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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우면산의 7월 (영등포 역에서...)

 

 

우면산의 6월(영등포 역에서...)

 

영등포역

영등포

역사
역사
승강장
승강장

관할 기관 한국철도공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경인로 81 (영등포동 618-496)
개업일 1899년 9월 18일
역 번호 139
역 종별 그룹대표역
역 등급 1급
승강장 구조 5면 9선
경부본선
서울 기점 9.1 km
신길
(1.0 km)
신도림
(1.5 km)
비고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 비치역

 

 

영등포역(永登浦驛)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있는 한국철도공사이다. 서울특별시의 중추 역 중 하나로, 서울 서남부권의 수요를 담당한다. 흔히 서울에서 영등포라 하면 이 역 일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영등포는 한반도 중심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한강을 끼고 있어서 지류가 잘 발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水量)도 풍부하여 강구(江口)와 그 유역을 중심으로 이미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삶의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생활을 해온 신석기인들은 이곳에서 고기잡이, 사냥, 채집 등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하였고 의(衣)와 주(住) 그리고 장례에 이르기까지 생활방식을 개발하면서 조금씩 문명화되었다.


조선왕조후기 정조(正租) 13년 호구총수라는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등포는 경기도 시흥군 금천현에 속해 있었고 소머리재라고 불리우기도 했는데 이 소머리재는 지금의 영등포역이 있는 곳으로 추측되며 궁궐을 흠모하는 자들이 이재에 올라 동쪽으로 왕성을 바라보았다 한다. 그후 여러 번의 행정개편을 거쳐 1936년 4월 6일 한성부 영등포 출장소로 되었다가 해방후 영등포구가 되었다.

 

특히 영등포는 경인, 경부선의 분기점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원료 및 제품 수송에 편리할 뿐 아니라 서울이라는 큰 시장을 배후에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광활한 용지도 있어서 일찍부터 이곳에 공장을 지어 제사, 방직, 양조, 기계공업이 시작되어 우리나라 공업화에 기틀을 다졌다.

 

현재는 22개 동의 거대한 도시로 발달하여 여의도에 국회의사당과 KBS, MBC, SBS 등 방송사와 동아일보사 등 언론사가 위치하고 있어 정치와 문화를 선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증권사의 포진으로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로서 서울의 맨하탄이라고 불리어지며 우리나라 경제, 문화에 많은 영향력을 주는 지역이다. 특히 영등포구는 경기도 경계가 아닌 관악구와 강서구 그리고 구로구 등 새로 분구된 구에 둘러싸인 도시 중앙에 위치하게 되어 도심중의 도심의 구(區)이다.

 

영등포구 연표

 

시 대 연 대 주요사항
고대 신, 구석기시대 강유역과 강구(江口)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기잡이, 수렵, 채집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
조선 1789년 금천현(衿川縣)내의 영등포라고 호구총수 통계자료에 기록
(정조 13년) 처음으로 영등포라는 지명 사용
(태종 13년) 금천으로 개명
1836년 금천현(衿川縣) 하북면(下北面) 영등포리(永登浦里)
1876년
(고종 13년)
부산에 당도한 일본전권대신 흑전청강(黑田淸降) 일행이 13년 병자년 정월에 남양만을 거쳐 강화도에 상륙하여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당시에 서울 수호를 목적으로 군사를 영등포에 배치
현대 1896년 약 26마일의 노선이 확정되고 영등포역사 확정
1898년 경부선 철도공사 착수
1910년 경기도 시흥군청을 영등포리로 이전
1917년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 3개리만을 독립시켜 영등포면으로 함
1930년 우리나라 최초로 읍으로 됨
1936년 경성부에 편입
193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공업용지구획정리
사업을 시작하여 공업입지를 조성함

 역 정보

역 구조

승강장

1 경인선·경부선 수도권 전철 1호선 완행 청량리·성북·창동·의정부·양주·동두천·소요산 방면
2 경인선·경부선 수도권 전철 1호선 완행 구로·부평·인천·병점·서동탄·천안·신창 방면
3 경인선·경부선 수도권 전철 1호선 용산 급행 신길·노량진·용산 방면
4 경인선·경부선 수도권 전철 1호선 동인천·천안 급행 부평·동인천·병점·천안 방면
수도권 전철 1호선 영등포 - 광명간 셔틀 전철 시착 금천구청·광명 방면
5 경부선 수도권 전철 1호선 서울 급행 서울 방면
수도권 전철 1호선 영등포 - 광명간 셔틀 전철 당역 종착
수도권 전철 1호선 영등포 - 광명간 셔틀 전철 당역 출발 금천구청·광명 방면
6 경부·호남·전라·장항선 상행 서울·용산 방면
7 경부·호남·전라·장항선 상행 서울·용산 방면
8 경부·호남·전라·장항선 하행 부산·마산·광주·목포·여수·장항 방면
9 경부·호남·전라·장항선 하행 부산·마산·광주·목포·여수·장항 방면

