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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7 : 6월, 호국보훈을 생각하며...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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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7 : 6월, 호국보훈을 생각하며...3

두바퀴인생 2011. 6. 7. 04:28

 

 

 

우면산의 여름 8 : 6월, 호국보훈을 생각하며...3

                                                                         

                                      사당역 쉼터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한 번 모아 보았다. 2주전 일요일 저녁에 버려진 쓰레기다.

 

반값 등록금 촟불시위가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연예인, 시민단체, 야당 정치인들이 합세하여 점점 확대되고 있으며 시위에 불을 당기기 위해 불순 좌익 세력들은 아마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난번 쇠고기 파동 때 촟불집회처럼 반정부 시위를 확대하여 시민들이 동참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각종 비리사건으로 정부의 지지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시점이며 집권 말기에 느슨해진 정치 권력에 대한 시기적절한 시위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지나번 처럼 시위가 확대되고 시민들의 참여가 증가하면서 경찰의 강경 진압이 여론을 악화시키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결론은 시위대를 몰아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학생들은 하기 싫은 공부에다 경제도 어려운데 등록금도 내린다면 시위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될 성 싶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대처이다.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도 정치력이다.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그것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분열을 초래하고 국가적으로 위기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정치적 갈등을 봉합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결국은 내부적으로 국론분열을 확대하고 스스로 붕괴를 하는 게 역사의 순리다. 그래서 무능한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공약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공약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한나라당이 먼저 반값 등록금을 내걸었다가 정부의 반대로 부담을 줄이는 선으로 조정된다는 소문에 여론은 악화되었다.  이에 학생들이 분노를 느끼고 거리로 나선 모양인데...

 

여당과 정부의 어슬픈 정책이 사태를 불러왔으며 표풀리즘의 극치다. 대학들은 등록금 장사를 한다고 소문나 있다. 대학들의 금고에 수천억씩 보관되어 있는 자금은 무엇인지? 그것은 왜 사용하지 않으며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정부의 국고지원만 받고 자신들의 등록금 잔액은 차곡차곡 저축하는 대학들이라는 이야기다.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과 기본 정신이 표플리즘에만 있는 듯하고 애민정신에는 바탕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쳐가고  마진을 싹쓸이 해가도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정부가 대기업 편을 들고 대학의 편을 든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통신요금도 마찬가지다. 특별 인하 대책이라는 게 고작 요금을 1,000원씩 내리는게 소비자들에게 어떤 기분이 들까?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일 것이며 아무런 체감 온도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통신사들은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마음껏 털어갔다. 복잡한 요금제로 소비자들이 헷갈리게 만들고, 정액 요금제, 휴대폰 출고가 부풀리기, 공짜 휴대폰, 2년 약정제, 휴대폰 스위치를 볼록 스위치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만 다녀도 저절로 켜지는 기기, 인터넷 자동 접속, 폭탄 요금 등등 갖가지 방법으로 90년대부터 년간 수조원씩 순이익을 기록하며 치부를 해왔고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것을 지금까지 방치해 온 것이 정부다.

 

휴대폰 기기마다 충전기 부속이 다르고, 사용중 고장나서 고치려면 부속값은 왜 그리 비싼지, 판매가도 국내외가 다른데 국제 판매가격보다 국내 판매가격이 왜 차이가 나는지? 사용요금이 왜 외국보다 2~3배 이상 비싼지?  그리고 통신사를 쉽게 옮길 수도 없고 옮기려면 그것도 30,000~55,000원씩 가입비를 꼬박꼬박 받는 것이 무언가? 교환기에 접속 코드만 꼿으면 되는 게 왜그리 비싼가? 결국 통신사들은 강도들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기본료는 무엇이며 가입비는 무엇인가? 모두가 거품이 잔뜩 들어있는 금액들이며 제조사와 통신사만 배를 불리는 정책이었다. 정부, 정당, 국회, 공정위를포함한 관련 공무원, 통신분야 전문가/교수/통신관련연구소 연구원을 비롯하여 통신위까지 통신사들의 로비로 배를 채웠고 지금까지 통신사 편이었지 소비자 편은 아니었다.

