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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7 : 발해의 역사 30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4) 본문
한국의 역사 227 : 발해의 역사 30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4)
박시형의 견해는 곧바로 1962년판 '조선통사'에서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의 발해국의 성립'으로 반영되었고, 1977년판 '조선통사'에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발해의 성립'처럼 간략화되었을 뿐 기조는 같다.
그 이후 '조선전사' 5 중세편 '발해 및 후기신라사'(1979)에서 처음으로 '후기신라'라는 용어가 채택되면서 1987년판 조선통사에서도 '발해와 후기신라'로 정착되었다. 통일신라를 부정하면서 표제어를 간략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이때 후기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운 점이 주목된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초반 중국과의 공동조사를 토대로 발해 고고학에 대한 상당한 연구성과를 거두며 발해사 연구를 주도하였다.
한편 북한은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봉건적 역사인식에 속하는 조선후기의 남북국시대론과 '통일신라'를 사용 또는 인정하고 있는 1920년대의 남북국론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이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확립시키는 동안, 남한에서는 실증사학의 주도하에 통일신라론이 강조되면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1960-70년대에 남한에서 거의 유일하게 북방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성과를 내던 이용범의 다음 발언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금까지의 우리 국사계에서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발해사를 국사의 일부로 간주하려던 이조후기의 제석학들이 남긴 전통을 그대로 계승되어 대부분의 국사개설에는 아무런 학적 검토도 없이 의례히 상당한 지면을 발해국의 흥망과 그 문화, 제도의 서술에 할애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꼭 발해사를 한국사 계열에 넣어서 서술되어야만 한다고 하면 그 선행조건으로 반드시 발해사의 근본문제부터 재검토하고 재검토된 성과에서 어느 정도 학적인 신념을 얻지 않은 한 한국사의 일부분에는 언제까지나 불투명한 장막에 가리운 부분이 노출된 채로 서술이 되풀이만 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진정한 자세로서의 발해사와 국사와의 연관을 모색하려면 국사교본에 발해의 흥망을 서술하기 앞서 먼저 발해사 전반에 대하여 착실한 사료의 재검토와 우리측 관점에서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여 둔다."
실증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남한학계에서 사료가 부족하고 종족 계통에 혼란이 있는 발해를 학문적으로 실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는 데 소극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발해사의 근본부터 재검토하고 재검토된 성과에서 어느 정도 학적 신념을 얻기까지는 발해사를 한국사로 파악하는 데 유보적이었던 견해는 박시형에 의해 착실한 사료의 재검토와 박시형.이우성에 의해 우리측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 다른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발해왕국 자체의 구성이 고구려 유민을 주체세력으로 이루어졌으나 문화와 혈연을 달리하는 이부족과의 복합국가로서의 취약성은 숨길 수 없는 사회였으며, 이 왕국의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을 지연.혈연을 또는 문화면에서 우리 국사와 밀착시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 민족 또는 국가로서 의식에 강력한 작용을 하는 요소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발해사가 한 민족사 형성에 있어서 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공동추억체 의식이 우리 국사에서 그 자취를 거의 찿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처음으로 한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한 신라는 통일후부터는 그 정체의 움직임이 곧 국민공유의 역사가 되었던 것이며.......그들이 우리 국사에 정통으로 되어 있는 통일이후의 신라와 적대관계로 시종하였던 까닭에 우리 민족의 운명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시도하는 바를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이론적인 근거가 없는 한, 이와 같은 시도는 오히려 우리 국사에 공허한 내용을 첨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발해사를 국사체계에 넣는 데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와의 추억공동체로서의 발해사 연구가 더 진실하게 개척되어야 하겠다."
민족 형성의 계기를 삼국 통일에서 찿는 통일신라론은 남북국시대론의 문제 제기에 대해 한민족 형성사에 발해가 포함되지 않았고, 신라와 발해는 서로 적대적으로 민족의 운명 공동의식이 없엇다는 측면의 비판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1948년에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였고 10만 명 이상의 발해 유민을 동족으로 우대한 사실 등을 염두에 둔다면, 한민족 형성의 관점에서는 고려의 민족 통일이 신라의 통일보다 더 강조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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