사진

역 주변

연혁

 

승차량 변동

노선 승차 인원 주석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1호선 54839 62829 66940 71506 50991
노선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1호선 48257 47898 46862 47545 48727

일반 열차

연도와 승하차방향 이용 인원
경부선
새마을 무궁화 통일 총계
2001년 하행 승차 1256300 6196782 82843 7535925
하차 317 3681 64 4062
상행 승차 45 2357 9 2411
하차 1190751 5177016 90630 6458397
2002년 하행 승차 1290841 6003625 94899 7389365
하차 185 4597 989 5771
상행 승차 38 3975 902 4915
하차 1200982 5051834 106311 6359127
2003년 하행 승차 1306868 5821898 87644 7216410
하차 242 11682 107 12031
상행 승차 37 16985 23 17045
하차 1200226 5052869 95928 6349023
2004년 하행 승차 1154633 5051113 20261 6226007
하차 174 3684 31 3889
상행 승차 747 5085 2 5834
하차 1132820 4679139 23354 5835313
2005년 하행 승차 990199 3743994 폐지 4734193
하차 209 18764 폐지 18973
상행 승차 1713 20239 폐지 21952
하차 946673 3442406 폐지 4389079

 

 

 

영등포역에서 만난 사람

 

지난 5월 중순 경 대구에서 고교 시절 여자 친구 k가 전화가 왔다.

자기 딸이 서울 구로디지털에 근무하는데 다음주 서울로 올라가니 만나자고 하였다. 만나는 장소는 영등포역으로 하였다.

 

만남

그녀는 같은 고교 시절 나와 같은반 친구 L의 소개로 한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내가 용기가 없어 만나지도 못했고 사귀지를 못했고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았다. 같은반 친구 L은 지금 초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으며 험난한 한국 교육계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그는 지방에서 동기회 총무를 오랫 동안 역임하고 있어 졸업 후 20년이 지나 가끔 업무차 지방에 내려가면 만나기도 하고 그의 집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은 같은 학교 후배 여학생이였는데 지금은 같은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여러명의 시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며 어렵지만 투정없이 매우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집을 방문한 나를 보자 평소에 남편한테서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다며 무척 반가워 하였다. 

 

친구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옛날 자기가 나에게 소개시켜준 k라는 여학생에 대해서 내가 궁금해하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대구에서 평범한 직장인과 결혼 후 백화점에서 옷가게를 하면서 아들을 하나 낳아 키웠는데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백혈병에 걸려 생명을 잃게 되자 실의에 빠진 그녀는 그동안 잘 해오던 백화점 옷 가게도 결국 접게 되었고 두문불출하면서 지냈다고 하였다. 지금은 딸 하나를 키우고 있으며 고교 동기회 모임에 나오지만 아들을 잃은 마음의 상처로 살아가는게 무척 힘들어 한다고 하였다. 난 연락처도 모르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으니 고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소식이라도 들어서 다행이었고 잘 살지 못하고 안타까운 것은 현재 그녀의 삶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 건강을 위해 동기생들과 등산을 다니면서 절에도 다닌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졸업 30주년 행사가 있다고 동기회에서 연락이 와서 겸사겸사하여 대구로 내려갔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나고 고향도 방문하기로 하였다.

 

 

향수

고향을 떠나온지 30년이 넘은 것 같았다. 대구에 내려간 김에 고향을 찿았다.