 

정유사도 마찬가지다. 년간 수조원씩 순이익을 남기는 정유사들이 담합하여 장부를 조작하여 소비자와 정부를 우롱하였다는 것이다. 통신은 처음에 공짜로 휴대폰을 나누어주고서 주머니 털어가듯이 이제는 누구나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 되고 말았다. 또 자동차는 타지 않으면 다닐 수 없고 생계를 이어 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기름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게 독점적 기업인 통신.정유 대기업들이다. 공정위는 있으나마나 같은 패거리라고 생각된다. 최근 ㄱ\담합으로 괴징금을 부과하였다지만 법전에서는 대부분 패소하는 게 또한 과징금 징벌이다.

 

 

 

 

 

 

 

 

 

위에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사방에 쓰레기 같은 것들이 우리사회 곳곳에 산재하여 썩고 있다. 이런 쓰레기를 치우듯이 빗자루로 쓸어버려야 하는 것들이 많다. 버려진 쓰레기를 자세히 보면 지금 고통스런 서민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베어 있는 듯하다. 깡소주에 과자, 맥주를 마시며 일요일 밤새 얼마나 현실을 씹었을 것인가?

 

이와같이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독점적 지위의 통신, 정유사들이며 먹이사슬 구조에 연루되어 있는 대기업과  정치인들일 것이다. 쓰레기에는 버린 사람들의 분노와 한숨, 눈물이 베어 있는게 보이는가? 한반도에서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주민을 굶기며 족벌세습체제를 고수하려는 김정일 집단과 좌익 사상에 물들어 한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북한 정권을 비호하는 편향된 사상에 물들어 있는 친북.종북. 좌익 세력들일 것이다.

 

누구도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반정과 정복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창업한 주몽은 도덕적이고 정통성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 소서노를 만나 기사회생하였고 고구려를 창업하게 되었으며 온조와 비루를 제치고 먼저 부인의 아들 유리를 찿아 후계자로 만들었다. 배은망덕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소서노는 분노했고 배은망덕한 주몽을 떠나 온조와 비루를 데리고 남쪽으로 배를 타고 산동반도에서 도착하여 대방의 배려로 위례성을 구축하고 머물다 대방의 간섭이 심해지자 새로운 신천지를 찿기 위해 돌째 온조에게 한반도로 가서 나라를 창업할 땅이 있는지 살펴보라 했다.그래서 온조는 선발대를 데리고 한반도 마한 당으로 가서 마한 왕의 배려로 지금의 잠실 토성 근방 하남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백제의 온조는 정통성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루를 제치고 한반도에서 왕권을 차지했다. 미추홀(인천 지역)에 도착한 소서노와 비류는 온조가 찿아오거나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온조는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소서노는 온조가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소서노가 온조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온조는 과연 정통성이 있고 도덕적인가? 아니다. 그는 어머니를 죽이고 형을 배신한 불한당일 수밖에 없다. 

 

고려의 왕건은 정통성이 있는가? 그는 이유야 어쨌던 창업 군주인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다된 밥에 숫갈과 젓가락만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정통성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을 내쫓고 최영을 죽이고 정몽주를 죽인 후 고려 잔여 세력을 청소한 다음에 못이기는 척하며 조선의 초대 창업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성계는 정통성이 있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가? 아니다. 비록 고려가 오랜 기간 무신정권과 몽고의 간섭으로 조정이 무력해졌으나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원나라가 망하고 명이 발흥하던 시기라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만주 정벌을 시도할 정도로 무능한 조정은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조정이 부폐하고 무능해져 백성들이 토탄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군주의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쿠테타를 일으킨 역적이다. 고려의 충신 최영, 정몽주를 죽이고 우왕. 창왕을 허수아비로 옹립하여 왕위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다가 신하들의 간청에 의해 할 수 없이 왕위에 등극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은 정통성이 있는가? 한마디로 둘다 소련과 미국을 등에 업고 분단된 남북에서 각각 나라를 새운 사람들이다. 둘 다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지구상에서 한마디로 정통성 있는 국가는 아무데도 없다. 힘의 논리에 의해 정권은 창출되고 힘에 의해 무너진다. 강대국의 지원에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강대국이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한 정권이 들어선다. 중남미에는 미국의 조종에 의해 수많은 나라들이 정권교체가 반복했고 심지어 미군이 직접 투입되어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강대국의 대기업들이 진출하고 천연자원을 싹쓸이 해간다. 

