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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불신의 사회, 타블로 학력 논쟁

 

 

 

불신의 사회, 타블로 학력 논쟁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회, 불신의 끝은 어디인가?

 

타블로란 청년이 가수인지,영화배우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어디 대학을 나왔는지 난 모른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알고도 싶지 않다. 요즘 세상은 가짜가 많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누리꾼들이 타블로라 사람의 대학 졸업이 가짜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인터넷 마녀사냥을 즐기는 모양이다. 즐기기도 하지만 진실을 밝히기를 시도하려는지도 모른다. 본인은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고 주변 사람들이 변호하지만 좀처럼 수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이 참 웃기는 기기다. 인간들이란 자신의 실명을 감추고 남을 비판하고 군중심리에 맞춰 아니면 말고 식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데 재미를 느끼지만 일부는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한 이 세상에 진실을 밝히기를 원하는 정의로운 사람들도 잇을 것이다.

 

인기 연예인들은 무척 곤혹스러우리라~~ 아닌 사실을 비슷하다며 인터넷에 올리고 합성 사진을 올려도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진실인양 동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는 캐나다 교포로 병역도 면제 받고 단기간에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강남의 학원 강사로도 같은 기간에 재직하였다는 것이 주요 이슈인 모양이다. 상대벅인 불쾌감, 즉 그런 그가 유명 연예인까지 되었다는 불쾌감이다. 이것이 인터넷에 공론화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동조하면서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군중심리에 의한 마녀사냥식으로 일을 벌이는 행동의 일체화 현상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이나 다단계 업체에 끌려가 미쳐버리는 대학 교수나 판.검사를 우리는 이해하지를 못 할 것이다. 배울만큼 배웠고 사리판단도 누구보다도 잘 할 것 같은 사람이 그러한 모순에 빠진다는 게 참 신기하다. 이성을 상실하고 망상에 사로집히기 쉬운 인간은 자신은 매우 똑똑한 인간으로 생각하기 대문이다. 인간의 머리속에 들어 잇는 지식은 태평양 바다에 떠 다니는 낙엽에 불과하다. 석.박사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인지는 몰라도 세상만사의 이치에는 어두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 , 즉 이성과 망상간은 백지 한장 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실명제를 실시하는 인터넷에서도 가명으로 또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등록하여 닉네임을 사용하니 누가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누리꾼들의 집요한 마녀사냥은 상대방을 주눅들게 만들고 수많은 댓글에 난무하는 욕설과 비난을 보고 흥분하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흥분하여 맛대응을 하는 것이 누리꾼들에게는 재미와 고소함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편 시기심과 질투심이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좋은 성적의 좋은 대학을그렇게 빨리 학위를 땄고 졸업했다는게 믿기지가 않는다는 누리꾼들의 불편한 심정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 연예인이나 사회 지도층의 학력 위조가 다반사로 들통이 난 적이 있었고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신정아 같은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기도 하였다. '과급 불유'라~~

 

 그러나 자신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굳이 해명도 필요 없을 것이나 누구던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즉각 반응하는게 사람인지라 타블로의 학력 논쟁은 우리 사회가 불신의 사회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는 모습같아 안타까울뿐이다.

 

                          

 

 

사설을 보자,

 

사회심리적인 면에서 타블로 학력 논쟁의 이면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또 그들의 행태와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천안함 사태부터 최근 힙합가수 타블로 학력위조 논란까지. 무조건 야유하고, 끝없이 의심하고, 마구 침 뱉고 조롱하여 모두를 오물통 속으로 끌어들이는 대한민국 온라인 현상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최소한의 상식조차 무시하고 튀고 싶은 쪽으로 멋대로 튀는 일부 '럭비공 누리꾼'들의 왁자지껄한 행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요즘,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문제일 것이다. 그들 '익명의 독설가 집단'이 퍼뜨리는 불신과 증오의 바이러스는 이제 고 최진실이나 타블로 같은 유명인 개인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군의 미욱한 대응이 원죄지만, 천안함 사태 진실공방에서는 공론을 오염시켜 국정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다.