 

지금은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집도 남의 집이 되었고 아무 것도 남은게 없다. 고향 읍내에 살고 있는 초등/중학교 친구들도 만나보았다. 모두가 결혼하여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 가고 있었고 마을과 읍내는 너무 많이 변하여 옛날 길은 기억에 희미했다. 30년이 지나 친구들을 만나니 얼굴도 희미하고 이름도 기억에 가물거렸다. 고향에 도착하여 옛 집도 둘러 보고 어린 시절 자주 올라가던 마을 뒷 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마을 뒷 산에 올라가면 멀리 읍내가 보이고 금호강,주남 벌판,기차길,탄약창도 보인다. 금호강 물줄기가 두갈래 내려오다 마을 앞쪽에서 합류하여 대구쪽으로 흐른다. 탄약창에서는 가끔 불발탄을 처리하는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면서 땅을 흔들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은 한국 전쟁시 국군 8사단 사령부가 위치하던 곳으로 북한군의 공격 기세를 아군 8사단의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 시킨 곳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에 미군 통신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앞에서 "헬로우!" 하면 미군 흑인 병사가 쵸클렛을 던져주었는데 그 당시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철조망 안에는 토끼풀이 무성하였는데 보초병은 누나들만 들여 보내고 우리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고향 뒷 산은 읍내는 물론  금호강 건너편으로 안동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어린 시절 월남전에 파병하던 청룡.맹호 부대 장병들이 군가를 부르며 이 곳을 지나갔다. 마을 뒷 산에 올라가니 그들의 군가소리와 함성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였다. '사라호' 태풍 때는 마을 앞까지 물이 차 올라 물구경을 자주하곤 하였다. 흙탕물에 떠내려 오는 가재도구며 소,돼지 등 가축들도 많았다. 그 당시 '사라호' 태풍으로 피해가 무척 많았던 해였다.  당시에는 마을 뒷 산 뿐만 아니라 주변 야산들이 모두 붉은 벌거숭이 산으로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뿌리까지 캐서 군불을 땐 적이 있었다. 매일 마을 친구나 형들과 같이 토끼풀, 소먹이풀을 하려 가거나 나무하려 산을 오르곤 하였는데, 전쟁 놀이도 하고 토끼몰이 사냥도 하였고 참외.수박 서리도 하였다. 산밑 우리집 텃밭에는 무우, 배추,오이,감자,옥수수 등을 재배했는데 학교를 갔다오면 어머님 계시는 텃밭으로 달려가 어머님이 밭을 메시는 동안 난 배가 고파 그런 것을 생으로 자주 먹곤 하였다. 텃밭 밭 뚝에 앉아 국도를 바라보면 젊은 남여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달리는 모습을 가끔 보곤하였다.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본 어머니께서 "제들은 부자집 애들인기라..." 라며 중얼거리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기억에 아물거린다. 

 

겨울이면 마을 공터에서 술레잡기,팽이놀이,못치기,연날리기를 하였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모여 쌀을 한 홉씩 가져와 밥을 하거나 두부를 사와서 김치에 걸쳐 먹었는데 별미였다. 민화투와 육백,뻥,도리짓고 땡도 배웠고 동네 아가씨들과 짝을 지어 남의 집 김치 훔쳐오기, 닭서리를 하기도 하면서 긴긴 겨울밤을 보내곤 하였다. 당시 목욕은 여름철 마을 앞 금호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유일하였고 강바닥에서 모포만 덮고 친구들과 같이 밤하늘 별을 세며 잠자기도 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온 가족이 호롱불에 모여 속옷을 벗고 이잡기에 열중하였고  졸다가 호롱불이나 촟불에 머리를 태워먹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당시 동네 어르신네 대부분은 돌아가시고 그때 젊은 형들이 지금은 마을의 중추 세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 마을은 경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국도 바로 옆에 있는지라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곳이었다. 그래서 뜨내기 사람들이 와서 잠깐씩 살다가 떠나곤 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대구 도시 친구들이 하이킹을 가다가 우리 마을에 들러 우리집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였다. 그 당시 한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지나가는 할머니를 치어 우리집으로 달려 왔던 적이 있었다. 손에는 피가 범벅이 되어 당황해하던 친구를 안정시키고 뒷처리를 상의하고 사고처리를 한 적도 있다.

 

재회

졸업 30주년 행사장에는 학교 은사님도 나오시고 벌써 취기가 약간 돌아 분위기가 들 떠 있었다. 난 고향에서 늦게 올라오는 바람에 참석이 좀 늦었다.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얼굴도 서먹서먹하고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이 기억나는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서로 반갑게 악수하지만 그동안 서로 헤어져 각자 타향에서 서로 대화가 없이 지내다가 30년 만에 갑자기 만나게 되니 대화도 안되고 모든게 부자연스러웠다.

