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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5 : 발해의 역사 28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2) 본문
한국의 역사 225 : 발해의 역사 28 (발해사 인식의 변화 과정 2)
일본의 근대사학은 서양사의 실증적.합리주의적 방법론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한학과 국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전후라는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연구 대상이 한국에 집중되면서 근대사학은 한국사 연구라는 형태를 띠고서 일본에 정착하였다. 즉 일본의 근대사학은 동양사가 주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주장한 '일선동조론'에 대해 동양사 연구자들은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과 만주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동양사도 그 대상이 확대되어 '만선사학'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세련된 '식민사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의 러일전쟁의 승리로 대련과 장춘을 잇는 철도와 여기에 부속된 이권을 획득한 다음 1906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를 설립하였다. 만철의 초대 총재 '후등신평'은 이른바 '문장적 무비론'에 근거한 국책 조사활동을 중시하였다. 그는 '만한(滿韓)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와 '순수한 학술상의 측면'에서 '학술상 만한 지방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가 급선무임을 주창'하는 '백조고길'의 요청을 받아들여 1908년 만철 동경지사에 '만선역사지리연구실'을 설치하였다.
만연의 연구 결과는 '만주역사지리' 2권(1913), '조선역사지리' 2권(1913), '만선역사지리연구보고' 16권(1915-1941)으로 간행되었다. 그중 '만선역사지리연구보고'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지리에 대해 자세하고 치밀한 고증으로 유명하지만, 이때의 만주는 중국사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한 지리.공간적 개념이었으므로 조선 역시 조선반도(한반도)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만선사'에서 말하는 '조선사'는 조선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이므로, 반도적 성격에 근거한 '타율성론'으로 직결되었다. 또한 중국사로부터 분리된 만주사의 설정에 따라 만주족 최초의 국가인 고구려와 두 번째인 발해가 주목되었다.
만주사의 설정에 따라 고구려는 만주의 역사이며 반도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별 개의 역사라는 논리는 다시 예맥과 삼한을 별개의 종족으로 구분하는 논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만주와 분리된 조선사에서 한반도 남부를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신라는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독자적인 만주사로서의 고구려와 발해의 설정은 통일신라론과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제의 만선사학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정리하려는 목적에서 1922년 발족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면서 몇 차례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발해와 관련하여 만선사학을 주도한 '도엽암길'과 신라.백제사를 전공한 '금서룡'간의 미묘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도엽암길은 '만선불가분론'에 입각하여 신라를 서술하는 곳에서 발해 사료를 수록하려고 하였지만, 금서룡은 발해를 조선사와 관련이 없는 한 생략할 것을 밝혔고 결국 후자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 결과로 나온 '조선사'(1932-1938, 전37책)는 단순한 통사가 아니고 하나의 사료집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대로 사료를 볼 수 없는 입장에서 이것이 유일한 자료로서 기능하였다. 외관상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선택이 행해졌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한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살리는 역사가 될 수 없었다. 시대적 체계와 방법을 이용한 실증적인 학풍을 갖춘 식민사학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연구자에게 일차 사료에 대한 접근조차 용이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해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기대할 수 없게 하였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만선사학'에서는 '발해사'가 새삼 강조되었다. 발해는 미개한 발갈족이 일으킨 나라로서 당이나 고구려에 종속된 문화적 식민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이 말갈족의 후신인 만주국을 영도하여 이곳에 '왕도낙토'를 건설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에 따라 발해와 일본의 우호관계가 중시되었는데, 1933년 4월과 1934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동아고고학회'는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로 추정되는 '동경성'을 발굴하였다.
이 조사는 새롭게 일어난 만주국과 일본의 우호.일체화를 옛 발해시대로 소급하여 역사적으로 확인하려는 선전의 역활을 맡고 있었다. 이때 출토된 일본의 화폐 '화동개진'은 그 증거로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만주국 건국 10년을 기념하여 1942년에는 '동경 용원부'로 추정되는 훈춘 '반랍성'의 발구 조사가 행해졌다. 발해와 일본간의 교통로인 일본도가 동경 용원부를 경유한다는 점에서 이곳은 일.만 양국의 귀중한 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제기된 '남북국시대론'은 한말의 역사가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중세적 역사인식의 잔존과 일본 근대사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주체적 인식에서 발전의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국계몽사상의 한국사 인식에서는 왕조사적 정통론에 의한 체계화나 시대구분은 정면에서 부정되었고, 국가의 외경력을 기준으로 한 한국사의 체계화가 시도됨으로써 부여사.고구려사.발해사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신채호는 1908년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반변적 통일'이라는 점에서 비판하며 '삼국이 합하여 양국이 된 시대' 즉 '분국시대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주체적 자아를 확립한 민중을 중심으로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박은식은 1915년에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는데, 그, 결론에서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을 그 기조로 삼을면서 "발해가 망하자 역사도 망한" 사례를 통해 한국통사를 지은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식민지하의 현실을 자각하는 데 발해가 새삼 강조된 것이었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발해인식은 장도빈,황의돈.안자산.권덕규 등 1920년대 전반의 '남북국론'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남북국론은 일본 식민사학의 결정체였던 '조선사강좌' 및 '조선사대계'의 '통일신라론'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황의돈은 '신편조선역사'에서 '남조의 통일', 안자산은 '조선문명사'에서 '문무왕의 통일' 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였다. '통일신라'란 용어 성립 과정에서 주목되는데, 황의돈은 뒤이어 발표한 '중등조선역사'(1926년)에서는 '남조의 통일' 대신 '남조 신라의 척경'이라는 항목을 사용하였고, 안자산의 경우 '대분립 시대의 후기'라는 전제하에 '문무왕의 통일'을 설정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한 '신라의 통일'은 신채호가 말한 '반변적 통일'과 같은 차원으로 나아가 1920년대에 '남북국시대론'은 통설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20년대 남북국론을 견지한 이들 가운데 안자산, 황의돈, 권덕규 등은 실증사학에서 입각하여 학문적으로 식민사학과 대결을 자부하던 이병도와 잦은 교류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실 고증에 치중하던 실증사학에서 남북국시대론이 받아들여질 여지는 없었다. 한편 1930년대에는 식민사학의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화경제사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자료의 탓으로 발해는 제외되고 신라만 연구 대상이 된 탓에 결과적으로 남북국시대론을 외면하게 되었던 점도 통일신라란 호칭과 의식이 확산되는 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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