이 지경에 이르자 '럭비공 누리꾼'들의 행태를 사회심리학적인 현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들도 나오고 있다. 인터넷논객으로 인기를 모은 진중권 교수는 타블로에 대한 누리꾼들의 공격 배경을 '좌절한 대중의 보상 추구 행위'로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대중은 스타에게 제 욕망을
대리 투사해 강한 선망을 품고 있지만, 이면에는 스타가 아닌 현실에 대한 좌절이 깔려 있다. 이 같은 좌절은 심리적 보충을 필요로 하는데, 적당한 계기가 생기면 스타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심리학의 고전적 이론 가운데 하나인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도 자주 인용된다. 1950년대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제기한 이 개념은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인식)와 행동 간에 괴리나 모순이 빚어지면, 이미 남에게 알려진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합리성을 외면하고라도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천안함 침몰 원인에 관한 거듭된 조사결과 발표, 잇달아 제시되는 타블로의 스탠퍼드대 학력 관련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불신을 거두지 않는 누리꾼들의 비합리적 행태야말로 인지부조화 현상의 전형적인 케이스란 얘기다.

하지만 대한민국 온라인 현상은 어쩌면 이론적 분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성폭행 살인범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의 얘기다. 한 후배를 만나 저녁 식사와 함께 얼근히 반주를 곁들인 후 그 친구의 작업실에 들러 한마디 던졌다.

"그래, 살인범 팬카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세상이야. 도무지 납득이 안돼. 초딩들이 설친다고 해도 말야."

그러자 그 친구의 표정에 기다렸다는 듯 느물거리는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 그대는 늘 상상력 부족이야. 이것 좀 보슈. 재밌어."

그는 곧 그 살인범 관련 댓글이 수없이 붙은 인터넷 텍스트를 찾아 '000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산 영혼, 잘 생겼으니 용서하자'며 뜬금없는 댓글을 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천연스레 말했다.

"지둘려 봐. 미꾸라지통에 소금 뿌린 것처럼 들끓는다니까."

과연 그 친구의 엽기적인 댓글이 올라가자 댓글판은 금새 갑론을박 야단법석이 됐다.

"이거 그냥 유희야. 그냥 불 한 번 던져 놓고 아우성치는 거 감상하는 거지 뭐.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마슈."

최근 미 뉴요커지 기자이자 <아웃라이어> 등의 책을 낸 비즈니스 트랜드 작가 맬컴 글래드웰씨는 트위터 등의 사회참여활동에 대해 "개인적인 희생이나 비용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조건에서만 부담 없이 하는 행동"이라며 그 의미를 일축했다. 주류 담론과 누리꾼들의 소란을 분별하는 사회적 기제가 필요할 때가 됐다.

 

불신의 끝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다. 그의 연구업적에 의혹이라도 제기할라치면 어김없이 네티즌들의 집단 린치가 가해졌다. 일부 ‘황빠’들은 밤낮 없이 전화로 괴롭히기도 했다. ‘사기’로 판명난 후에도 그들의 맹신은 계속됐다. 객관적 사실이 바탕이 돼야 하는 과학의 영역에 개인적 신념 내지 소망을 앞세웠다. 천안함 사건도 이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노빠’들도 비슷했다. 이들은 나 아닌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노무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으로부터 집단 이지메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네티즌들로부터 사상비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서로 사안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즉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동지(同志)가 아니면 적(敵)이다. 다분히 군중적 행태를 띤다. 또한 맹목적이다. 그 결과는 어찌 될까? 역사는 그 폐해를 잘 말해준다. 400여 년 전인 1591년. 조선 사신으로 일본을 갔다 온 김성일은 “왜군이 조선을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조선 땅은 왜군에 유린당했다. 서인과 동인의 싸움이 심각했던 당시 김성일은 정파적 이해에 따라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보고한 것이다. 진실은 하나다. 진실은 진실 그대로 있을 뿐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회’의 끝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