 

교장 선생인  친구 L가 나를 보자 " 야! k 여사가 왔는데 만나 봤냐?"고 하였다.

난 "아니? 어디? k 여사가 나왔어?" 하였다.

 

그러자 친구가 기르키는 곳을 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 동문들이 한 테이블을 같이 모여 앉아 있었다. 한복을 입고 앚아 있는 모습이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친구가 나를 안내하여 그녀가 있는 테이블로 나를 대리고 갔다. 여자 동문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을 둘러 보았으나 금방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난 너무 오랫만이라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여고생 때의 모습만 상상하니 한복을 입은 중년 부인이 된 그녀를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코가 오똑했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비슷한 사람을 느낌으로 찿았다. 드디어 그녀 옆에 도착하여 친구가 그녀에게 말했다.

 

"00씨, 이 친구 기억나세요?" 하고 친구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쳐다보았다.

" 안녕하세요! 오랫만입니다!"라며 난 목례를 하였다.

" 아! 예~~ 안녕하세요~~"라며 그녀는 반면의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정말 오랫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아, 예~~"

"많이 예쁘지셨네요~~"

"네~~감사합니다."

난 잠깐 옆에 앉아서 다른 별다른 이야기도 없어 옆모습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난 테이블에 있는 맥주병과 잔을 들고

"술한잔 하시겠어요?"

"아니, 전 못해요~~"

"아! 네~~"

그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단아하고 차가운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 계시다고 그러시던데..."

"아! 네~~ 30주년 행사라 모처럼 내려왔습니다."

" 네~~ 가끔 총무님한테서 소식들었어요.~~"

" 아, 그러세요?"

"하시는 사업은 잘 되시죠?"

" 아, 네~~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습니다."

"...."

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될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연거퍼 맥주 두 잔을 비우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더 할말도 없었고 주변 여성 동문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보는 것 같아 자리가 좀 불편하였다. 주변의 여자 동문들의 눈초리도 이상하고 술이 약간 취한 현역 해병대 동기 한 명이 나를 보자 반가워 하였다. 그는 나를 치겨 세우며 자리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난 빙그래 웃음만 지으며 맥주만 마셨다. 난 그만 일어서야 겟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전 이만 친구들 좀 만나볼께요~~"

"네~~ 그러세요~~"

"참, 내일 체육대회 오세요?"

"시간되면요~~"

" 아, 네~~,그럼 이만~~"하며 목례를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분위기가 파장에 가까워 오자 어수선한 틈을 타서 가까운 친구들과 같이 연회장을 먼저 빠져 나왔다.

 

행사장을 나온 난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같이 경산으로 가서 주막집에서 술을 한잔 더 하고 다시 경산에서 좀 떨어진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친구집은 경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국도변 마을이었고 우리들은 새벽 밤 하늘을 바라보며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걸었다. 친구네 집은 고교 시절 주말이면 친구들과 같이 자주 놀러 오던 곳이었다. 친구네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넉넉한 집안이었고 여동생도 몇 있었다. 그날 친구집에서 같이 해후를 나누며 하룻밤을 술로 지새며 밤을 보냈다. 당시 여중생이었던 사춘기의 친구 여동생이 있었는데, 자주 친구집에 간 나를 보고 좋아하였던 모양이다. 졸업 후 서울에서 대학 다닐 동안 가끔 친구에게 편지도 보내고 했는데 그 편지를 자기 오빠 몰래 뜯어 보았던 모양이다. 대학 졸업 후 부산 근방 지방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어느날 나의 자취방으로 친구 여동생이 찿아 온 적이 있었다. 한창 나이 20세의 처녀가 다 되어 날 찿아 왔던 것이다. 난 순간 당황하였고 제일 좋은 사과를 한 바구니 들고 나타난 그녀가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잘 타일러서 돌려 보낸 적이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친구에게 물어 보았더니 지금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ㅎㅎㅎ

 

다음날 모교를 찿아갔다. 체육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고 한낮의 태양이 따가웠다. 선후배 동문들이 같이 모여 체육대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축구.배구,족구,줄당기기 등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난 운동장을 돌며 그녀를 찿았다. 운동장 한켠에서 양산을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반가워 하였다.

"네! 오셨네요~~"

파리하게 야윈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제는 경산 친구집에 갔다가 오늘 오는 길 입니다. 술만 마셨죠~~"

"네~~"

"점심은 좀 드셨어요? 김밥 좀드시겠어요?"

