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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6 : 발해의 역사 29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3) 본문
한국의 역사 226 : 발해의 역사 29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3)
2. 식민사학 안티테제로서의 발해사
해방을 맞이한 한국에서는 이제 일제의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독립국가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새로운 역사서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중세적 역사인식의 잔존과 식민지적 근대의 역사인식이 혼재된 상황에서 새로운 역사인식의 수립은 용이하지 않았다. 만선사학에서 예맥 계통의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제외한 것은 당연히 부정되었지만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미하였다. 해방 후 발간된 개설서에서 1920년대 크게 부각되었던 남북국시대 인식이 사라지고 더구나 장도빈조차 해방후에 저술한 저서들에서도 이를 철회한 것은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의 퇴조는 상대적으로 통일신라의 강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남한의 대표적인 개설서인 이병도의 '조선사대관'(1948)에서는 "요컨데 행이건 불행이건 반도의 민중이 비로소 한 정부 한 법속 한 지역내에서 뭉치어 단일국민으로서의 문화를 가지고 금일에 이른 것은 실로 이 통일에 기초를 가졌던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북한의 '조선통사'(1956)에서도 "7세기 중엽 신라의 삼국통일은.......단일적 조선 준민족의 급격한 형성과 그 발전으로 이끌었으며, 이 조선 준민족의 형성은 삼국통일이 낳은 산물"로서 그것은 "후에 조선 민족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사는 만선사학에서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조선반도의 역사로 해석되었던 만큼, 신생 독립국가의 입장에서 국민 또는 민족 형성의 계기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그 계기를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찿은 것은 중세적 정통론과 만선사학의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후의 남북한 역사학이 민족주의 사학보다 만선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만선사학이 갖고 있는 근대적인 역사방법론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신생 독립국가인 입장에서 민족주의 사학에 무관심할 수도 없었다. '조선사대관이 '단일국민으로서의 문화'를 형성하는 기초라는 점에서 통일신라의 의의를 강조한 소절의 제목은 '신라의 통일과 발해의 건국'이지만, 상위의 표제어로서 상대사 제4기 '남북세력 대립시대'를 설정하였던 것은 1920년대의 남북국론의 영향이었다.
통일신라의 민족사적 의의가 강조됨에 따라 소홀하게 취급될 수밖에 없었던 발해사에 대해 먼저 주목한 것은 분단 이후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북한이었다. '박시형'은 1962년 발표한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에서 "오늘 우리 국토의 거의 절반을 령유하고 있던" 그리고 "고구려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발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는 발해의 건국주체가 속말말갈족이며 발해를 말갈족의 국가로 전하는 신당서 발해전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지칭한 사실에서 당시 남북국이라는 개념이 실제하였음을 끌어내며, 여기서는 "신라와 발해가 지금 서로 남북으로 대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태요 결국은 통일되어야 할 동족 전체의 부분이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남한에서는 이보다 뒤늦게 '이우성'이 신라 중심으로 편찬된 '삼국사기'를 비판하고 실학자들의 남북국시대론을 환기시키는 시론을 발표하였고, 뒤이은 논문에서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발해사를 전제한 다음 발해사가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로 식민사학의 영향도 있음을 지적하고 당의 '이이제이' 정책에 매몰되어 발해를 이적시한 신라 지식인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두 견해 모두 실학 이래 남북국시대론을 계승하여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고구려 옛 땅에 세운 나라라고 파악하였다. 또한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함께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한민족으로서의 신라와 발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박시형의 경우 신라가 국토 남부의 통합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통일신라를 부정한 반면에, 이우성은 통일신라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또한 종래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이유를 전자는 신당서 발해전의 봉건 유교식 춘추필법에 치중한 반면, 후자는 신라 위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태도와 함께 만주사의 설정을 통해 고구려. 발해를 한국사에서 배제한 민선사학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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