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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9 : 발해의 역사 32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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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9 : 발해의 역사 32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6)

두바퀴인생 2011. 5. 1. 04:31

 

 

 

한국의 역사 229 : 발해의 역사 32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6)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탈민족주의 속에서의 남북국시대론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만선사학은 중국과 역사적으로 무관한 역사지리적 개념으로서 만주를 창출하였다. 그에 따라 반식민지의 상태에 처한 중국에서는 변방지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과 뒤이은 만주국의 성립 등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었을 때 중국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중국 동북지방이 역사의 여명기부터 영토상 중국의 완전한 일부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만선사학에 대해 역사적.이론적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중국의 '부사년'(1806-1951)이라는 학자는 중국 고전에 나타난 동이가 산동반도와 그 남쪽의 회하 유역에 분포했다고 보던 종래의 견해를 만주로까지 확대 해석한 <동북사강>(1932)을 저술했으며, 고고학자 '이제'(1896-1979)는 대략 같은 주장을 피력한 <역사상의 만주>(1932)를 준비하여 만주사변의 발발 현장을 시찰나온 국제연맹 '리턴 조사단'에 제출하였다.

 

또한 고사변의 주필로 유명하던 '고힐강'은 그 제자인 '담기양','풍가승'과 함께 1934년 3월에 <우공>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중국 고대 및 현대의 역사지리를 연구하였고, 특히 1936년에 특집으로 발간된 <동북연구전호>(전6권)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경각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발해사와 관련하여 '당안'의 <발해국지>(1818), '황유한'의 <발해국기>(1931),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1934).<동북통사>(1941) 등이 출간된 것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왕국으로 규정하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부정하였다. 즉 그는 대조영을 본디 당의 하급군관이자 말갈인이라고 단정하면서, 고구려와 관련성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김육불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국가로 파악하는 견해는 만주를 중국사에서 배제하려는 일제의  만선사학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만선사학과는 다르다. 즉 만주가 아니라 중국의 동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여의 후예인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 이후 숙신의 후예인 발해에 합류하여 금, 청으로 이어졌다는  파악 방식은 만선사학과 유사하다.

 

만선사의 이데올로그로서 유명한 '도엽암길'이 <발해국지장편>에 대해 서평을 쓴 것이나 김육불이 만주국 봉천도서관 주임으로서 1933년 동아고고학회의 동경성 발굴에 참여할 수 있었던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국공내전을 거쳐 새로이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표방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학계는 전통시대의 한족 중심의 중원왕조와 소수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촉발되었다. 중국사는 한족과 다수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 공동의 역사, 다민족 대가정의 역사로 파악하여 역사 연구를 통해 현재 사회생활의 의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공감하였다.

 

그런데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형성 시점이 옛날부터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부터인가에 대해 '백수이'와 '손조민'간에 첨예한 논쟁이 일어났다. 양자의 입장 차이는 '현재의 중국'과 '역사적 중국'의 일치 여부, 나아가 이것은 '고위금용'과 '취고논고'로 요약될 수 있는데, 숱한 논쟁 끝에 '중국은 예로부터 통일적 다민족국가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편 문화대혁명 시기에 민족정책은 대민족주의보다 지방민족주의 비판에 무게를 두게 되면서, 소수민족의 언어문자.생활방식.풍속습관.문화예술 등 민족의 차이나 소수민족지구의 특성을 모두 부인하였다. 곧 민족문제를 계급모순으로 파악하여 계급투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서 수많은 소수민족의 간부와 주민이 희생되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 종결 이후에는 지난 시대의 과오를 씻고 민족단결을 회복하기 위해서 현재의 중국을 구성하는 모든 민족의 조상들이 과거에도 함께 중국인이었음을 학문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