 Trygve Lie.jpg 트뤼그베 리 1946년 2월 2일
1952년 11월 10일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
(유럽)
사직 [1]
2 Dag Hammarskjöld cropped.JPG 다그 함마르셸드 1953년 4월 10일
1961년 9월 18일
스웨덴의 국기 스웨덴
(유럽)
잠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2]
3 U-Thant-10617.jpg 우 탄트 1961년 11월 30일
1971년 12월 31일
미얀마의 국기 미얀마
(동남아시아)
개인 사정으로 인해 2번째 임기 종료 후 은퇴 [3]
4 Bundesarchiv Bild 183-M0921-014, Beglaubigungsschreiben DDR-Vertreter in UNO new.png 쿠르트 발트하임 1972년 1월 1일
1981년 12월 31일
오스트리아의 국기 오스트리아
(유럽)
중국이 3번째 임기 거부권 행사 [4]
5 Javier Pérez de Cuéllar.JPG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1982년 1월 1일
1991년 12월 31일
페루의 국기 페루
(남아메리카)
3번째 임기 사절 [5]
6 Boutros Boutros-Ghali in Davos.JPG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1992년 1월 1일
1996년 12월 31일
이집트의 국기 이집트
(아프리카)
미국이 2번째 임기 거부권 행사 [6]
7 Kofi Annan.jpg 코피 아난 1997년 1월 1일
2006년 12월 31일
가나의 국기 가나
(아프리카)
2006년 12월 31일에 임기를 마침. [7]
8 Bankimoon07052007.jpg 반기문 2007년 1월 1일
2016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동아시아)
현 사무총장 [8]

 

 

 

 

 

 

반기문, 고교시절 케네디 만나 외교관 꿈 키워(2006년 당시 기사)

 


케네디와 고교생 반기문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1962년 충북 충주고 3학년 때 국제적십자사 비스타(VISTA) 프로그램의 한국 대표 4명 중 1명으로 선발돼 미국 워싱턴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케네디 대통령 오른쪽에 보이는 학생(점선 안)이 반 장관이다. 사진 제공 외교통상부
‘적(敵)이 없는 사람.’

 

 

3일 차기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4차 예비투표를 통해 사실상 사무총장으로 뽑힌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아는 이들의 일치된 평가다.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의 수장 자리에 오를 때까지 36년 동안 줄곧 동기 중 선두를 달리고 때로는 선배를 제치고 나가면서도 다른 이의 가슴에 맺힐 만한 언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지론은 ‘외교관은 일하는 사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제1의 원칙으로 놓고 살면 오해를 살 일도, 원한을 살 일도 안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 후반기인 1996년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 대통령의전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당시 주변에선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볼지 모르니 청와대에 너무 오래 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많이 말렸지만 그는 “공무원이 어떻게 부여된 임무를 거부하느냐”며 지론대로 움직였다.

 

 

이런 자세는 정권이 바뀐 뒤에도 인정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그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주요 국제기구가 많아 요직으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를 거쳐 2000년 1월 외교부 차관이 됐다.

 

 

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3대 정권에서 외교 관련 요직을 맡는 것이 단지 일만 열심히 해서 된 것은 물론 아니다. ‘외교 감각 못지않게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이래서 나온다.

 

 

특히 ‘잘나가는 외교관’들에게 거부감을 표시해 온 노무현 정권의 핵심인 386들로부터도 “우리 편은 아니지만 저쪽 편도 아니다”는 믿음을 얻을 정도의 ‘균형감각’은 ‘롱런’의 밑바탕이 됐다.

 

 

정부 내에서 반 장관을 놓고 ‘상관에게 싫은 소리는 절대 안 하는 사람’이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도 임지에 나가 있는 대사 등 부하 직원들에게도 친필 편지를 쓰는 사려가 오늘의 반 장관에게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게 했다.

 

 

상대적으로 평탄하게 공직생활을 해 온 그에게도 두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한 번은 2001년 갑작스럽게 차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던 것. 당시 청와대에서 후임 차관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튕겨 나가게 됐던 것이다.

 

 

반 장관은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을 겸직하던 한승수 외교부 장관의 발탁으로 유엔 총회 의장비서실장이 됐다. 외교부 실·국장을 마친 뒤 가면 적당한 자리였기 때문에 좌천을 당한 셈이었다.

 

 

반 장관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심하기도 했지만 묵묵히 일해 결국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다”는 말을 많이 한다. 유엔의 내부 사정을 잘 알게 돼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할 자양분을 키울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또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한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붙잡아 유엔 사무총장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청와대의 평가다. 그래서 그는 ‘관운(官運)의 사나이’로도 불린다.

 

 

하지만 관운뿐 아니라 타고난 체력과 치밀한 업무능력이 오늘의 반 장관을 있게 했다. 62세지만 올해 들어 110여 일 동안 40여 개국을 오가며 공식 업무와 유엔 사무총장 선거운동을 동시에 펼치는 강행군을 하면서 단 한 차례도 아픈 적은 물론 심한 피로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하는 운동이라곤 생각을 정리하며 집무실 안을 걷는 게 전부다. 치밀한 업무 능력은 매우 꼼꼼하게 업무 처리를 하는 것으로 이어져 한때 ‘반 주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고향인 충북 음성군과 충주시의 반 씨 집안에선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기문이처럼 돼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는 것.

 

 

반 장관은 부인 유순택 여사를 충주고에 다닐 때 처음 만났다. 당시 유 여사는 충주여고의 학생회장으로 두 사람은 충주고와 충주여고의 학생회장단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다.

 

 

반 장관은 1962년 충주고 3학년 때 미국 정부가 주최하는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입상해 부상으로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고, 유 여사는 미국으로 떠나는 반 장관의 환송식에서 충주여고를 대표해 꽃다발을 안겼다.

 

 

반 장관은 당시 워싱턴에서 미국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그때 ‘최고의 외교관’이 될 꿈을 다졌고, 결국 외교관들이 가장 선망하는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2006년 당시 가족-모교-고향 표정 “경사났네” 환호… 축하…

 


2006년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확정된 3일 반 장관의 어머니 신현순 씨(오른쪽)와 여동생 정란 씨가 충북 충주시의 자택에서 축하 전화를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집과 인근 사찰에서 아들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린 어머니의 정성이 결실을 봤습니다.”

 

 

3일 오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가족과 고향 친인척, 모교 동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월부터 충북 충주시 문화동에 있는 딸 정란(55·초등교사) 씨 집에 머물던 어머니 신현순(85) 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반 장관은) 어려서부터 어느 한구석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아들이었다”며 “소원이 이뤄져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신 씨는 이날 오후 추석을 지내기 위해 반 장관이 살고 있는 서울의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향했다.

 

 

반 장관이 외교관의 꿈을 키운 모교인 충주고 재학생과 교직원, 동문들도 “개교 66년 만의 최대 경사”라며 환호했다.

 

 

한상윤(53) 교장은 “석 달 전부터 교문에 ‘제19회 졸업생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님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기원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응원했는데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져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2일 오후 반 장관과 통화했는데 ‘모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선되면 이른 시일 안에 모교를 찾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3학년인 김삼열(18) 군은 “대선배님이 유엔 사무총장이 돼 자랑스럽다”며 “선배님의 영광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반 장관의 고향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도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반 장관의 작은아버지인 필환(84) 씨는 “기문이가 어제(2일) ‘6일 아버님 묘소에 성묘를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며 “어느 때보다 기쁘고 풍성한 추석이 될 것 같다”고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