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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65 : 고려의 역사 33 (태조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6. 9. 04:16

 

 

 

 

한국의 역사 265 : 고려의 역사 33 (태조실록 3)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1. 태조 왕건과 민족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계속)

민족대화합정책과 아울러 왕건이 추진한 또 하나의 숙원사업은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이었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자임을 만방에 천명한 만큼, 왕건에겐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 위해 938년 3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한 발해인 박승을 받아들이는 등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 유치하고, 평양에 서경을 설치하여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왕건에게 북진정책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는 강성해진 거란이 버티고 있었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말년까지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만주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고려의 강력한 북진정책은 서쪽으로는 청천강, 동쪽으로는 영흥 이북까지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을 회복한 것이지만 호족연합체 성격이 짙은 당시 고려체제를 감안할 때 이는 획기적인 결과였다.

 

청천강에서 영흥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은 비록 넓은 영토였지만, 농토가 비좁고 지형이 거칠며 기후도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못한 곳이었다. 때문에 아직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고려로서는 여진과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곳까지 영토를 확대하는 곳보다 청천강와 영흥 이남을 안전지대로 가꾸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는데, 942년 10월에 거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며 고려와 화친을 제의했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거란의 사신이 화친협약을 위해 고려에 당도하자 왕건은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위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서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서 굶겨 죽였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며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던 왕건은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에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그해 12월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그려 벽에 붙여놓고 무차대회(無遮大會 : 승려. 속인.남여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법회)를 개최, 해마다 이 전통을 잇게 했다.

 

왕건은 또한 관제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 집권기의 고려 관제는 태봉의 관제를 축으로 하여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고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스스로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과도기적 형태였다.

 

태봉의 관제는 최고관부로서 광평성을 두고 재상 광치나(고려 때 시중) 휘하에 7부 5성 2단을 설치하여 국사를 각각 분담하게 하였다. 그밖에 삼림, 기물 등을 관리하는 부서를 두었으며, 군제는 장군, 정기대감, 성주장군, 대아찬 장군, 파진찬 장군, 백선장군 등의 고위 관직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왕건은 태봉의 이러한 관제와 군제를 기본으로 중앙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호족자치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에게 호장,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인지도록 했다. 또한 호족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중앙에 머물게 하는 기인제도를 실시하여 지방의 반란에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