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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8 : 6월, 호국보훈을 생각하며...4

두바퀴인생 2011. 6. 8. 16:20

 

 

 

우면산의 여름 8 : 6월, 호국보훈을 생각하며...4

 

 

7. 맥아더 장군 전선시찰

당시 직접 전선을 관찰하기 위해 급히 날아와서 노량진 한강제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던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적의 주력을 1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군투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군 전투력은 주력이 이미 섬멸된 상태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급거 편성토록 지시하고 적의 주력을 서서히 저지하면서 미군을 투입하고 최후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했다. 적을 남한지역 깊숙히 끌여들인 후에 원산이나 진남포, 인천지역에 주특기인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만약 맥아더의 의도대로 적의 주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다면 상륙작전의 승패가 관건이 되었다. 일본 사령부로 돌아간 맥아더는 극비로 참모들에게 3개 지역에 대한 상륙작전 가능성과 목표달성 가능성을 검토토록 지시했다.

 

8.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투입

배와 철로를 이용하여 오산 북쪽지역 '죽미령' 언덕에 급거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B,C중대를 근간으로 증강된 대대규모로 북한군과 처음 조우하는 최초의 미군부대가 되었다. 오산북방 1번국도가 지나는 언덕에 B중대는 90,117고지에, C중대는 92고지 일대, 한국군 17연대 선발대중 일부 부대는 우측 88고지에 포진하고 적 전차와 선두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105밀리 5번포를 고개 정상 부근에 추진배치하여 대전차고폭탄 6발을 준비했으며 7,62밀리 무반동총,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피난민들이 국도를 따라 줄줄이 남하를 하고 있었으며 멀리서 포성이 들리고 적 전차의 굉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전 후 일본에 잔류한 미군은 종전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고참들은 대부분 전역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신참들로만 구성되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경험도 없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처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을 일일이 돌아 다니면서 격려하고 주사격 방향과 화집점 등을 알려주면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진포를 제외한 나머지 5문의 105밀리 포병부대는 죽미령 고개 후방 수청리에 포진하였으며 탄약은 1200발 이었다. 

 


【오산=뉴시스】   오산시는 5일 10시제56주년 UN군 초전 기념일을 맞아  내삼미동소재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 초전기념 및 추도식을 거행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오산=뉴시스】 오산시는 5일 10시제56주년 UN군 초전 기념일을 맞아 내삼미동소재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 초전기념 및 추도식을 거행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9. 북한군과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최초 교전

북한군 제4사단 107전차연대의 선두전차 8대가 1.8키로 전방에 나타났다. 105밀리 포가 대전차고폭탄을 장전하고 대기했다.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1번 국도 전방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대...두대...세대... 적 전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사격을 중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뒤에는 후속 전차들이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맨 앞 적 전차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대전차포 사수에게 사격신호를 보냈다. "꽝!"  대전차포 발사... "꽈꽝!"  포탄이 폭발하면서 전 전차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잠시후 연기가 사라지자  전차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하는 적 전차... 적 전차는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미군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T-34전차는 2차대전 말기 소련군이 개발한 전차로 최신예 전차였다. 미군의 대 전차포탄은 적 전차의 장갑판을 뚫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본 미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차를 잡을 수 있는 대전차포가 적 전차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진지의 미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위치를 확인한 적 전차에서 기관총과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진지 사방에 포탄이 작열하고 총알이 날아 들었다. 미군 대전차포가 제2탄을 발사했다. "꽝!" 전차에서 화염이 '번쩍' 일었다. "꽈-꽝!"  화염이 일고 잠시후 전차가 멈추었다.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 괘도가 끊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계속 사격을 명령했다.  적 전차에서 전차포가 발사되고 북한군의 총탄도 날아 들었다. 괘도가 끊어진 전차는 도로옆으로 비켜나고 후방 전차들이 계속 밀려 들었다. 총 36대의 적 전차중 4대가 파손되고 뒤따르던 전차들이 미군 진지를 지나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포병진지는 적 전차에 대하여 직접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부상병이 속출하자 스미스 중령은 적에게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전부대원에게 오산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미군은 오산 '죽미령'고개 전투에서 처음 북한군과 의 전투에서 12시간 지연시키는 역활만 하였으며 150여명이나 전사상 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유엔군 첫 전장, 오산 초전지 (오산=연합뉴스) 1950년 7월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벌어진 유엔군의 한국전 첫 전투시 미 제52 야전포병대대 사격 장면 

 

