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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8 : 발해의 역사 31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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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8 : 발해의 역사 31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5)

두바퀴인생 2011. 4. 30. 03:55

 

 

 

한국의 역사 228 : 발해의 역사 31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5)

 

남북국시대론은 패전 후 일본 학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먼저 근대 일본의 역사학이 일국사에 기반한 고립적이고 국수적인 성격으로 인해 제국주의에 복무한 점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동아시아 세계라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의 주체적 발전도 함께 파악할 것이 요구되었다. 특히 처음으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 박시형의 견해는 식민사학, 한국사의 왜곡에 대한 자기 반성의 차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즉 발해사를 한국사로 파악하는 시도는 만선사학의 근간을 이루는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 잡지인 <사학잡지>의 회고와 전망에서는 만선사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조선.만주' 또는 '만주.조선'이라는 항목이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1961년을 기점으로 조선과 만주가 분리되고 뒤이어 만주가 북아시아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74년부터 발해사 관련 논문이 '조선' 항목에서 취급되는 형태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남북국시대론이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일정한 이해를 얻은 결과였다.

 

패전 직후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에게는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은 내재적 발전론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인식되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민족주의 사관으로 경시되기 쉽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사 연구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 것은 한국사 왜곡이 예전의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학문적인 반성과 책임감에 더해,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의 발생과 지속에 대해 일본이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과 그에 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한국인식이 뿌리깊게 일본에 남아 있는 데 대한 경계감과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남북국시대론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며 발해를 한국사로 포함시키더라도 여전히 통일신라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로 파악하였다. 또한 한국사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발해사를 만주사 또는 동북아시아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발해사가 문제 제기에만 그치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과 일본에서 근대적 역사방법론과 결합되어 발전해온 만선사학의 전통이 이런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한편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서도정생'의 동아시아 세계론과 '석모전정'의 일본국가형성사에서의 국제적 계기론이 제기되면서 일본대외관계사 일환으로 발해사가 주목되었다. 또한 석모전정의 '수장제론'을 원용하여 발해의 수령에 대한 연구가 등장하면서, 대외관계사에서 사회구조 및 지방통치 등 발해 사회 내부로 관심이 옮겨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