"아니 됐습니다. 배고프지 않네요."

난 조금 옆에 서 있다가 말했다.

"다음에 대구에 내려오면 연락을 드릴께요. 식사나 한 번 하시죠!"

"네~~ 그러세요!"

"연락처는 동기회 주소록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 맞죠?"

"네!"

"알겠습니다. 전 오늘 오후에 서울 올라 갑니다. 다음 만날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난 체육대회를 좀 둘러보다가 친구들과 헤어지고 운동장을 나오면서 그녀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삼회

서울에 올라온 후에 몇 달이 지나 대구에 출장을 갔다. 일을 마친 후 그녀에게 '저녁에 시간이 있느냐'고 메세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저녁에 만나자고 하였다. 모교 근방 아는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식사가 끝나자 내가 제안을 해서 노래방을 가기로 하였다. 건강은 썩 좋지가 않았지만 그녀도 반가워 하는 것 같았다. 그녀도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그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지만 친구들을 통해 나의 소식을 가끔씩 들었다고 했다.  난 취기에 혼자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몇 곡만 하였고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노래방을 나와 우린 바로 헤어졌다.

 

사회

다시 대구 출장길에 그녀와 식사를 약속했는데, 대학생인 자기 딸을 같이 데려왔다. 딸에게 생소한 자리지만 같이 식사를 하면서 즐겁게 이야기 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딸에게 나를 엄마 고등학교 친구라고 소개시켰고 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른 집 딸 같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아쉬웠지만 그냥 헤어졌다.

 

오회

오늘 오후 5시 20분 새마을 열차로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하루전에 미리 전화를 주지 않았다면 나도 깜박 잊을 뻔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영등포역 일대를 돌아보았다. 

 

  

                                                                                                  역 구내 메인 홀

 

영등포역은 민자역사로 거듭 태어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옛날의 모습을 찿아 볼 길이 없다. 역등포역은 서울 도심에서 벗어나 상업 중심지구로 발돋움하였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곳 일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영등포 시장은 물류 중심지로 수도권 지역의 물류를 거의 책임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 건물의 상권이 들어서자 기존 상권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역 건너편 먹자 골목도 한산하고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구두 뒷 창을 갈면서 구두를 닦는 젊은이 한테 물어 보았다.

"아저씨, 이런 요지에서 구두를 닦으면 수입이 꽤 좋을 듯 한데 하루에 얼마 벌어요?"

그러나 구두닦는 젊은이는 시컨둥한 표정을 지으며

"옛날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유는 KTX가 영등포역에 정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님이 많지 않고 수입도 줄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인은 따로 있는 것 같고 이 젊은이는 그냥 고용인으로 채용되어 일하고 하루 벌이에 대해서 일당을 받는 것 같았다. 민자 역사에서 아마 불하를 했거나 최저 낙찰제로 사업자를 선정했을 것이다. 영등포 구청장을 포함 국회의원들이 KTX 영등포역 정차를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으나 철도 공사에서 광명역에 정차하는 관계로 아직 영등포역에는 정차하지 않는 모양이다.

 

 

 

                                                                                                   청렴 세상 홍보

 

정부 권익위원회에서 청렴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직원들이 모두 나와서 작은 거울과 팜프렛을 나누어 주면서 이 나라의 부패와 비리를 개선시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노력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다. 청렴은 위에서 먼저 모범을 보이면 서민들은 따라서 하게 되어 있다. 법과 규정이 지켜지지 않고 스폰서 검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정의가 사라지고 불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능력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완장 두르고 기념사진 촬영에 시간보내거나 실적을 남기기 위해 역사내에서 단체 기념사진 촬영하는게 급한게 아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홍보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노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역 구내 상가

 

 역구내 상가들도 평일이지만 서울역에 비해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물론 다른 곳에 비해서 손님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저 가게들이 이곳에 개업하기가지 민자 역사에 목줄을 메었을 것이고 매월 수입이 투자에 비해서 시원치 않을 것이다는 결론이다. 어느날 간판이 바뀌면 그 가게는 손해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서 주인이 바뀐 것이다. 업종을 바꾸고 서비스를 향상시켜도 손님이 없으면 다 허망한 것이라...

