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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31 : 발해의 역사 34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8) 본문
한국의 역사 231 : 발해의 역사 34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8)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1970년대 이래 남북국시대론의 문제 제기에 따라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를 전후하여 거대담론의 붕괴에 따른 근대국민국가의 일국사적 시점에 대한 비판이 조류를 이루면서, 민족 중심의 역상인식에서 기반한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발해에 초점을 맞추는 남북한의 인식은 발해의 성격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발해를 속말말갈 중심의 당대 지방정권으로 파악하는 중국 학계의 인식 역시 발해의 비주체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해당된다.
그런데 현재의 국기.민족을 과거에 투영시킨 역사인식이라는 관점은 통일신라에도 적용된다. 일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를 조선삼국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발상에는 이미 조선이라는 세계가 존재하고 여기서 분립한 삼국을 신라가 통일했다는 무전제의 역사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7세기 이후의 신라는 통일신라가 아니라 후기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의해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파악하는 중국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에는 조선후기 및 남북한의 남북국시대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상황에 대해 몰이해 속에 "주관적인 억단에 근거하여 임의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가상에 맞추었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남북한의 남북국시대론의 주요한 근거인 고구려의 종족 계통은 말갈족과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예맥.신라.백제와도 다르며 "발해는 속말말갈인 대조영이 당에 의해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기초 위에서 중국 동북부와 조선반도 북부에 건립한 왕국이며, 신라는 진한.변한의 기초 위에 건립한 왕국으로 이후 백제 전부와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점유하여 조선반도 남부를 통일하였다". 반도 통일에 따라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배제하는 만선사관의 논리가 그대로 차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발해사에 나타나는 고구려와의 관련성이나 이를 규명하는 데 주력한 남북한의 연구 성과를 중국 학계도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발해사를 고구려사와 분리하여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은 중국 학계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최근 고구려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해 포섭하는 이른바 동북공정이 등장한 배경에는 이런 측면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보는 견해를 내세운 중국 학자들은 이미 발해사에 대한 논저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로 파악하는 견해가 고구려 영역과 관련된 요녕성과 길림성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반면, 흑룡강성 학자들은 여전히 발해사에서 말갈족 주체성을 반복하고 잇다. 이는 흑룡강성 지역이 고구려와 무관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될지 주목된다.
한편 중국처럼 다민족국가인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족이 중심을 이루는 러시아 극동의 소수민족의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말갈-발해-여진-현재의 연해주 소수민족으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의 지방정권론이나 남북한의 남북국시대론을 동시에 비판하며 발해가 독자적이며 독립적인 왕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맺음말
멸망 이후 오래동안 잊혀졌던 발해사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었다. 발해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신라 지배층에 의해 표방된 일통삼한 의식에 근거한 신라정통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남북국시대론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일제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등장한 만선사학이 발해사를 만주족의 역사로 취급하면서 한국사에서 배제하였다. 이는 전근대적의 정통론에 입각한 통일신라론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다.
반면 조선후기에 제기된 남북국시대론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지만, 근대적 체계와 방법을 이용한 실증적 학풍을 갖춘 식민사학의 거센 조류앞에서 발전할 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 식민사학의 안티 테제로서 남북한에서는 발해사가 적극적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일본 학계의 한국사 연구자가 발해사를 한국사로 파악하는 데 영향을 끼쳣다. 민족 형성의 계기로서 통일신라에 주목하였던 남북한 가운데 북한은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그 대신 고려의 민족통일을 강조하였고,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이 문헌뿐만 아니라 고고학에서도 뒷받침되어 '발해와 후기신라'가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통일신라라는 전제에 따라 발해사를 부차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비록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사용하지만 발해사의 지위를 통일신라와 동등하게 놓는 남북국시대론이 정착되었고, 나아가 통일신라를 부정하는 견해까지 제기되고 있다.
발해사를 말갈족의 역사로 파악하는 민국시대 중국의 견해도 일제의 만선사학에 대항하는 측면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 이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해 강화되었을 뿐이다. 다만 전통적 동북관에 의거하여 고구려를 한국사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발해사에서 말갈족의 역활이 강조되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각국의 발해사 인식에 큰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일제의 만선사학이었다. 만선사학은 한국사나 중국사와 무관한 역사공간으로 '만주'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신생 민족국가로서의 남북한이나 중국이 발해사를 자국사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북한의 남북국시대론은 일제 침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패전 후 일본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남북한과 중국, 나아가 러시아까지 발해사를 자국사로 파악하는 인식의 배경으로 과거 역사를 국민국가 단위의 일국사적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근대역사학의 체질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상대적으로 민족에 대한 자각 의식이 강했다. 민족에 대한 강한 관심은 신생 독립국가에게 자민족 대 타민족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에 따라 발해사와 같이 귀속 문제가 애매한 경우에는 건국 주체 내지 지배 세력의 종족 계통에 대한 해석 여부가 자국사로 편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믿음을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식은 동아시아 상호간에 소통의 부재를 초래한 냉전체제하에서 아무런 의문없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개혁 개방과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 등은 발해사를 둘러싼 상호 인식의 격차를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였지만, 자국사 편입이라는 당위 속에 발해사를 이해하기 위한 학술적 논쟁보다는 상대방의 논리를 비난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발해사의 자국사 편입이라는 당위가 발해사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이라는 절실한 시대적 요구와 달리 현실의 한편에서 과거 역사가 각국의 갈등과 대립을 촉발하는 현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탈민족.탈국가 주의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근래 다양한 형태의 애국주의가 더욱 고양되고 있으므로 동북아의 역사분쟁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최근의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인한 한중간의 갈등 양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만이 상호 인식의 차이를 줄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발해사 인식을 주로 민족주의 사학의 전개과정과 관련하여 서술되었다. 그러나 남한 사회의 일반 대중이 발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잃어버린 대륙의 땅' 또는 '광할한 영토'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편으로 영토회복이라는 극단적이며 분쟁적인 논리로 치우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또한 통일신라에 대한 논란 여부와 관계없이 남북국시대론이 국정교과서나 가설서에 점차 수용되는 일반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아예 한국사에서 발해사를 부정하는 최근의 견해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양극단의 인식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앞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사안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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