 

 

 

 

 

 

 

 

조선의 눈물은 계속된다.

 

일제는 청.일전쟁,노.일전쟁의 결과 전승국이 되어 단독으로 조선을 차지하는 우선권이 주어졌다.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나 조선은 결국 친일 5적에 의해 일제에 합방당하는 비운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2. 일제 강점

일제 강점하 36년간 조선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난도질 당하고 산마다 쇠못이요, 젊은 처녀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숫가락.젓자락.오강단지까지 공출당하는 수탈의 세월을 당하였다. 철도.광산개발 미명하에 수목은 모조리 절단되어 목재로, 전국의 평야에서 생산되던 쌀은 모조리 공출되어 인천,군산,목포,부산,원산 등지에서 일본으로 실려갔다. 수많은 왕릉이 도굴되고 값진 문화재는 몰래 밀반출시킴은 물론 조선 반도의 모든 물자를 모조리 가져갔던 일제였다.

 

약삭빠른 조선눔을 일본순사의 앞잡이로 고용하여 권문세가, 사대부 집안, 대부호를 수탈하고  국내잠입 독립투사를 체포.처형하는데 앞장섰다. 친일인사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에 아부하여 부자들의 농지를 약탈하고 문서를 없애는 등 수없는 범행을 저질렀다. 이에 백성들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간도로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수 많은 고려인들이 끌려가서 황무지에 내버려지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동사하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래도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언젠가는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라는 노래를 불렀다.

 

일제치하 동안 천만이 넘는 남여 젊은이들이 이역땅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갔으며 안중근의 하얼빈 쾌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몸부림에 불과하였고 대동아전쟁을 벌인 일제는 눈에 불을 켜고 조선반도에서 수탈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36년간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 친일파는 고려 시대 몽고군에 빌붙어 조정을 능멸하던 눔들처럼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 항일지사를 포함하여 앞장서서 체포.구금.고문은 물론 학살까지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친일파였고 일본군 오장이었고 일본 순사 밀정이었다. 우리들의 할머니가 정신대였고 일본눔 씨받이가 되었으며 성노리개였다는 이야기다.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항일투사였고 독립군이었으며 일본군으로 끌려가 이름모를 동남아 어느 땅에서 전사하였고 사할린을 포함한 여러 탄광으로 끌려갔으며 731부대 시체해부 대상이 되어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는 이야기다.

 

친일파들은 일제가 그렇게 빨리 망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말기 몽고군이 그렇게 허망하게 명의 주원장에게 쫓겨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몽고 앞잡이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일제 앞잡이 노릇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은 자원 고갈과 물량 부족에 시달리던 일제가 미군에 점점 밀리면서 나중에는 자폭공격을 감행하는 이슬람의 지하드 같은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자행하였으니 태평양 바다 속에서 잠들어 있을 그들이 값없는 허망한 죽음에 얼마나 원통해 하고 있을까? 그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그래서 일제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군에 계속 밀리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갔으니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끝까지 결사항쟁을 준비하던 중, 일제는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폭 두 방에 두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십만 인명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자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일제의 식민지로 지구상에서 나라가 사라질 뻔 하였던 조선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뜻밖에 감격스런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3. 해방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염원이던 독립은 되었으나 38도선을 기준 남북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에 의해 반도는 절단되고 북에는 김일성, 남에는 이승만이 각각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자신들이 조선반도의 대표주자들이라고 나섰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은 이승만과 미군에 의하여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모든 정치적인 주도권은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에게 넘어가고 이승만은 정권창출과 군대양성을 위하여 일제하 친일 인사들은 물론 국방경비대를 급편하면서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하게 된다.

