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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64 : 고려의 역사 32 (태조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6. 8. 03:22

 

 

 

 

한국의 역사 264 : 고려의 역사 32 (태조실록 2)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1. 태조 왕건과 민족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태조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과 그의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스무 살 되던 896년에 궁예 휘하에 들어가 후고구려의 장수가 되었다. 전장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린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던 그는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 오르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918년에 궁예가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며 호족들과 대립하면서 의심이 많아져 그의 목숨이 위협당하자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형경 등의 장수들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창업 후에는 당시 최대 라이벌이었던 견훤과 세력을 다투면서 쟁패를 거듭하였고,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넘겼으나, 935년에 견훤이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려 이룬 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에서 자주적 민족통일이었다. 이 민족통일의 주도 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 건국 세력이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지속되면서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 또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에 가담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안으므로써 명실공히 민족 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 그려는 이처럼 고려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단일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한반도의 문화 중심지도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개성이 문화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라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고구려 문화를 회복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뜻이기도하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의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꾸준히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도 고려 건국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견훤을 몰아내고 후백제의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왕건은 외세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이는 대외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내적으로 대화합을 바탕으로 한 단일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 국가를 이룬 왕건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첯째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비록 통일을 일궈내기는 했지만 통일 국가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수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왕건은 정주 유씨, 평주(평산) 유씨, 경주 김씨, 황주 황보씨, 광주 왕씨, 충주 유씨 등 지방 호족의 딸들과 혼인하여 그들을 왕후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여기에다 통일 무렵에는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신주(신천)의 강씨 등이 더해져 왕건의 후비는 총 29명이나 되었다.

 

왕권 안정책 일환으로 실시한 이러한 혼인정책은 적어도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지만,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입장에서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하기 위한 과정으로 호족의 힘을  국가조직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무었보다도 급선무라고 판단하였고, 혼인정책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가 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같은 미래상을 예상햇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혼인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정책은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그가 그나마 고려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호족들광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혼인정책 이외에도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의제가족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왕건이 이처럼 호족들을 혈연과 성씨로 묶어놓으려 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통일국가 고려의 정치적 안정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통일 중심적인 정치이념과 유화적인 성격에 바탕한 왕건의 일관된 화합정책은 고려를 하나의 단일국가로 유지시키는 구심체였다. 따라서 왕건의 혼인정책은 단순한 호족 달래기 차원의 정치적 수단을 넘어서서 민족대화합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