 

대형 상가들이 지역 중.소 사업자들 목줄을 죄고 있는 시대, 자영업이 500만이 넘는 우리 사회가 창업과 폐업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창업 컨설팅을 하는 사람들만 배를 불려주고 성공과 실패는 지신이 져야 하는 현실, 대학 학자금,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톼직금까지 몽땅 털어넣고 시작한 가게가 파리를 날리는 날이 온다면 그것도 하루하루 손해가 쌓여 보증금을 까먹고 있다면 누가 가게를 접지 않을 것인가?

 

가진자는 금융 위기, 부동산 하락 등 경기가 어려울수록 더 떼돈을  벌고, 갖지 못한 자는 더욱 털리고 빼앗기는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는 사회, 무엇을 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안정적인 공무원이 제일이라지만 그 공무원도 매일 똑같은 다람쥐 채바퀴 도는 생활을 반복한다면, 그리고 비젼과 꿈은 없고 그냥 그럭저럭 생존만 하는 봉급에 기한번 못펴고 상사 눈치보며 매일 출퇴근을 반복한다면, 늘어나는 학자금에 해외연수니 유학이니 남들이 보내니 내 자식도 보내야 한다는 부모들, 이들이 로또를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비젼없는 공무원들이 지방 곳곳에서 복지예산을 빼돌리고, 고객의 돈을 빼돌리는 은행원, 현금 인출기를 털고 현금 수송자를 탈취하는 사람, 기획부동산을 차려 헐값에 야산을 사들여 갖은 감언이설로 불쌍한 민중에게 비싼값에 팔아 치부하고 사기꾼들, 다단계 회사를 차려 유전이니 호텔이니 리조트 개발이니 휴양 시설개발이니 미용이니 만병통치약이니 피부가 예쁘지고 키가 크고 당노병이 낫고 성인병을 치유하는 명약이니 등 갖가지 사기수법을 동원하여 돈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의 전재산을 훌쳐가는 다단계 사기꾼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범죄자와 사기꾼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역 구내 옷 판매점(김창숙 상표)

 

역구내에 차려진 옷 가판대가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의 김창숙 뷰띠끄였다. 가까이 가서 옷 가격포를 보다가 심장이 멎을 뻔 하였다. 물론 세일 중이라지만 웃도리 하나 가격표에는 적게는 20만원대 부터 많게는 70~80만원대까지 가는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물론 색상과 디자인이 좀 독특하게 만들어진 옷이지만 무식한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가격이었다.  옷 가격은 거품이 가장 많다. 아마 원가는 몇 만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옷감과 바느질 수공비가 전부이지만 상표값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된다.  

 

비싼 옷을 입는 이유는 디자인과 색상, 그리고 오래 입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나 외형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는 명품이거나 비싼 옷 일수록 잘 팔린다고 하니 여성들의 허영심을 탓할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잘못된 병폐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저가 화장품도  비싼 가격을 부르면 잘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화장품의 재료는 그게 그것이다. 모두가 포장비요 상표값이다. 허영과 사치는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고 남편의 등골을 빠지게 만든다. 사기꾼일수록 사무실이 화려한 고급 가구들로 치장하는 것은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방법이다. 화장과 옷에 투자하는 금액에 비례하여 머리에 든 것은 반비례 한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이렇게 영등포역 구내를 둘러보다가 어느듯 그녀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파리하게 지친 모습으로 개찰구로 나오는 그녀을 보고 반기며 그녀가 든 짐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어깨 인대가 고장났다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더니 그녀 딸이 7호선 남성역에서 만나자고 하였단다. 양념 돼지갈비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그녀 딸이 잘 다니는 단골집이라 했다. 우리는 영등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다시 대림에서 7호선을 갈아탔다. 우린 별로 말이 없이 걸었고 팔짱을 끼지도 못했다. 남성역에 도착하여 그 집을 물어물어 찿아갔다. 대로변 조그만한 갈비집이었고 손님들이 꽤 많았다. 그녀의 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우리는 자리를 잡고 딸을 기다리면서 그동안 동기생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나가던 개인 병원의 의사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요즘 영업이 어려워 병원을 정리하고 낙향하거나 일부는 가정까지 파탄이 났다고 한다. 치과 의사를 하는 친구는 몇 번의 이혼과 결혼으로 가정이 파탄났으며 현재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였고 대구에서 수천억 재산을 가지고 한 때 잘 나가던 한 친구는 지금은 쫄딱 망하여 알거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동기생 친구의 창업과 패망 스토리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생전에 성서에서 현풍가는 고속도로 주변 일대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땅을 상속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구마 고속도로가 뚫히면서 그 일대의 땅값이 올라 무려 몇 천억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구.구미 등에 호텔도 인수하고 다른 사업도 크게 벌이면서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하였다. 동기회 식사비도 가끔 전액 부담하였고 틈틈이 기부도 했다. 직장이 없는 동기생들을 채용하여 사업장 관리를 맡기기도 하여 동기생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빋았다. 수천억의 돈이 있으니 주변에는 사기꾼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추천하면서 투자를 권유하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이렇게 털어 먹고 저렇게 털어 먹고를 반복하면서 사기꾼들에게 야금야금 당했다고 한다. 물론 그기에는 동기생들 일부도 가담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런 가운데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녔는데 운전수는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최고의 미인 아가씨를 채용하여 거의 매일 골프를 치려 다녔다고 한다. 

