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30 : 발해의 역사 33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7) 본문
한국의 역사 230 : 발해의 역사 33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7)
1950년에 제기되었던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은 1980년말 다시 '비효통'의 '중화민족의 다원일체격국론(多元一體格局論)'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중화민족은 한족을 비롯해 층차가 다른 50여 개 민족을 포함하고, 각 민족 또한 내부에 층차(層次)가 다른 민족집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 층차의 다원관계는 또 '분분합합(分分合合)의 동태'와 분이미열(分而未裂).융이미합(融而未合)의 여러 종류의 상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화 과정에서 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와 호조, 고유문화발전 지원 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공동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발해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과거 발해 영역의 대부분이 현재 중국의 영역내에 있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 학계의 연구는 고고학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이지만,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해 발해를 당대(唐代) 지방민족정권이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일체 부정하고 말갈 중심의 국가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고구려가 조선사(한국사)라는 점을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즉 중국은 해동삼국이라는 전통적인 동이관(東夷觀)에 따라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발해를 강조한 북한의 견해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말갈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북한이 1960-70년대에 발해사 연구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육정산과 상경성 등 발해의 주요 유적지를 중국과 공동으로 발굴하여 고고학 자료까지 확보하였던 점과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연구 자체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때문이었다. 그런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거하여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파악하는 중국 학계가 1980년대에 새로운 발굴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를 축적한 논리를 보강하게 되자, 이미 발해와 후기신라에 입각한 북한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고구려의 계승성, 그리고 고려로의 계승성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려졌다. 이로 인해 북한 학계는 계승성에 치중하여 논증에 무리를 범하고 발해사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최근에는 사료 비판 없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문제점도 발생하였다.
남한에서는 남북국시대론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다가, 1980년대 이후에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의 주도적 역활,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 발해 문화에서 고구려 요소 등을 강조함으로써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련의 연구와 함께, 남북국시대론의 영향하에 신라와 발해의 상호 관계에 관심도 부각되었다. 고구려와의 계승성을 통해 발해사를 한국사로 파악하려는 인식틀은 북한과 비슷하지만, 중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무시하지 않고 발해사에서 말갈적 요소를 인정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점은 다르다. 다만 말갈의 종족적 계통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입장 차이가 있다.
한편 남한에서는 남북국시대론이 점차 일반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는 여전히 통일신라였다. 1980년대 이후 남한의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즉 "남북국시대에는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부터가 아니라 676년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이동한 시기부터 발해가 건국되는 698년까지의 22년간을 통일신라로 한정"하는 역사가 '한규철'의 견해나, "발해는 삼국통일이 일단락된 뒤에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왕조"로서 "삼국통일이 대동강 이남의 부분적인 통일에 그친 것을 보완해 주는 역활을 했으므로 통일신라라는 용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역사가 '송기호'의 견해는 통일신라론의 영향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개념어 가운데 '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발해를 배제하거나 또는 소극적 인식을 초래한다는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통일신라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역사가 '김영하'의 견해가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신라의 일통삼한 의식은 이른바 삼국통일의 동기가 아니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에 의해 형성된 자의식에 불과한 것이며, 종래의 삼국통일론은 연역적 해석에 불과하고 실제 역사 과정은 신라의 백제통합과 당의 고구려 점령 실패에 뒤이은 발해의 건국이라는 남북국시대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남북한의 발해사 인식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분단의 심화 속에서 은연중에 신라와 발해를 현재의 남북한에 견주려는 발상이 등장한 것이다. '발해와 후기신라'로 파악함으로써 발해의 우위를 내세우는 북한은 통일신라론이 "사실상 발해를 조선력사에서 떼내려는 것이며 '신라중심설'과 '신라정통론'을 내세움으로써 남조선 괴뢰들의 매국배족적인 '북진통일론'에 그 어떤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어용행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 반면, 남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 즉 통일신라의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 삼국간 동질의식을 강조하는 한편 통일신라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나 '후기신라'를 채택한 개설서에 대해 '그 행간에 숨어 있을 듯한 저의"를 의심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요컨데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파악하기 위해 제기된 '남북국시대론' 또는 '발해와 후기신라'에는 분단의 장기화 및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 따라 통일신라를 계승한 남한과 고구려-발해를 계승한 북한이라는 인식이 투영된 것이다. 이 점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용어의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통일신라론이 지속되는 이유중의 하나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232 : 발해의 역사 35 (발해사를 마무리하며......) (0) | 2011.05.04 |
---|---|
한국의 역사 231 : 발해의 역사 34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8) (0) | 2011.05.03 |
한국의 역사 229 : 발해의 역사 32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6) (0) | 2011.05.01 |
우면산의 봄 14(신경숙과 바벨탑) (0) | 2011.04.30 |
우면산의 봄 13 (연예인의 사생활) (0) | 201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