10. 미 제24사단 전선 투입

이어서 미 24사단이 열차로 대전에 도착했다. 사단장 '딘' 장군은 공주-대전-추풍령 을 잇는 금강을 1차 방어선으로 구상하고 2개 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로 금산지역에 1개연대를 배치했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배치 사실을 알고 피난민을 가장한 침투부대를 미군 방어선 후방으로 침투시켜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지휘부를 습격하거나 병참부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야음을 틈타거나 피난민속에 섞여 들어온 북한 침투부대로 인하여 미군은 지휘통신이 두절되는 초유의 사태를 당면하게 되자 각 부대는 적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각개약진으로 후방으로 허락없이 철수하자 '딘' 장군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적의 포탄과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 연대는 연락이 두절되고 예하부대를 찿기에 바빠서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부상병들을 찝차에 13명이나 싣고 남으로 이동 중 침투한 적의 매복공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형도 잘 모르는체 부관과 수 주일 산중을 헤메다가 어느 민가에 숨어 들었다. 마을이 적에게 점령되자 그동안 '딘 장군'을 돌보아 주던 집주인의 신고로 '딘 장군'은 미군 장성으로는 처음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미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1950년 7월 20일.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적의 T34 전차를 저지할 화력이 없음. 3.5인치 로켓포 속히 공수 바람!”

1950년 7월초 대전 충남도청 3층에 지휘소를 차린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긴급 통신을 날렸다. 전쟁이 시작되자 최초로 한국 전선에 들어온 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와 34연대가 오산 평택 천안 등에서 잇따라 패배한 터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대전-대구-부산에 이르는 경부 축(軸)에 최정예인 1군단의 3, 4사단과 2사단, 105, 107, 203 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워 천안시내 미군 방어선을 유린하고 34연대장 마틴 대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딘 소장은 연기군 전의와 조치원에 저지선을 편 뒤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민군은 미군의 포병 및 공중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주공을 3사단에서 4사단으로 교체하는 강수를 둬 기어코 조치원 일대를 장악했다. 미군은 다시 금강 남쪽에 방어전을 펼쳤지만 적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7월 16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8일 대전을 방문, 딘 소장에게 ‘20일까지 대전 사수’를 명령했다. 미국의 주력 전투부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전선에 배치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전을 긴급 방문한 워커 사령관(왼쪽)은 딘 소장(오른쪽)에게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딘 소장은 대전 방어의 중책을 34연대에 맡겼다. 19·21연대는 잇따른 패배로 전투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부임 이틀째인 34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대전비행장(현재 둔산동)에 캠프를 두고 월평산성(상수도사업본부 부근)과 남선공원에 1개 대대씩 배치했다. 서남쪽 논산에서 들어오는 가수원과 동북쪽 신탄진을 지나 남하하는 오정동에도 소규모 병력을 보냈다. 갑천을 거점으로 대전 도심 진입을 막자는 것이었다.

7월 19일 새벽부터 적은 T34 전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인민군 4사단 5연대는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은 뒤 107전차여단과 함께 갑천을 건너 월평산성의 미군 저항선을 돌파하고 비행장으로 진입했다. 연대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 어렵게 진지를 사수했다. 병력이 적은 서남쪽도 상황이 급박했다. 논산에서 진입한 인민군 4사단 16연대는 1개 소대가 주둔 중인 가수원을 돌파하고 갑천을 건너 정림동 고개로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은 1개 대대를 급히 보내 도솔산 고지를 점령한 뒤 정림동 고개에서 적을 격퇴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퇴로가 막혔다는 점이었다.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경무장한 병력으로 보문산을 우회하여 대전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금산과 옥천의 도로를 장악했다. 말 그대로 미군은 사방이 포위된 형국이었다.

20일 미 24사단은 대전시내 일원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이날 새벽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유성-대전 도로로 들어섰다. 비행장의 연대본부를 유린한 뒤 수침교를 건너 시가지로 향하자 미군은 3.5인치로 대응했다. 적의 전차 2대 파괴됐지만 일부는 시내로 진입,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서남쪽을 방어하던 미군도 밤새 전투를 펼쳤지만 이날 오전 정림동 고개를 내줬다.


▲미 24사단이 대전전투에서 패배하고 철수한 1950년 7월 20일 대전역. 역 광장에는 군인과 경찰, 미군과 일반 시민이 뒤섞여 있고 뒷편에 시커먼 화염이 보인다.

오후 들어 인민군은 시내 곳곳에 출현했다. 13시경 충남도청 앞에서 적 전차를 목격한 딘 소장은 직접 지프차를 타고 추격, 3.5인치로 명중시켰다. 이날 미군은 모두 10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대전시내 전역을 속속 수중에 넣었다.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화염이 치솟았다. 미군은 모든 화력을 퍼붓고 항공지원까지 동원했지만 통신과 연락망이 두절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미군은 후퇴 과정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판암동과 세천터널을 장악한 적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금산쪽 도로를 경유한 철수도 인민군 매복에 걸려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19-20일 치러진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3933명 중 전사 48명, 실종 874명, 부상 228명 등 1150명의 손실을 입고 전투장비도 65%나 잃었다. 딘 소장도 포로가 돼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대전전투는 아군에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일패도지하던 아군이 전력을 재편성하고 제1군단을 창설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 제1기병사단과 25사단이 투입돼 낙동강에 저지선을 펴도록 시간을 벌어줬다. 미군의 강력한 저항은 인민군에게도 큰 충격을 줘 작전의 과감성을 현저하게 떨어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