 

동기회 모임에 그 운전수 아가씨를 대동하고 나타나기도 하였고 은근히 그녀의 젊음과 미모를 자랑하며 비서처럼 대리고 다녔다고 한다. 여자 동문들이 보기에 좋지 않았고 다 속으로 욕을 하였지만 돈 많은 그 앞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잘못을 이야기 할수 없었다고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여자 운전수의 봉급은 아마 월 500만원쯤 되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가 어디던지 대리고 다니면서 애첩처럼 가지고 놀던 여자였다. 고속도로를 가다가도 휴게소나 공터에서 정차하여 생각나면 생리적 욕구를 해결했던 모양이다. 또 여자 운전수를 수시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돈을 많이 주는 남자에게 내숭떨 여자가 지금 이 땅에 어디 얼마나 될까? 아마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황제처럼 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황제들은 처음부터 대부분 말년에는 주지욕림에 빠져 처첩들을 수십 수백명씩 거느리고 인삼.,녹용으로 담근 술을 매일 마시면서 불로장생을 추구하면서도 매일 색기를 발동하여 이 후궁 저 후궁 돌아가면서 동침하니 무척 많은 기를 빼앗겼을 것이다.그래서 무리하게 기를 소모한 까닭에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하였다. 그 친구의 말로도 비슷하였는데, 가진 재산을 대부분 날리고 지금은 알거지가 되어 패인이 되다시피 하였다 한다. 주변에 구름처럼 물려들어 알랑방귀를 뀌던 친구들과 사기꾼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누구도 그에게 아는 체 하지 않는다고 한다. 로또 1등 당첨된 인생이나 그 친구의 인생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반대로 경주 최부자의 전례에서 보듯이 "절대로 관직에는 나가지 말고, 주변 100리 이내의 백성들이 굶지 않도록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또 " 재물이란 오물과 같으니 집에 두면 썩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법이니 주변에 뿌려 거름이 되어 오곡이 무르익도록 하라." 는 선친들의 기르침을 대대로 내려오면서 후손들이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 가문은 300년을 부자로 자리메김해 왔던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무상을 생각해 보았다.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며 천년 만년 잘 살것 같던 사람들이 다 허망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돈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10년도 안되어 다 날릴 수가 있단 말인가? 돈이란 벌기는 어려워도 날리는 것은 순간이라, 돈이 많아 행복한게 아니라 돈이 없어 불행한 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딸이 도착하였다. 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우리는 맛있게 갈비를 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나도 모르게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앙상한 그녀의 딸도 엄마를 닮아 말랐고 말씨나 언행이 많이 닮아 보였다. 구미에서 프로그램 회사에 취직하여 다니다가 서울 본사로 올라와 근무하고 있다고 하였다. 엄마의 애처로운 눈빛이 딸의 얼굴에 투사되고 있었다. 그녀의 딸과는 두번 째 만남이라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아니었고 이제는 나의 얼굴도 알아 보는듯 반가워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난 바로 헤어지려 했으나 대림역까지 같이 전철을 타고 와서 구로디지털 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식사전에 그녀의 손에 몰래 쥐어준 봉투가 얇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는데 나중에 집에와서 보니 발렌타인 21년 산을 한 병 선물로 주었다. 아마 술 좋아하는 나를 생각해서 대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우쒸~~ 이 비싼 걸...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서울오면 꼭 연락하세요~~"

그녀는 구로디지털 역에서 딸과 같이 내렸다. 밤하늘의 달빛이 잔잔한 나의 회한의 가슴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서초동-