 

해방 후 5년 동안 남한은 피나는 권력투쟁의 암울한 기간동안 김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저격, 암살, 살해되고 이승만 정권이 자리메김이 점점 가시화 되자, 연일 '북진통일' 외치는 이승만에게 미군은 한국 군대의 편성과 무장에 소극적인 반면, 북의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관 및 군수물자,장비, 무기 등을 지원 받았고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남아 도는 공산군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고 그래서 북한의 지원 요청에 조선족과 중국 공산군 및 팔로군 출신들을 대거 북한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그들을 주력으로 하여 북한군을 편성하고 소련제 T-34 최신예 탱크 등으로 무장된 북한군을 38도 선 전역에 배치하고 '남조선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 6월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하게 된다.

 

4. 전쟁발발과 북 전략

당시 북한군의 전략은 개성-문산축선,동두천-의정부 축선,철원-포천 축선,화천-춘천 축선,동해안 축선 등 5개의 주공격로로 선정하고 개성-문산축선은 한국군을 고착.견제하면서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한수이북에서 한국군을 1차적으로 이중포위.격멸하고, 화천-춘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화천-춘천-지평리-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한강이남에서 2차 포위망을 구성하여 한국군의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고, 3단계로 태백산맥을 통하여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 등과 협공하여 남한 전지역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남로당 잔당들과 좌경화 인사들이 군대와 정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여순반란, 제주 4.3폭동, 대구.서울 등지에서 좌익 폭동이 빈발하였으며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조세력이 총 궐기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5. 한국군의 초기대응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은 일제치하 병참장교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전략.전술은 물론 기동전을 전개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축차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우를 범하면서 개성-문산 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은 적 전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전선이 밀리면서 계속 후퇴하였고, 축차적으로 투입된 한국군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적 탱크와 맞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군의 방어계획도 구체적으로 수립된 상태도  아니였으며 후방에서 올라오는 부대를 순차적으로 전선에 투입시키에 바빴고, 적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적의 의도도 몰랐고 병력규모나 포위전술도 몰랐다.

 

한국군에게는 전차는 한대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도 없었다. 오로지 소총과 수류탄, 화염병이 전부였다. 전선에 투입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처음보는 괴물같은 적 전차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졌고 적 전차는 파죽지세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으며 서울 함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 선무대는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도록 방송하면서 아군이 적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는 등 거짖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화천-춘천 축선은 아군 6사단의 춘천남쪽 고개에서 선방하고 있었다. 그러자 적은 수원 이남에 목표를 둔 2중포위 시도가 지연되자 해당 군단장을 교체하는 등 춘천지역 전선을 독려하였지만 춘천 지역의 아군 6사단은 효과적인 방어전투로 적의 기도를 분쇄하면서 전선조정을 위해서 남쪽으로 서서히 후퇴하였다. 한편 동해안 축선은 태백준령으로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가 7번 국도를 차단하자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6. 서울 점령

미아리 고개를 넘은 적 전차 수대가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정부의 선무 방송에 마음 놓고 있던 시민들은 북진한다던 국군은 커녕 인민군 전차가 서울에 갑자기 나타나자 수도 서울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갑자기 수많은 서울 시민들은 황급하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한강대교 일대로 몰려 들었다. 당시 한강대교 폭파 임무를 맡은 아군 공병장교는 시민들이 계속 한강대교를 건너오는 상황이고 시민들에 섞여 침투한 적 침투부대에 의해 폭약과 도화선이 해체되거나 절단되는 문제를 우려하여 상부의 폭파지시를 받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상부 지휘관들과 무선교신은 물론 연락이 되지 않자 책임장교는 아군의 주력부대가 미쳐 빠져나오기도 전에 한강대교는 다리위 시민들과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폭음을 내며 폭파되었다. 전후 한강대교 조기폭파 문제로 공병감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수많은 시민과 아군 주력부대는 지리멸렬 상태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